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3
미국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런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라고 까지 얘기를 합니다. 본성인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AIDS걸린 사람들을 괴물처럼 보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죄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성연애는 역리이고 엄밀히 따지면 가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동성연애자들의 가정을 가정으로 인정하고 세금은 더 철저하게 부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 민족이 유지되려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더 물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가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입양하면 된다고 얘기하는데 입양해도 문제입니다. 누가 엄마이고 누가 아빠인지 헷갈리는 것입니다. 제 후배 목사 중에 하나가 이혼을 했는데 사모님이 동성연애자이면서 이성애자였습니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 친구를 상담하게 됐는데 사실 먼 얘기가 아닌 우리들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진리를 역행하고 살아가는 역리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의 순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역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역리가 순리가 됩니다. 그리고 순리를 사용하는 것을 오히려 역리라고 합니다. 진리를 불의가 막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연애자 문제에 대해 인권을 얘기하다보니까 어느 순간 인권존중의 차원의 프레임으로 보기 시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기준도 없어졌습니다.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인데 그것을 꼭 죄라고 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연애자의 문제를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문제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 안에서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문제는 다른 누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역법에서 동성애자를 잡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분명하게 죄로 기준을 세워놓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기준이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하니라.(32절)’
옳다고 하는 것이 자기네가 진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실한 마음, 충성된 마음을 주셨는데 성실과 충성이라는 말 속에는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주셨는데 상실한 마음은 책임을 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29절부터 쭉 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죄가 관계의 죄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책임인데 책임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상실한 마음, 그것이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것,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함 자체가 나타나는 현상이 책임을 지지 않는 관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기다려 주고 어떤 때는 희생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돌보고 섬기는 것으로 가야되는 것입니다. 책임지지 않고 인내하지 않으니까 무자비하고 무정하고 희생하지 않으니까 자신의 것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돌보지 않고 공격하고 섬기지 않으니까 섬김을 받으려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군림의 끝이 살인입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사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마음과 생각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가는대로 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다 보니까 늘 바꾸고 정욕대로, 역리로, 상실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것처럼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내버려둡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것이고 정신이 가는 대로 사는 것이고 내 몸이 가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가는 대로 살다 보니까 결국에는 결론이 사형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 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통해서, 진리를 통해서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라고 하는 이 말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을 가지고 지식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통해서 감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내가 의지를 사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것을 통해서 상황과 사건과 사람이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냥 내가 가는 대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 때 그 때 상황과 사건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진리지식이 아닌 꾀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정이 있는데 그 감정이 상황이 좋을 때는 정말 좋고 상황이 슬플 때는 너무 슬픈 것입니다. 감정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의지는 좋을 때는 나는 할 수 있다고 교만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너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좌절해서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와 ‘할 수 없다.’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지를 가지고 살면서 그 의지가 탓을 하고 사는 의지가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해 버리고 역리대로 쓰게 되고 상실한 마음이 생기니까 결국에는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진리를 약속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 사건, 사람을 보지 않고 내게 주신 하나님만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 ‘머릿속에 자꾸 생각이 떠오르는 데 어떻게 해요.’ 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었다 깨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책임 중에 하나가 내가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로봇처럼 1번 누르면 마음을 정하고 2번 누르면 마음을 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격체로 만드셨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정하는 것입니다. 정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선물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선물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내 몸의 체질이 상황과 사건과 사람을 통해서 계속 요동칠 수밖에 없는 체질입니다. 체질을 바꾸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예배를 많이 드린다고 해서 체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바뀌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고 선민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상황, 사건,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매일 딴 짓 하고 있습니다. 자꾸 사람들이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어떤 행동, 그 행동에서 나타나는 결과만 보기 때문입니다. 과정과 동기가 중요한 것인데 과정과 동기는 빼버린 채 결과만 따지는 것입니다. 기도도 믿음을 가지려고 해야 하는데 자꾸 뭔가 이루기 위한 행동을 하면서 기도를 하다보니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세져야 합니다. 10일 금식으로 안 되고, 40일 금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40일 금식 할 수 있고 기도도 하고 다 하는 것이 맞는데 그 마음의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014.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