기독교세계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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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나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기독교를 보는 관점을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오늘은 창세기 1장 1절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내가 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 독립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내가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지막 Gall은 단일을 이루는 신앙입니다. 하나 됨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라고 하는 시간이 있고 하나님이 라고 하는 주체가 있고 천지라고 하는 세계가 있고 창조하심이라고 하는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태초는 시간이고 하나님은 주체이고 천지는 세계고 창조는 원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가 다릅니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history, 역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늘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I am who I am.이라고 하는 am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에 보면 나는 빛이고, 나는 떡이고, 나는 목자라고 I am이라는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I am이 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실 때 I am who I am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나라 표현으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인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 현존, 늘 현재성을 의미합니다.
현재라는 것은 영원성과 같은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늘 현재입니다. 전도서의 주제가 ‘현재’입니다. 전도서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영원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영원성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과거든 상처가 되는 과거든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뭘 했다, 과거에 무엇을 한 사람이다, 과거에 슬프고 아픈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영원성 앞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미래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 사람이다, 이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늘 현재성입니다.
신앙은 현재성을 얘기하는데 그것이 구약에 있는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생명인데 생명이라는 것이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사랑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랑하겠습니까? 라고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묻는 것이 영원성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영원성입니다. 영원성이 답보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사랑할 거야. 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을 항상 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예쁠 때 사랑하는 것이고, 무엇인가 있을 때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할만한 것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역사라고 하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영원성과 완전히 대비되는 시간 속으로 오셨습니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불교용어로 말하는 찰나입니다. 사람이 100년에서 120년을 산다고 할지라도 영원성에 비하면 순간입니다. 태초에 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은 영원성으로 오셔야 되는데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곳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성에 대비되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이 영원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6시간 계셨습니다. 이 시간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우리한테 영원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내가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마더테레사와 히틀러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한테는 마더테레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고 히틀러는 정말 나쁜 사람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간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영겁이라는 불교의 시간의 바다 속에 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100년 뒤에 우리 중에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라고 하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에 주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시간, 영원한 시간 속에 역사라고 하는 시간은 너무나 짧고 너무나 쓸모없는 시간인데 그것이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그것이 영원한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태초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영원한 시간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돌고 돌아서 똑같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똑같지 않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으로 쓰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시간으로 쓰는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목적론, 왜 살까?를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꿈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 목적이 태초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시간에 피를 묻히신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이 만지시니까 성물이 되듯이 시간이 하나님 앞에 할례 받은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이 할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시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 태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사는 시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이 합해진 내가 사는 삶이 있습니다. 내 삶의 에너지는 남의 생명을 먹음으로 얻어집니다. 시간도 계속 일시적이고 임시적이고 물질도 계속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라면 우리의 삶도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도 영원성을 갖고 있고 물질도 영원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삶도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2014년 8월 19일이 영원한 시간인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으로 써야 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이 시간이 나에게 첫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라고 하는 영원한 시간으로 내가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세계관이고 이분법적 세계관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의 세계이고 천국에 가야지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루터의 두왕국론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장)’고 했을 때 육신이 flesh, 고깃덩어리입니다. 썩고 쇠하고 없어지는 것들인데 그것이 가장 거룩한 물질이 된 것입니다. 이 선언이 예수가 우리의 고깃덩어리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육신으로 몸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썩는 내 몸이 그냥 몸이 아니라 부활체가 되는데 부활은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썩어야 되는 몸인데 썩지 않는 몸 영원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체입니다. 이 개념 자체가 바뀌면 이미 땅의 세계 속에서 땅이 영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입니다.
태초에 시간의 할례가 있습니다.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객체 안에 있는 이 세계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객체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친구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인격적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추를 누르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이 안 될 수 있는 것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인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하려면 서로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로 치면 세 살 이후라고 합니다. 세 살이 넘으면 ‘싫어’ 하고 ‘No’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체이신 그 분이 나와 가장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태초라고 하는 시간 가운데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태초라고 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 시간 속에서 지지고 볶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조울증환자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기쁠 때는 좋아하다가 어떤 때는 열 받으셔서 싫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계시는 분이 뭘 모르시겠습니까? 마음에 요동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태초라고 하는 시간 속에 들어오시고 나니까 어떤 때는 사람 보다 더 열 받아하시고 어떤 때는 너무 기쁘고 좋다고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관계를 하기 시작하시는 것이고 더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신」 내가 신을 만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셔서 영을 다스리게 하시고 그 영속에서 자연, 물질세계를 두셨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이 어는 순간에 하나님을 거부하기 시작하니까 영이 위에 올라가고 영이 자연을 다스리고 사람이 그 밑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닥에 가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이고 사람은 자연에, 영적인 것에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순리가 역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천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의 세계이고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입니다.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있는데 영의 세계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세계도 만드셨습니다.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떠나면 안 됩니다.
영의 세계를 은혜의 세계라고 얘기하고 물질의 세계를 창조질서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세계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창조질서의 세계는 이성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천지를 만드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믿음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를 두신 것입니다. 이성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분석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 자체를 믿음이 없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매일 19세기를 얘기합니다. 21세기의 이성과 우리가 모르는 신비의 세계, 믿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19세기의 이성과 신비의 세계도 있습니다. 이 차이가 200년입니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이제는 신화의 세계가 다 깨졌습니다. 신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신앙이 대두된 것이 19세기였는데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19세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21세기 이성을 가지고 신비를 얘기해야 되는데 맨날 19세기의 신비를 얘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비는 하님이 내리십니다. 그런데 21세기의 사람들은 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내리는지를 알고 또 비조차도 만들어낼 수 있는 과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과 신앙의 세계는 보완의 관계이지 절대로 대비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물질의 세계를 창조질서의 세계를 통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는 과학적으로 설명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비가 오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아프다면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 창조질서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야지 하는 것은 은혜의 세계입니다. 약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천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세계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지’를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계가 구조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미워했다고 할 때의 세상은 세상의 구조를 구조답지 못하게 만드는 세속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앞의 세상과 뒤의 세상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은 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19세기를 살고 있어서 22세기가 되면 20세기 정도에 믿었던 믿음에 대해서 인정할 것입니다. 맨날 뒤 쫓아다닐 것입니다. 찬송가도 맨날 19세기 찬송가만 불러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제일 안정된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드신 것뿐만 아니라 보이는 세계도 만드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