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절 2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고 하는 복음서는 신약의 역사서입니다.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같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라고 4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관복음과 4복음이 다른 이유는 공관복음은 역사성을 그대로 쫓아갔지만 요한복음은 조금 다르게 편집을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라는 사람이 쓴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공동체가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부터 28장까지 끌고 가고 있는 소위 마태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 가운데 오시는데 그 오시는 분이 왕, 메시야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던 하나님, 

구약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사람이 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도를 닦거나 해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 속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분이 메시야입니다. 불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의 궤도를 뛰어 넘은 초월자를 부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처가 다시 사람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미륵사상입니다. 

그런 것처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거룩하지 않은 것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얘기하고 성장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퇴보라고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앙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거룩한 존재가 거룩하지 않은 존재로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메시야 사상입니다. 구약의 핵심의 주제가 바로 그 메시야 대망사상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시키실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이해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야,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룩한 존재가 거룩하지 않은 존재로 오셔서 우리를 거룩한 것으로 끌고 가시겠다고 하는 그 믿음의 핵심이 메시야사상인데 그것이 마태복음의 주제입니다. 왜 하나님은 도대체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을까? 그것이 사실은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왕으로 오신 예수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왕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그 생명은 우리에게 증인의 삶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종교적인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관계를 통해서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그렇게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장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쓴 복음서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마가복음을 먼저 썼다고 얘기합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짧다는 것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고대문서를 연구할 때 사람들은 가장 짧은 것을 가장 먼저 썼다고 생각을 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가장 간결하고 가장 짧기 때문에 가장 먼저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마태복음을 먼저 썼을까? 초대교부들은 마태복음을 먼저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네 어휘를 가지고 6주 동안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만 받아들여도 구약성경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마태복음 1장 1절을 받아들이시면 신약성경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 +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이것이 완성입니다. 사실은 하나만 알면 됩니다. 왜 창세기 1장 1절과 마태복음 1장 1절이 그렇게 중요할까?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시간의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가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역사의 시작이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우리도 모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선언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가운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 들어오셔서 ‘창조’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 1절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년 120년 산다면 영원한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 전 그러니까 2틀 전에 계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120년 별로 안 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못 사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짓말 했다고 또 어떤 잘못을 했다고 천국갈 수 있을까?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라고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이 그 시간도 잠깐 생각하시면 잊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인데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잘 살아야 될 이유가 뭘까? 라고 하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세월호 관련 법회를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스님들은 세속을 떠나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의 인연도 끊고 다 끊으신 분들인데 아이들이 죽었다고 해서 우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득도하고 계셔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거꾸로 울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한테 미개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양 쪽 다 타락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생을 하나님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대우하시겠다는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구질구질한 삶이 하나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고고하게 하늘에 가만히 있으면서 우리가 살든 뭘 하던 뭐가 중요하느냐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데 하나님은 조울증 환자라고 했습니다. 모든지 초월하고 계시는 분, 다 알고 계시는 분이 그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시고 열받아하시고 사랑한다고 하시다가 갑자기 너 죽었어 라고 얘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고 하는 선언이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 족보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거룩한 ‘성’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육신하신 그 분이 언약이라고 하는, 약속이라고 하는, 계약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다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아브라함의 약속이 있는 것이고 다윗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브라함과 다윗, 두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은혜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고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이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이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냥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가장 큰 은혜가 ‘그냥’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제주도 수련회를 가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다 계산해 보니까 천만 원정도가 들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교인들이 다 빈민들입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이 고민하시다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저한테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좋아서 간다고 하면 그 ‘무엇’ 에 대해서 더 좋은 장소를 미리 다 생각해서 저한테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가는 거라고 했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왜 사랑하신 것이냐 하면 ‘그냥’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하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언약을 은혜, 공짜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편에서는 은혜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자기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공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편에서는 자기의 아들을 내어준 것입니다. 가장 값싼 은혜지만 가장 값비싼 은혜입니다. 수련회비용 천만 원은 제가 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가지불을 자기네들은 할 수 없다고 얘기했지만 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은 엄두고 못 내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믿음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구약, 신약, 약속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그 전에는 약속도 은근히 하셨는데 아브라함하고는 대놓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사인까지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읽어보면 하나님이 아주 주도면밀하게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는데 하나님조차도 아니라고 못하실 정도로 정확하게 사인을 주고받았습니다. 사인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이 지금도 끝까지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중요합니다. 

다윗에게도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7장 14절에 보면 다윗에게 주는 약속은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상급의 약속을 하십니다. 왕권에 대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별을 그립니다. 이 별이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여부스를 중심으로 하는 평지는 발로 물댄 동산이라고 하는 비옥한 땅이었고 예루살렘이 있는 산지는 지중해에서 오는 비구름을 통해서만 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하늘을 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사막 같이 보이고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비옥한 땅이 됩니다. 비가 오면 울창한 숲이 되는데 비가 안 오면 사막지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지는 청동기문화였고 평지는 철기문화였습니다. 평지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싸우는데 산지만 올라가면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성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문화로 표현하면 산신령입니다. 하나님은 산 위에만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평지를 정복했습니다. 산신령이었던 하나님이 이제는 평지의 하나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민족의 신이 열방의 신으로 바뀌는 과정이 역사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초, 늘 자신의 민족신이었고 늘 어떤 지역을 섬기는 신이라고 생각했던 개념을 깬 것이 다윗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다윗에게 열방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십니다. 그것이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라는 이 말은 아브라함은 ‘자녀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은혜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주신 권세는 또 다릅니다. 자녀로서 살아낼 수 있는 능력, 제사장 나라가 되는 능력을 주십니다. 아브라함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선민사상으로 갑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나는 예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에게 다윗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약속이 선민을 통해서 섬기는 나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 DNA가 하나님의 씨가 되었다면 이제는 생명을 낳는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완성이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족보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약속과 다윗의 약속을 합친 것입니다. 예수는 구원할 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예수의 사람은 생명을 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브라함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를 유대교라고 말합니다. 유대교인 중에 아브라함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구원할 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원할 자로 오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그 언약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주는 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자기가 생명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인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서 표현으로 하면 왜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선민사상만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팔래스틴 사람이라면 독립운동 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천 년 동안 살고 있던 집인데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집이라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CNN만 보지 말고 알자지라 방송도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한 쪽 입장만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우기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땅문서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하면 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을까? 함께 어우러져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누구를 배제하고 지우고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네들이 늘 강대국이 되어서 찍어 누르는 삶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약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두 가지의 언약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가지고 있는 삶으로 살아내야지만 예수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예수가 우리 가운데서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C. S루이스라고 하는 영국의 기독교학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사탄은 천사의 옷을 입고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예수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머리 풀고 피 흘리고 오는 귀신은 최하급입니다. 진짜 귀신은 천사처럼 옵니다.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black devil이 있고 white devil이 있는 것입니다. black devil은 불쌍히 여겨주면 됩니다. 진짜는 천사처럼 옵니다. 탈북자들이 하는 말이 중국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오면 도대체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중국에 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진짜 악은 너무나 달콤하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 예수가 내 몸에 왔다는 것은, 예수로 산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만 있으면 안 되고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오는 사탄을 구별하려면 첫 번째 사랑이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미움이 사랑의 반대가 아닙니다. 사랑 자체의 반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망입니다. 욕구와 욕망의 차이가 있습니다.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것인데 욕망은 나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욕구는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공주와 공주병의 차이는 공주는 다른 사람을 공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공주병은 다른 사람은 다 하인인 것입니다. 나만 있는 것이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철저하게 내어줌을 통해서 하나님이 생명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시는 것인데 욕망은 자기 것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함께 라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은 내가, 나만, 우리만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생명의 공동체가 있고 죽음의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마패를 보여주면 어사라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우리한테 물으시는 것이 딱 한 가지입니다. ‘너 나 사랑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하는데 정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비교하고 경쟁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봐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반대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꾀입니다. 귀신인지 아닌지 진짜 예수인지 가짜 예수인지는 말씀을 들이대면 알 수 있습니다. 뱀은 말씀을 교묘하게 바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는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꾀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말씀을 먹이고 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자꾸 힘들어지는 이유는 자꾸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철저한 이타주의, 내어주는 것입니다. 반대는 이기주의, 빼앗는 것입니다. 

2014. 6. 27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