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1014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공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간의 개념이 아주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막이라는 것으로 나타났고 성막 가운데 법궤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막과 법궤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서부터 경험되었습니다.
거룩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거룩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신약으로 오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개념에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성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시청각 자료들은 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마음의 통치로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법궤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것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고 미국식으로 얘기하면 성전, 센추어리(구별되어 있다, 거룩하다.)라고 하는 것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상을 아이콘이라고 얘기하는데 상징과 우상은 한끝차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는 상징인데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우리가 우상으로 읽으면 여호와증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처럼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지고 구약을 읽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시고 성전에 가시고 똑같이 회당에 가셨지만 그 자체가 사실은 공간을 떠나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주님 안에서 또 다시 해석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죽었다 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어떻게 부정한 것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고 또는 하나님이 부재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시고 영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임마누엘신앙입니다. 그리고 부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관점입니다. 빛과 어둠의 싸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부재가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영광의 신학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과 부재라고 하는 고난의 신앙, 이 고난의 신학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생명은 생명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내가 갖는 것, 소유, 내 능력, 또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부재 가운데 있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생명을 꿈꾸고 있는데 사실은 그 생명은 철저하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받은 원복이 있고 그러다가 원죄 가운데 빠집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됩니다. 그런데 회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원죄를 깨달아야하고 그래야 다시 원복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원복을 통해서 진정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원죄를 깨닫지 않은 것,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다 가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광의 메시야로 기다렸습니다. 소위 말하는 영광의 신학, 성공신학입니다. 성공해야 되고 부자가 되어야 하고 내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대적 메시야이즘입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구약에는 영광의 메시야와 고난의 메시야가 똑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광의 메시야와 고난의 메시야를 동시에 보고 있으면서도 역사적으로는 멀리서 보니까 도 가지가 같이 있거나 아니면 영광의 메시야가 먼저인 것처럼 본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면 산과 산 사이가 엄청나게 먼 것처럼 사실은 고난의 메시야가 먼저오고 영광의 메시야가 나중에 온다는 것을 또 둘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생명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는 철저하게 고난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카돌릭의 중세신학자들 중에 십자가성요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십자가 성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영성이 아주 철저한 어둠, 온전한 자기의 부재 가운데 있어야지만 진정한 빛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늘 십자가를, 죽음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둠이고 하나님의 부재이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1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시는데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부재 가운데 임재, 없음과 있음의 첫 번째 상징이 어린 나귀입니다.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5잘)’
나귀 자체도 볼품이 없는데 게다가 어른이 새끼를 탔습니다. 그 나귀 새끼는 정말로 얼마나 힘들까? 정말 폼이 안 나는 것입니다. 없어도 정말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도 힘드시고 나귀도 힘들고 서로가 힘들고 보는 사람도 힘든 상황입니다. 머리 휘날리고 백마 타고 뒤에 몇 만 명의 데리고 입성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메시야인줄 알고 찬양하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은 죽음의 자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는 겸손의 자리이고 그것이 멍에를 메는 것인데 멍에라는 것이 죄의 멍에 죽음의 멍에입니다. 죽음의 멍에를 자원함으로 지러 가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3절)’
하나님의 사용하심은 똑같이 주님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아니었다는 얘기인가? 라고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데 이단 중에 원래 예수님도 사람인데 하나님이 쓰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도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로 예수님을 사용하셨다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표현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의 관계성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맞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복종과 순종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버지가 주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일, 그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사람과 일과 말씀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주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증인들은 그 개념 때문에 여호와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여호와가 만든 신 중에 하나가 예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논리적으로 아버지 보다 못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말씀 가운데 자원함을 통해서 복종하고 순종했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는 예수님이 타셨던 겸손의 의미이지만 동시에 어린 나귀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어린 나귀가 아니라 굉장히 도도한 백마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도한 백마의 삶이 아니라 어린 나귀와 같이 그냥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순종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인데 어린 나귀가 정말 나귀의 모습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법궤로 얘기하면 법궤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법궤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신성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막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냥 천 조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안에 실제로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실제로 경험한 사람과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정말로 다른 것입니다. 나귀 입장에서 볼 때는 똑같은 나귀인데 나귀 새끼가 너무나 보잘것없고 너무나 어린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이 그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사건 속에 주인공과 함께 더불어 들어가는 어린 나귀입니다. 그냥 나귀이지만 동물이지만 하나님 앞에 성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나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해이고 어린 나귀는 보는 사람들에게는 ‘없음’입니다. ‘보잘 것 없음’, ‘의미 없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 앞에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성물이 된 것이고 가장 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내가 간구합니다, 내가 호소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히브리어와 아랍어의 방언 같은 느낌의 언어입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8절)’
왕이 왔을 때 왕 앞에 레드카펫을 쫙 깔아주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모습인데 사실은 거지들입니다. 레드카펫을 깔아야 되는데 옷을 깔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들 장난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거지들이 거지왕초한테 보여주는 행태이고 호산나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들이 뱉어서 말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하는 그 외침이 사실은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비웃음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소서라고 하는 간절한 바람이 아니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없음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있음으로 쓰는 것이고 호산나라고 하는 있음을 사람들이 없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한 영이 오면 거룩함은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어둠, 부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다 잘 살아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신데 그리고 내가 주인의 아들인데 우리 아버지가 한국은행 화폐 발행하는 분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인데 내가 잘 살아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또 영원히 살 사람들인데 왜 골골거리고 살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있음이 있음이 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곡이 되어버렸습니다. 순리가 역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거룩한 것이 거룩해져야 되는 것이고 있음이 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없음은 없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주님은 구름 타고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없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인데 없는 것 속에서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고 있어야 되는데, 말로는 호산나라고 얘기하는데 그들은 비웃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죽이라,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진정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이유가 말로는 호산나라고 ‘나 좀 구원해 주세요,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는데 구원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쟤도 없고 나도 없는데 쟤가 날 구원하겠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10절)’
결국에는 ‘누구냐’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11절)’
갈릴리 나사렛은 못 사는 동네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선지자, 조금 나은 사람이 났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야, 불쌍한 사람인데 조금 나아.’라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선지자, 없는 선지자, 그런 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말이 호산나의 답입니다.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뜻입니다. 호산나의 답이 이미 예수 안에 있는 것인데 그들은 그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 선지자, ‘없는데 조금 있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을 보고 있는 그들의 관점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시는데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십니다. 원래는 기도하는 집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기도는 관계하는 공간, 하나님과 내가 친밀해지는 공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런 공간인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강도는 빼앗는 자입니다. 도둑과 강도는 다릅니다. 도둑은 몰래 훔쳐가는 사람이고 강도는 정확하게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위협하고 빼앗아가는 사람입니다. 관계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있음이고 강도의 소굴은 정말 없는 것입니다. 성전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거룩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있는데 없는 사람입니다. 없으면 없는 것으로 사는 게 정직한 것이고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있는데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서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는 것인데 그 거룩함이 없고 오히려 그 거룩을 통해서 빼앗고 뺏기는 것입니다.
빼앗는 사람은 좋을 수 있는데 뺏기는 사람은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또 빼앗은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남의 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귀한 것을 모릅니다. 강도짓 해서 재벌 됐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가장 잘 훔쳤던 또 조세형 같은 사람들을 보면 말년에 다리 뻗고 산 사람 없습니다. 자기 돈이 아니기 때문에 펑펑 쓰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내가 더 친밀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의 욕망으로 빼앗고 뺏기는 모습만 있는 것입니다. 돈을 바꾸는 이유가 성전세를 내려고 바꾸는 것인데 바꿔주면서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나 양이 흠이 없어야 하는데 흠이 있는 동물은 다시 집에 가서 바꿔올 수 없으니까 즉석에서 제사장이 인준한 양과 비둘기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기만 하면 바로 통과입니다. 두 배의 값을 주고 사고파는 사람은 제사장과 이익을 나눕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제사가 경건성은 하나도 없고 다 돈 놓고 돈 먹기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1인당 100만 원씩 받고서 교회를 파는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퇴직금을 얼마를 줘야지만 은퇴를 하는 세상입니다. 돈을 내고 기도를 받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통해서 서로 기도하고 기도 받는 지체의 개념이 없고 다 돈 받고 돈 주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악한 것은 거룩한 곳에 거룩하지 않은 것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가장 거룩한 영역인데 가장 거룩한 영역에 가장 타락한 사람들이 서 있으면 냄새가 제일 많이 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나무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되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있음에서 있음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화과나무에서 가르치고 있는 핵심입니다. 믿음을 통해서만이 있음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23절에서는 권위를 얘기하십니다. 권위가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 라고 했을 때 세례요한의 권위를 얘기하십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28-30절)’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예’ 했고 둘째 아들은 ‘아니오.’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간 아들은 둘째아들이 갔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
첫째 아들이 바로 너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23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은 둘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예’하면 가야 되는데 안 갔습니다. 있는데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오.’ 라고 했는데 갔습니다. 없는데 있습니다. 둘 다 문제입니다. 다 일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낫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답이라도 ‘네’하면 마음은 편한 것입니다. 제일 좋은 아버지의 아들, 정직한 아들은 ‘예,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그나마 나은 놈이 그래도 간 둘째입니다.
‘먼저(31절)’
둘째가 조금 낫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
믿음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메시야를 믿음으로 보지 않으면 영광의 메시야에게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정말 세상의 고난으로만 보이기 시작하면 죽었다 깨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메조키즘에 빠져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건강해야 되고 원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 또 우리가 부유하고 풍성하게 살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영광의 길로 들어가는 길이 고난의 길 밖에 없다면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광을 보고 있어야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비유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있고 농부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습니다. 농부는 수확한 열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보내서 수확물을 달라고 하니까 종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인이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은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도 죽였습니다. 원래 주인에 대한 농부의 마음은 감사함이어야합니다.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38절)’
그런데 적반하장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0-41절)’
농부들은 죽이고 다른 농부들한테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절)’
원래 농부의 본분은 열매를 맺어서 수확물을 주인에게 드리는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빼앗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열매를 맺고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드리는 것입니다. 농부의 본분은 주인에게 다시 열매를 드리는 것인데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존재성을 잊어버리니까 오히려 빼앗기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42절)’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버린 돌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44절)’
구약으로 얘기하면 뜨인 돌입니다.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했던 돌이 가장 중요한 돌, 근본적인 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버린 자가 깨지고 부서지고 파괴되고 파멸되는 것입니다. 뜨인 돌이 구약의 개념인데 성전의 돌입니다. 성전의 돌은 정을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찍어 나온 돌도 아닙니다. 채석장에 있던 그 돌 모양 그대로를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보기에 쓸모없을 것 같아서 버렸는데 가장 단단하고 가장 견고한 짱돌입니다. 그래서 이 돌이 머릿돌이 되어서 기둥을 세우는 주춧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고 나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6절)’
자기들을 욕했으니까 회개해야 되는데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강팍합니다. 들었는데 고집, 편견,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것,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가치관, 편견과 선입견을 통해서 만들어진 고집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고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 강팍함을 통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든 자신을 죽이든 살인을 합니다. 사망의 권세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강팍함과 살인에서 벗어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의 답이 호산나입니다. ‘내가 간구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들은 구원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45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호산나가 예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산나’라고 외쳐야 되는 것이라는 것까지는 아는데 호산나를 외치지 못하고 예수라고 외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는 거룩함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거룩함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농부로 얘기하면 엄밀히 따지면 감사해야 되는데 농부의 입장에서 다 갖고 싶은 것입니다. 손해 보기 싫어서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강팍함이나 내가 남을 죽이든 나를 죽이든 누군가를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여전히 자기는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영광에서 영광으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영광의 자리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자리에 가기 위해 손해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심판, 죄, 회개, 이런 것은 싫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니까 기도해야지 하면서 실제로는 안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니까 다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남을 사랑해야 되는 것을 아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손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못하겠습니다. 나도 힘든데 어떻게 남을 사랑하느냐고 합니다. 억울함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죄성 중에 하나가 무리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가치관이나 이런 것들을 무서워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무서워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안 무서워할 것을 무서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