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2

예수님이 머리 휘날리면서 백마 타고 6천 명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오셨으니까 유대인들은 베들레헴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에 하나님은 힘을 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리실 때 힘을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 있는 하나님, 능력 있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내가 쫓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어주심의 힘의 부재를 경험해야지 자원함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의 관계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정말로 너무 멋있고 너무 능력 있고 너무 괜찮은 분으로 오셨다면 다 믿었을 텐데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갔습니다. 그들은 그런 주님이 아니라 모양은 대단하지 않지만 그 분에게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간 것입니다. 

자원함이라는 것은 즉시, 온전히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의 관계를 하기를 원하시는데 인격의 관계가 즉시, 온전히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산이 들어가는 순간에 즉시, 온전히, 기쁘게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새벽예배 큐티 말씀이 욥기인데 하나님이 욥을 자랑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와서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겠냐고 말합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냐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이유에 해당되는 것을 다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쫓아가는데 있어서 사단이 생각하는 이유를 다 가져가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다 가져갑니다. 욥이 가지고 있던 물질, 자녀, 명예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가십니다. 그렇게 가지고 가니까 다 잃고 나서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는 빈손으로 왔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 다 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사랑해요.’ ‘왜?’ ‘그냥’ 이라는 말입니다. 더 나가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지 않는 한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 사람이 절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는 자원함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가면 희생부터 가르칩니다. 손해 보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런,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자원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역리입니다. 순리는 자원함, 책임, 희생입니다. 저는 교회 오면 어떤 사람이든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헌금도 하지 말라고 하고 봉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에 밴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죽을 맛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원함이 살지 않은 모든 종교적 행위는 다 가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생을 가르쳐 주고 책임을 가르쳐 주면 나중에 자원함이 살아난다고 얘기합니다. 희생과 책임으로만 시작하게 되면 자원함이 아닙니다. 다 눈치고 사람의 자랑이고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수입전체금액에 대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순수익에 대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또 부인이 번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하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목회를 오래 하다보니까 알아서 하라고 얘기합니다. 자원함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원함이 살지 않은 모든 희생과 책임은 또 다른 권력이 되고 권위주의가 됩니다. 

하나님은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보기위해 힘을 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힘을 빼십니다. 진짜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더 멋있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나를 선택하면 진짜이고 선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기준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얼굴 예쁘다고 나를 선택했다면 언젠가는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라고 하실 때 ‘이거 하면 살고 이거 하면 죽어.’ 가 아니고 ‘이거 해도 되고 이거 해도 되는데 나는 이거 했으면 더 좋겠어.’ 이것이 진짜입니다. 

영국에서 어떤 사람이 논문을 쓰는데 교수님이 ‘이렇게 쓰는 게 별로인 것 같은데 이렇게 쓰면 어떨까?’ 라고 얘기를 하셨는데 그 학생이 별로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자기 마음대로 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 학생하고 논문을 계속 쓸 수 없다고 했답니다. 자신이 제시한 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국학생이 더 강하게 말하시지 그랬느냐고 했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논문을 쓸 때는 남북에 통일된 민족교회를 세워야 된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은 민족이라는 말이 나치하고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다고 그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하고 평화교회로 바로 바꿨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강하게 얘기하는데 영국교수들은 너무 젠틀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이거하면 죽고, 이거 하면 살아.’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이걸 할 수도 있고 이걸 할 수도 있는데 이걸 하면 더 좋겠어.’라고 하실 때가 진짜입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선택권을 주는 것입니다. 더 높은 차원을 선택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원함이 살면 하나님과 내가 연합이 될 수 있습니다. 언약공동체 안에서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신부인 나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이 됩니다.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신부인 나, 서로 1대1의 관계 속에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서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고 모든 것을 하시는 창조주이신데 내가 하나님과 합쳐지면 내가 있을까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 되는 그 과정이 신랑한테 내가 완벽하게 다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1대1의 관계가 되는 것인데 그 1대1의 관계가 하나님과 내가 똑같은 존재로 대우해야지만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흡수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단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원하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한테 능력을 보여 주시려고 만 한다면 우리는 흡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의 관계입니다. 인격은 즉시, 온전히, 기쁘게라고 하는 이 마음이 살아나야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한테 주님이 ‘너 나 사랑해?’ ‘너 나 사랑해?’ ‘너 나 사랑해?’ 물으십니다. 그 질문이 자원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할지라도 나는 그 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 스스로 힘을 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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