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1-13, 사무엘상 22:1-2절)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는 ‘너희도 서로 받으라.’입니다.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예수를 쫓아가는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은 성경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 예수, 임마누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셨다고 하는 그 이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네가 네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 라고 말하며 조롱하고 비웃고 있는 그 속에서도 주님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두 번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함께 있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서 지극히 작은 자의 삶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보좌에 있지 않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사람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는 사실은 구약에서는 왕으로서의 기름부음 받은 자 또 제사장으로서의 기름부음 받은 자, 선지자로서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되었고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은 영적 권세,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르다는 의미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고 제사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들이 십의 일조를 드리고 90%를 가지고 산다면 이들은 120%, 다른 족속 보다 30%를 더 많은 물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해서 그들을 구별시키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요한1서 2장 27절에 있는 말씀으로 가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인데 기름 부으심으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기름 부으심이라고 하는 그 삶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에게도 메여있는 사람이 아니고 또 어떤 상황에 메여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라고 하는 참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에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 라고 하는 이 믿음의 사람은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인이고 임마누엘인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우리 안에 참된 기름 부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교주화시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종교화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복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그 예수로 살아가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로 대우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예수를 바라보라고 얘기하는데 예수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은 내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그 기름부음을 통해서 이제는 우리가 누구에게도 거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역사학자가 말하는데 휘장은 소가죽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휘장이 찢어질 수 있는 상황은 1/100 정도의 확률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여러 가지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자리에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깥뜰에서 ‘하나님이 저 곳에 계셔.’ 라고 하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성소에 서서 하나님은 ‘저 안에 계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온전히 단일을 이루고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늘 로봇과 같이 쫓겨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면서 1:1의 관계를 통해서 나와 단일을 이루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인생에서 이제는 내가 예수그리스도로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지만 서로 받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인 중에 한 분이 자기 인생 뒤돌아 봐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번도 남의 도움을 받고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가끔 우리 아이들한테 한 살 때부터 세 살 때 까지 자란 과정을 다 비디오로 찍어놔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하루도 누구가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이가 그 나이입니다. 세 살이 넘으면 벌써 주관이 생겨서 먹을 것도 찾아서 다니고 어디에 먹을 것이 있는지도 뻔히 알고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누가 자기를 미워하는지 다 압니다. 누구한테 빌붙으면 먹을 것이 있을 것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좌우 분별이 안 됩니다. 누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에게 남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살았느냐고 말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느낌을 깊이 느껴보게 하려고 여의도에 있는 가장 좋은 중국요리 집을 예약을 해서 갔습니다. 그 집에서 최고로 비싼 1인당 10만 원 짜리 풀코스요리를 둘이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공짜라고 말했습니다. 뭔가 바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뭔가 목적을 이루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니까 공짜로 받는 경험을 하게해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의 10년 전 이야기니까 그 때 제 사례비가 10만 원이었는데 두 달 치를 몽땅 털어서 쓴 것입니다. 

우리는 늘 못 받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늘 받아야 된다고, 늘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늘 예수를 쫓아가는 삶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쫓아가는 삶은 늘 주님 앞에서 복을 바라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세전에 내가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 조성되기 전에 이미 복을 주시고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복 받은 사람이고 이미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미 그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복을 추구하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의 근원이 아니라 복의 블랙홀로 살아갑니다. 복의 늪입니다. 어디 갔더니 복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손 없는 날 이사를 가야 합니다. 손이 있느냐 없느냐? 동쪽에 가면 귀인을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를 따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가지고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이제는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믿음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지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받을 힘이 생깁니다. 

예수인, 임마누엘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의 삶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우리가 똑바로 주님의 것을 이루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롬15:1절)’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자, 말 그대로 예수그리스도, 임마누엘 하신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예수를 믿으라고, 너희는 임마누엘을 믿으라고, 너희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말은 우리에게 임마누엘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신 것이고 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 삶입니다. 누군가가 내 약점을 담당하고 있고 누군가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남들을 위하는 삶으로 살아내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공동체가 우리 가운데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성경 말씀은 ‘나’를 바꾸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고 정죄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뜻이 같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열방을 섬기는 제사장의 나라로 우리 가운데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왜 이스라엘이 고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들의 복을 추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나라로 열방을 섬기는 나라로 세우셨는데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하셨는데 일은 하지 않고 서로 받아들이는 삶은 살지 않고 계속 자신이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받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상 22장 1절 2절에 있는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받는 과정이 아주 현실적인 삶 가운데 드러나는 다윗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열다섯 살 정도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서른 살에 실제적인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은 15세에 받았는데 실제 왕이 되어 다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30세였습니다. 15년 동안 다윗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니라.’ 

도망자의 삶입니다. 15세부터 30세 까지 다윗의 인생은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의 인생은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망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21장 마지막 장면이 다윗이 살려고 미친 짓을 하는 장면입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를 분명히 왕으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 미친 짓을 하면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는 버림받음을 통해 하나님께 받는 인생이 됩니다. 

‘온 집이 듣고 그대로 내려가서 그에게로 이르러.(삼상 22:1)’ 

가족들이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삼상 22:2)’ 

400명이 모였습니다. 자신의 가장 밑바닥의 삶으로 들어가 보니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다윗의 용사들이 됩니다. 그 당시의 비서실장도 되고 경호실장도 되고 국방부장관도 됩니다. 성경에서 33명 용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열거합니다. 그들이 오늘 여기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환난당한 자고 빚진 자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만약에 왕이 된다면 보통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을 찾으러 다닐 것 같습니다. 수첩에 이름 적으며 다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기름을 부으셨는데 왕으로 온 다윗에게 가장 비참하고 버림을 통해서 버린 자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버린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로 바꾸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못 배우고 무식한 자들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그들이 변하니까 가장 지혜롭고 또 생명을 구하는 인내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욱’하는 것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전 후서를 읽어보면 그 보다 더 인자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늘 무엇인가 받으려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좋은 것을 받으려고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없는 가운데에서 있는 것을 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상징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비참한 죄인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사형하는 하나의 사형형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이 가장 거룩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는 믿음은 완벽하기 때문에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밑바닥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들을 받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사자가 있는 우리는 울타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어떤 동물도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양은 울타리가 없이 모든 동물과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나라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있습니다. 뱀과 어린아이가 같이 장난을 하고 놀고 있습니다. 어떤 독도 어떤 야성도 그 순진함과 그 순수함 가운데에서는 함께 어울려서 서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기준이 생기기 시작하면 누구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내 삶 가운데서도 누구나 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기준도 가질 수 없는 우리들을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을 받는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이기 때문에 도망자의 삶이 이해가 됩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 강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800명을 죽이는 또 주인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또 무기도 없이 싸울 수 있는 그런 용사들이 그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받는 신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서로를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환난, 빚진 것, 원통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상황입니다. 다윗도 자기 인생 속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였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이지만 자기 상황은 도망자의 삶이었고 동굴에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든지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존재로 환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약점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 부분을 내가 책임지고 가야 되는 하나님 앞에서 담당해야 될 몫입니다.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될 몫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약점을 분명하게 보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을 분명하게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내가 담당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용납하십시오.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시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은 
예수로 임마누엘로 그리스도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의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너의 구원을 이루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고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할 수 있는 자입니다. 

고통당하는 자, 병든 자, 없는 자, 무지한 자들과 
함께하는 힘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위를 주셨는데 
우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만질 때 마다 말할 때 마다 사용할 때 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고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겠노라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2014. 8. 3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