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로마서 16:1-16, 창세기 1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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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와 함께 서바나로 가기 위해서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쓴 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요소를 얘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믿음은 내가 지식으로 또는 감정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내 몸을 움직이는 순종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순종은 믿음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랑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사랑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다 내어주시는 사랑, 성령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이신칭의 이상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에 이르기까지 라고 하는 믿음의 차원이 있는데 내가 진리지식에 대해서 동의하는 믿음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는 몸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믿음은 이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 몸의 헌신, 내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어쩌면 우리는 이방인들이 하는 사랑만큼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철저하게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로마서의 부록과 같은 말씀인데 사도바울이 구원의 여정 구원의 신비를 말하면서 결국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안하라고 하는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단순히 지식이나 논리나 아니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구원은 이런 거야.’ 라고 자부심만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한 생명, 생명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6장은 사도바울의 믿음의 총체인 한 생명의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부터 29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문안하라’입니다. 문안은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웃어른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잘 지내고 있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인사법은 거룩하게 입을 맞추며 샬롬이라는 평화의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문안을 위한 인사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1절부터 16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모두 26명의 사람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26명의 로마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면서 문안하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 세 가지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In Christ, 주 안에서입니다.
인종을 뛰어 넘고 성별을 뛰어넘고 계층을 뛰어넘는 그래서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서 우리가 한 형제이고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In Christ 라고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안하라는 이 말은 사실은 그냥 인사가 아니라 환대하고 있는 인사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헨리나우웬의 「영적 발돋움」이라는 책에 보면 환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영적 발돋움을 할까? 한 발자국 더 뛰어넘어서 자라날 수 있을까? 라고 할 때에 헨리 나우웬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독의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비밀,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고독의 시간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는 문을 열고 누구든지 환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발돋움입니다. 환대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누누이 얘기했지만 내가 그냥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만 봐도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것을 뛰어 넘는 그래서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을 가지고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환대의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의 열매를 얘기합니다. 말씀을 추적하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우리가 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눈을 감고 골방에서 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눈을 뜨고 말씀을 추적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소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고독과 환대와 기도, 이 세 가지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원리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은 지금 26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대하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6절)’

고린도후서 13장 11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것, Holy Kiss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14절에 보면 사랑함으로 입맞춤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샬롬이라는 축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In Christ,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한 몸이라는 것을 알면서 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함으로 사랑함으로 축복하는 인사를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사람, 또 나와 상관없는 사람, 나와 가치가 다른 사람과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서 In Christ, 하나님 앞에 축복하는 사람으로 살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살아가는 존재이고 하나님 안에서 지체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권도 함께 주셨지만 항상 저주가 아닌 축복의 말을 하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축복하는 자의 삶이 거룩한 입맞춤을 하는 삶입니다.

창세기 19장 1절부터 29절까지 쭉 읽어보면 롯의 환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환대는 18장에 나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환대하는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나무가 있는 곳에서 세 사람의 천사를 만납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환대하는 모습과 19장의 롯의 환대가 아주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천사는 세 명이었고 롯에게 찾아온 천사는 두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천사들이 찾아온 때는 낮이었고 롯에게 천사들이 찾아 온 때는 밤이었습니다. 낮에 찾아왔다는 말은 충분히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자신의 몸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롯을 찾아온 천사들은 저녁이라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팔고 떡을 만들어서 최고의 별미를 천사들에게 대접합니다. 그런데 롯은 겨우 무교병으로 천사를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는 생명을 낳는 환대였습니다. 그 천사가 와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환대를 했습니다. 물론 롯의 환대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까지도 천사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롯의 환대도 대단한 믿음이었지만 그것이 생명을 낳는 환대가 아니라 그저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환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상중에 냉수를 대접하는 상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어쩌면 롯은 냉수를 대접하는 한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생명을 보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 19:29)’

아브라함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마시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롯이라고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의인이 사실은 나그네를 환대했던 롯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셨는데 구원의 표시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29절)’ 그 롯을 구원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늘 가난하게 살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비옥한 땅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Holy Kiss 거룩한 입맞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문안하고 서로 묻고 서로 인사하는데 그 인사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내 마음으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나그네는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개도 자기 동네에서 싸우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동네를 떠나면 늘 지극히 작은 자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어떤 제도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누군가에게 힘의 논리로 눌릴 수 있는 것이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그네와 같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내 마음이 자라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상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문안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 하는 신앙은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서로 문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보살펴주는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찬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묻고 듣는 문안을 할 수 있는 인사의 연합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친구를 만났는데 아주 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번 만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추석에 친척과 형제들을 만나는 것도 기껏해야 1년에 두 세 번이 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일 마다 얼굴을 보는 친구입니다.

우리 안에서 사도바울이 꿈꾸고 있는 믿음의 실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한 생명입니다. 믿음의 실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궁극적인 Gall이 생명과 생명이 만나고 부딪쳐서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생명의 신비,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한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역사가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생명이고 한 사람이지만 그 생명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생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망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좌절한 이야기도 있을 수 있지만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신앙의 이야기이고 그것이 한 생명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한 마디로 그 사람을 내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생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대단한 역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함께 문안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서로 축복합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부자 되세요.’ 라고 하지 말고 ‘승리하세요.’ 라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셔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정말 거룩하게, 다르게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말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주님 안에서 살아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축복하는 말들이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민족 가운데 차고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이는 말, 미워하는 말, 정죄하는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한 발자국 더 나가면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에 내가 정죄자가 됩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맞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아니기 때문에 증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맞다고 해서 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예, 아니오’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증오하고 정죄하고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불쑥 저주하는 말, 정죄하는 말, 심판하는 말을 하고 있는 내가 있는 것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26명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운데서 얼마나 헌신했고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목회자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하나 있는데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을 높이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제가 비판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제가 싫은 말을 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제가 하나님 앞에서 머물러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견디고 이기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 명절에는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명절이라고 문안하는 사람이 너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서도 서로 쌩까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면 그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이 빛을 내고 있어도 그 속에서 나 홀로 묵묵히 살아야 한다면 그만한 지옥이 없을 것입니다. 가난해도 함께 웃고 가난해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6명의 이름을 쓰면서 구원의 가장 큰 열매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한 몸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환대하고
서로 입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며 살겠노라고
내 믿음이 한 생명을 두고
한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
주님 앞에 함께 내어주는 그런 사랑을 하겠노라고
함께 거룩함을 지켜내는 사랑을 하겠노라고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는 그런 말을 하고 살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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