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1

마태복음 18장은 용서장이었는데 19장은 하나님 나라의 십자가의 상급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장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원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복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셔서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DNA로 인해서 우리가 우리의 기질대로 살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데 그 DNA가 숨겨져서 원죄에 잡혀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소위 사망의 법으로 들어가니까 그 사망의 법으로 살면서 늘 죄에 대한 것을 묵상하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습관적인 죄입니다. 원래의 체질은 DNA,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체질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마음은, 체질은 하나님의 사람인데 몸의 습관이 안 되어서 죄의 속성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체질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 체질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질대로 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몸이 땅과 나눠져서 둘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토’가 하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은 하늘의 땅입니다. 그리고 내 몸은 당연히 하늘의 땅의 체질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신토불이는 내 몸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지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에 가서 살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3년 정도 됐을 때 그 쪽 체질로 바뀌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은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입니다. 그런 체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2세나 3세들이 영어를 해도 한국식 발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어만 쓰는 사람이 순수 미국인입니다. 우리는 서너 개의 언어를 하면 대단하다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영국 쪽으로 더 가면 갈수록 영어만 하는 사람을 더 순수계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몸의 체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토불이입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힘이 나고 영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나느냐 하면 우리의 몸의 원래 체질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학교 기숙사 음식을 처음 먹어보니까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3일 정도 먹고 나니까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식당에 들어가기만 해도 냄새가 나서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김치가 고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체질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지만 힘이 나는 이유가 내 체질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땅의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땅으로 꺼지려고 합니다. 

원죄가 계속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하나님의 체질로 회복되었다고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형상이 사망의 법에 갇혀버리니까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은 말 그대로 복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원죄와 보혈의 능력을 거친 회복은 원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만만한 곳이구나.’ 했다가 ‘세상이 만만치 않구나.’ 했다가 ‘만만치 않지만 괜찮아.’ 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회복은 똑같이 원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엄청난 또 다른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더 창대케 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하리라는 말이 사실은 더 들어가면 하나님의 원리는 시작부터 복이고 그 복을 통해서 더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회복은 원복을 뛰어넘는 복인데 하나님과 온전한 단일을 이루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또 다른 신비, 기적이고 또 다른 복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이 과정을 기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반드시 보혈이라고 하는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단일을 이루는 축복을 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보혈과 축복의 상관속에서 보혈로 내가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과 이제는 회복된 삶으로 살아내는 축복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19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에 이르니(1절)’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가 갈릴리였습니다. 이 사역지는 사망의 땅입니다. 그 사망의 땅에서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셨는데 갈릴리는 못 살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유대 땅은 지도자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고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땅으로 들어가시는데 주님은 이 땅 속에서 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망의 땅에 살고 있는 암하렛츠라고 하는 땅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의에 주 

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사람, 그들이 갈릴리 땅에서 너희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들을 향해서 은혜의 말씀, 복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팔복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영광과 임재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은 십자가의 말씀, 죽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오히려 영광과 임재 속에 들어가서 주님은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시고 죽어야 된다고 얘기하시는데 그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가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오늘 19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어주는 삶으로 살아가는 삶이 십자가의 죽음의 말씀이고 이것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영광과 임재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면 상도동에서는 은혜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고 압구정동에 가서는 ‘회개하라 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세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보통 상도동은 게으르고 미개해서 못 사는 것이라고 그래서 고난을 주신 것이고 이 고난 가운데서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압구정동 부자들한테는 너희들이 축복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꾸로 얘기하셨습니다. 상도동에 있는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복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하시고 압구정동에 가서 ‘패역한 자들아.’ 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19장 말씀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말씀을 어떻게 하실 것이냐 라고 하는 것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고 있어야 되는데 내가 은혜의 말씀을 전할 것인지 십자가의 말씀을 할 것인지 또는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말씀을 받아야 되는 것인지 십자가의 말씀을 받아야 되는 것인지 맨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은 은혜의 말씀만 받으려고 하고 죽으면 안 되는데 십자가만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봐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은 소고기라면 십자가의 말씀은 건강에 좋지만 맛은 별로 없는 보리밥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두 파가 있었습니다. 이혼해도 괜찮다고 하는 파하고 절대로 이혼하면 안 된다고 하는 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도대체 무슨 파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4-6절)’ 

유럽에는 이혼예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나눠야 된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율법과 은혜가 있는데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하고는 싸우셨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통해서 주시는 사랑의 정신이 있는 것인데 율법주의는 그것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라고 하는 옳고 그름의 정죄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오른 쪽 뺨을 맞거든 왼쪽 뺨을 대라고 하는 것을 율법주의로 들으면 오른쪽 뺨을 맞았으면 빨리 대야지 안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대면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정신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내어주는 삶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율법을 말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안 그러면 또 다시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왼손잡이가 때렸다는 것이 모욕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모욕과 수치도 당하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사람은 오른쪽 뺨을 맞아야 왼쪽 뺨을 대는 것인데 왼쪽 뺨을 맞았다면 잘 못 맞은 것이라고 다시 때려달라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안 맞아도 되는 것입니다. 굳이 맞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첫 번째는 ‘사람이 나누지 못해, 안 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혼은 무조건 안 된다고 율법주의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이혼에 대해서 절대로 인정을 안 합니다. 그리고 이혼한 사람이 다시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례를 안 섭니다. 이것이 또 다른 율법주의입니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신명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면 정확하게 이혼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 

마음의 완악함이 고집입니다. 고집이 세서 반드시 원하는 것을 할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라도 아예 법적으로 그것을 인정해 주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데 고집하니까 할 수 없이 해줬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들을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 

주님은 이것을 간음의 문제로 또 다르게 해석을 하십니다. 원어로 들어가면 ‘아내들을’ 이라고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원래 부부는 1:1의 관계인데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사회에는 여자가 많았습니다. 법적으로 세 명까지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재산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경제력이 없었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그 당시에 힘들었던 것이 경제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과부도 돈 많은 과부 많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과부는 일을 못 하고 능력이 없어서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살았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거나 일부러 떨어뜨린 것을 주워서 먹었습니다. 지금은 복지를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같은 공동체 안에서 아예 먹을 것을 남겨줘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것도 최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일할 수 있는 남자 하나에 일할 수 없는 여자들이 붙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느냐 하면 생활을 책임져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없는 남자가 첫 번째 아내 말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 경우에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는 것입니다. 남자 놈들이 그렇게 머리를 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혼할 만한 핑계거리를 찾아서 여자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증서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이유로 공동체 안에서 확인을 받으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증서입니다. 이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 싸인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뇌물을 먹이면 다 통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서 이 안에서 생명이 나와야 되는 것인데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다 깨도 안 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불륜인지 사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이를 낳았느냐 낳지 않았느냐 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진짜입니다. 생명을 낳지 않는 관계는 쾌락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아가서에 있는 말씀인데 아가서가 처음에는 너무나 야한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에 넣을까 말까를 고민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남자와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의 말씀입니다. 

201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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