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욥기 1:20-22,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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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죄의 굴레 속에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또 나쁜 일이 벌어지면 혹시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라고 생각해서 조상의 죄든 내 죄든 결국에는 죄를 찾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복이나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에서 말하는 감사, 신앙에서 말하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추석은 감사하는 날입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명절, 특별히 감사절이라고 생각하고 지내고 있는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결론은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은혜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늘 신앙 안에서 살아야 되는 우리의 몫이 있는 것이고 그 몫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황도 아니고 비교도 아닌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복이고 비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의 복이라고 한다면 그 상황과 비교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절대감사를 하고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감사하십니까?’ 하는 질문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이 답이다」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또 「질문의 7가지의 힘」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에도 하나님이 질문하신 네 가지가 있고 또 사단이 우리에게 한 네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Is this best you can do?’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드라마에서 현빈이 했던 질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스티브잡스의 질문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라고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것이 만족할 만큼 아니 정말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질문을 하라.’ 는 것입니다. 또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네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라는 질문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무 뒤든 앞이든 모든 공간을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머리만 숨고 눈을 감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숨은 아담을 향해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코람데오, 늘 우리는 사람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또는 사람이 있든 없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라고 하는 그 질문 앞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입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면서 하신 질문입니다. 네가 사랑하고 너와 함께 살아야 될 형제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뿐만 아니라 이제는 형제 앞에 서 있는 나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가인이 ‘내가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굳이 그 사람과 관계해야 되는 것입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서 가이사랴라고 하는 시이저, 황제의 도시 앞에서 물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형제 앞에서 살고 있는데 너는 나를 누구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너의 삶에 나는 하나의 보조품이고 부속물이고 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지 못하는 존재냐 아니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황제의 도시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네 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그 사랑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 내 형제 앞에 있는 자, 주님이 주님 되심을 알고 있는 자는 이제는 주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신의 부르심과 자신의 소망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단도 질문을 합니다. 나와 너라고 하는 두 사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시지만 또 다른 영적실체인 사단도 우리한테 질문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인생은 나와 너라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안에 하나님과 사단이라고 하는 또 다른 실체 제 4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하와에게 질문합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정말로 이 동산에 있는 것을 다 먹을 수 있어?’ 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다 먹을 수 있는데 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하는 질문으로 바꿉니다. 99가지를 먹으라고 하고 한 가지를 부정했는데 사단은 그 한 가지를 더 크게 얘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단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진짜 사랑하는 거야?’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너한테 다 줄 수 있어?’ 라고 묻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욥은 1장 1절에 보면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욥의 그 삶 속에서 사단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까닭 없이 어떻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욥이 당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이 힘이 없으면 절대로 믿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능력이 아버지이고 능력이 사랑이기 때문에 능력이 없다면 아버지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늘 능력으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 구별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버지도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집안도 바꾸고 싶습니다. 혹시 삼성가의 숨겨진 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적어도 이것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필요한 하나님인지 필요 없는 하나님인지 정말 관계 자체가 목적인 것인지 관계가 수단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연히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고 높은 데서 뛰어 내리는 기적을 일으켜야 되고 모든 것을 권세를 가지고 다스려야 되는데 기적을 베풀지도 못하고 다스리지도 못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일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질문을 합니다.

네 번째 질문은 ‘나와 당신이 무슨 관계가 있나이까?(막 5:6-7)’
야고보서 2장을 보면 귀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귀신이 믿고 떠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친밀감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고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귀신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 지식은 하나님을 믿고 떱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 귀신의 믿음입니다. 사단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과 사단의 질문 가운데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욥은 그 답을 1장 20절부터 22절 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까닭이 있었지만 욥의 편에서는 전혀 까닭 없이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단은 까닭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욥은 까닭 없이 이유도 없이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 편에서는 그에게 까닭 없이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구약의 개념에서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도대체 이해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는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욥은 똑같이 그 고난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하게 하나님 믿는 사람은 부자여야 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베풀 만큼 관계가 좋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다 깨졌습니다. 다 깨진 인생 가운데에서 욥이 고백하는데 욥이 고백하는 세 가지 신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자기 상황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닥친 인생의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내 인생에 너무나 슬프고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까닭 없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고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갑니다. 이런 것이 최고의 믿음의 열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 인생 풀리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 가운데 있어야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갑니다.

두 번째는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기 때문에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고 주신 분도 여호와 시고 거두신 분도 여호와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왔고 하늘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몇 월 몇 일에 태어나서 몇 월 몇 일 날 갔다는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고 이미 영원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갈 사람이라고 하는 본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돌아갈 곳이 있는 본향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주권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고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왜 생겼을까요? 이것은 열매이고 하나의 현상이고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날까를 다시 돌아보면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가?’

이것이 사단의 질문이었는데 이 질문 앞에 서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give & take를 뛰어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내가 열을 주면 열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주고받는 관계를 뛰어 넘지 않으면 우리는 죽었다 깨도 예배자가 되고 본향자가 되고 하나님을 주권자로 섬기며 살 수 없습니다.

늘 우리는 계산합니다. 내가 세 번 받았으니까 한 번은 주려고 합니다.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한 번 받았으니까 한 번은 줘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늘 주고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이 굉장히 심리적인 것인데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상대가 그렇게 대한다면 나도 그렇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다가 어느 순간에 선을 베풀면 다시 선이 오면 더 큰 선을 줍니다. 그런데 다시 선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악으로 갚으면 더 큰 악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기합니다. 제가 몇 번 이 방법을 사용해봤는데 통했습니다. 인간이 정말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착가했던 것이 사람은 선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베풀고 주다가 사람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해보니까 잘 먹혔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는 인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뛰어넘어서 영적인 관계를 하려면 give & take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give & take를 뛰어넘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식에게는 늘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받을 생각 하지 않습니다. 주면 고맙고 안 줘도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제가 손해 보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자식들한테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것입니다. 늘 인간의 관계가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욥처럼 예배자가 될 수도 없고 본향자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삶으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give & take를 뛰어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실패와 죽음을 뛰어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실패가 은혜입니다. 망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갈 곳이 없는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없고 그냥 그저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느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길을 걸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give & take든 실패든 죽음이든 내가 뭔가 대단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해를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세 번째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가 뭘까? 를 잘 생각해 보니까 요한복음에 있는 고백처럼 ‘은혜 위에 은혜더라.’입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사실은 까닭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욥기 43장에 가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방어가, 사단과 싸우고 친구들과 싸우고 늘 싸웠던 것들이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했습니다. 다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마지막 바닥을 본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지금 욥이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고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봤다고 말합니다.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나님이 자신의 몸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얘기했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까닭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만 까닭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베풀고 살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사람이 악합니다. 그래서 give & take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까닭 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가 늘 이유를 찾고 조건을 찾고 있는 그 가운데에서 까닭 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위임하고 위탁하고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내가 무엇인가 이유를 가지고 내 주권을 가지고 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까닭 없이 주시는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못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까닭 없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은혜 위에 은혜를 덮어주시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이만큼 지으면 하나님이 그만큼 은혜로 덮으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죄가 더 커졌습니다. 그랬더니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계속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잘났다고 해서 까닭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까닭과 이유가 다 있습니다. 하지만 까닭 없이 주시는 하나님, 이유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지는 내 인생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모든 조건을 다 뚫고 지나가고 비교하는 것도 다 뚫고 지나가서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죽었다 깨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범사,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에 위임하고 위탁할 때 마다 그것이 기쁨이 되고 기도가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이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은혜 위에 은혜가 덮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아무리 부어도 물은 빠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밑 빠진 독이 물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그 감사의 바다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쁨의 바다에 우리의 몸을 던지고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가 살아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도 조건도 붙이지 않으시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늘 주고받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내가 무엇인가 성공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되는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에
하나님의 감사의 나라에
하나님의 기쁨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까닭 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셨던 그 하나님에게
내 모든 것들을 맡기고
사단의 소리 귀신의 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에 우리가 응답하고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내기를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201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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