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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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무로부터 유로 나오는 것인데 소위 말씀창조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르시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살아내는 것이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말입니다. 보이는 세계든 보이지 않는 세계든 이성이든 믿음이든 이 세계를 살아내는 원리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어야 되는 이유가 말씀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지고 그 흙에 숨을 넣으셨는데 숨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되는 존재가 나입니다. 모든 세계는 다 말씀이 필요합니다.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엄밀히 따지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래서 말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 안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했을 때 진화는 창조질서의 세계의 관점이고 창조론은 은혜의 세계의 관점이라고 얘기하는데 진화론이 과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진화가 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현상에 대해서 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세계가 우리 것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소위 천사의 세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의 세계에는 사단의 논리가 있고 하나님의 논리가 있습니다. 말씀도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왜곡된 말씀,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 하나님의 복음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인데 진화론은 과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창조론이 은혜의 세계라는 것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과 창조론을 과학과 은혜라고 하는 두 가지의 프레임으로 보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진화론은 증명이 안 된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이 종에서 종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설명이 안 되고 증명이 안 되어 있습니다. 가설입니다. 가설은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셨는데 어느 날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저희 아버지, 할아버지 이제 굶으셔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얘기한 믿음의 말입니다. 그 말을 이기는 방법은 똑같이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천국에 가면 뷔페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보아온 세계의 말을 하신 것입니다. 영의 말은 똑같이 영의 말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의 언어로 말할 때는 과학의 언어로 싸워야 합니다. 과학의 말을 하는데 자꾸 영적인 얘기만 하면 다른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질의 세계를 말합니다. 목사가 세상을 모른다고들 하는데 성경을 보면 세상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과정, 과정 하나하나는 모르지만 물질의 세계의 마지막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의 마지막은 썩고 쇠하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썩고 쇠하고 없어질 것을 영원한 물질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이고 세계는 우리가 피할 곳도 아니고 세계는 지옥도 아니고 세계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품고 있듯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버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이 안에서 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복 받아서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이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관도 무너져있습니다. 구원관이 다 죽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지의 개념이 없고 시간의 개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따라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의 부르심을 따라서 남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개념이 없고 땅에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다 종교생활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온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과 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다 복을 추구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 복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성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공의 의미가 아니라 사명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이룸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간에서 동쪽에 가서 마당을 쓸라고 하면 마당을 쓰는 것이 내 사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는데 꼭 문지기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약간 운명론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것입니다. 팔자,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욕구가 지나쳐서 욕망으로 오기 시작하면 욕망은 아무리 이루어봤자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또 다른 차원의 21세기가 아닙니다. 이것도 현재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다 22세기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1세기의 사람들은 2세기의 말씀으로 2세기의 사람들은 3세기의 말씀으로 9세기에 있는 사람들은 10세기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자꾸 미래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21세기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는 유럽이 연합이 되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50년이 되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또 2000년이 되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고 2012년이 돼도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다 요한계시록을 SF영화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21세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럴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노스트라다무스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기목사님이 70년대에 지구가 멸망할 시간이 5분 남았다는 설교를 매주 하셨습니다. 시한부종말론자하고 똑같았습니다. 말세의 징조를 얘기하는데 태초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시작과 끝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은 임시적인 시간입니다. 이 속에 늘 하나님이 계셔서 그 시간을 영원성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종말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의 종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의 현재성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영원성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이루지 못했는데 어디에 가서 또 이룰 수 있겠습니까? 내년에는 내가 헌신하고 아프리카에 가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오늘 부르셨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옛날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참수당한 김선일씨가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어서 사람들한테 예수를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참수당하는 순간에 살려달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원성은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대단한 교회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냥 그를 그 자리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이루지 못했는데 어디 가서 종말을 이룹니까?
EU가입국가가 12개가 되면 멸망한다고 하는 것이 SF입니다. 다 신앙을 신비주의로 취급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시간이 있는데 주님이 재림하셨다는 이 재림을 말할 때 주님이 영육으로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육이 떠났습니다. -육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육이 되었는데 +육이 부활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부활체로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썩고 쇠하고 없어질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몸인데 벽을 뚫고 지나갑니다. 다른 몸입니다. 다른 몸으로 살고 있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재림하신다는 말은 이제는 내가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 1서에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진짜라고 그것이 영분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을 test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세계는 다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몸이 너무나 쓸모없기 때문에 쾌락주의로 가든 고행주의로 가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몸은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입니다. 생각과 가치와 같은 영적인 것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사람들이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한테 오신 것이 역사적인 재림도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예수는 서로가 실제로 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형상을 진짜로 드러내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음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마지막 gall이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는 존재로만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내가 구원받고 싶고 예수를 믿고 능력을 갖고 싶다는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로 사는 삶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종말이고 재림하신 예수님을 내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OO형제를 보면서 내가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교황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예수를 봤다고, 진짜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고 얘기를 하는데 사실 개신교는 그 보다 훨씬 뛰어난 영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발바닥도 못 쫓아가는 것이 비극입니다. 다 예수를 믿는 존재로만 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교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살아내야 합니다. 예수로 산다는 것, 단일을 이루었다는 것이 ‘내가 예수다.’ 는 아닙니다. 잘못하면 진짜 교주가 됩니다. 예수로 살아낼 때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대우받는 것입니다. 예수로 대우받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형상이나 예수가 드러나는 모습으로 사는 것과 나는 존재론적으로 예수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단으로 찍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일을 이루는 것이 무서워서 사람들은 자꾸 예수를 믿는 존재로만 만듭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우리한테 오는 재림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내는 것이 재림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니까 계속 슈퍼맨, 초인을 기다립니다. 바울 같은 경우 디모데에게 ‘나를 본받으라.’ 고 말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주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예수가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자꾸 어디가면 만난다, 어디가면 뭐한다고 짐 싸고 다 팔아서 이상한 종말론적인 것에 빠져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비역사적 신비주의, 역사를 배제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들어오셨다는 말은 이 역사를 부정하고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신비주의는 역사적 신비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화 된 신비입니다. 신비인데 우리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신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합니다. ‘내가 봤어. 네 뒤에 귀신이 있어.’ 이런 얘기만 합니다. 거기에 혹해서 사람들이 귀신을 쫓으려고 500만 원 굿을 합니다. 귀신이 목적이 아니라 500만 원이 목적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어주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가치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대신 울어주고 대신 치유해주고 대신 보듬어줬습니다. 그것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99.9999999%가 다 헌금해야지, 돈 내야지, 목적이 귀신입니다. 그러면 육신이 예수의 육신이 아니라 다른 육신입니다. 썩고 쇠하고 없어지는 육신만 추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진짜 봤다고 해도 가짜입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벌떡 벌떡 일어나고 아무리 쓰러뜨려도 목적이 돈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가 돈이라면 가짜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이 쉬운 것입니다. 왜 하는데? so what?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맞추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귀신은 미래를 못 보고 과거의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을 합니다. 분석해서 개연성과 가능성 때문에 열려있습니다. 그런데 얼굴값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얼굴값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처지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그 처지를 극복하고 다르게 삽니다. 21세기 과학으로 얘기하면 MBTI, 에니어그램, 혈액형, DISC만으로도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기질이든 뭐든 믿음으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과학도 필요하지만 그 과학을 쓰는 것은 믿음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지금은 실험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실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산소와 수소를 섞으면 물이 된다고 객관화된 사실을 얘기했는데 이제는 그 물이라는 것 자체도 실험자의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현대물리학입니다. 믿음의 세계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보면 물에다가 고운 말 사랑의 말,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답게 변하고 욕을 하고 시끄럽게 하고 나쁜 말을 하면 물 결정이 보기 흉해집니다. 밥에도 고운 곰팡이가 피기도 하고 썩은 곰팡이기 피기도 합니다. 똑같은 과학인데도 다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음의 세계를 계속 이분법적인 사고로 만들어낸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19세기의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19세기의 신학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있는 내 태도라고 한다면 신학은 그것을 내가 분석하는 힘인데 신학과 신앙이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분석하는 힘도 있어야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태도도 정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데 태도가 좋다고 해도 분석을 못 하면 맨날 헛짓하고 있는 것이고 백치미만 있는 것입니다.
신학은 있는데 신앙이 없으면 태도가 무너져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것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신학과 신앙이 같이 맞물려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에 머물러 있습니다. 18세기의 청교도 신학에 꽉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언어도 다 분석도 다 그 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신학 안에 이분법적 사고가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가들이 해야 되는 것이고 종교는 굉장히 거룩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다 선거도 하고 선거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 자체가 다 정치적인 행위인데 그것을 계속 이분법적 사고로 보니까 세상에 대해서는 등지고 영적인 것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소위 신비주의자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지만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자꾸 중심 보라고 합니다. 제 아내가 ‘여보 나 사랑해?’ 라고 물어보면 ‘사랑해.’ 라고 대답합니다. ‘진짜 사랑해?’라고 또 물으면 ‘말 안 해도 알잖아.’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 안 하면 모릅니다. 진짜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줘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눈빛만 봐도 몰라?’ 하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모릅니다. 사랑은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 안에 땀도 있고 피도 있습니다. 땀과 피를 흘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랑의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201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