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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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신앙이 있고 종말론적 신앙이 있습니다. last day,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가지고 끝이라고 하는 종말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말세랑 종말이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뉘앙스는 다릅니다. 말세는 세상이 끝났다는 것이고 종말은 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끝났다고 하는 이 생각이 세상에 포인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세기가 끝날 때 마다 항상 말세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도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초대교회에서도 한 세대가 보통 30년인데 예수님이 33세에 돌아가셨으니까 한 60년 정도 또는 70년 정도 될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사도행전 말씀처럼 모든 재산을 다 팔고 교회공동체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90년 정도에 쓴 책인데 안 오시니까 ‘도대체 뭐지?’ 라고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교회 안에 일은 안 하고 맨날 그 안에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할 정도로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92년 다미선교회사건, 가장 가까운 때가 2012년에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세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이 끝났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은 우리한테 말씀하시는 것은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끝이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관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의 관점에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승리할 것이라고 하고 왜 심판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실까? 이 안에는 분명하게 죄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도 없고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심판 가운데 여전히 승리 가운데 있어야 되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끝났다고 하는 말세신앙으로 가면 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남은 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니까 그 관점으로 어떻게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에 모여서 우리끼리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것이고 어떤 비밀을 알아야지만 내가 세상의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자기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남은 자이고 자기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소위 말세신앙인 것입니다. 말세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는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오셔서 너희가 승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승리의 관점에서 지금 견디고 이기는 자의 삶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이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고 보좌 주변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 천사들 중에 하나가 세상을 어둠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거역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다 어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어둠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순간에 주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둠에 있기 때문에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빛으로 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빛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이라고 하는 두 관점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선신과 악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은 보좌에 계십니다. 빛과 어둠을 다 포함하고,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에 공허와 흑암과 혼돈이라고 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운행이라는 것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조차도 품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세속의 정신 가운데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거역입니다. 세속의 정신을 욕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정과 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정은 죄책감을 갖는 것이고 욕은 거역으로 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정욕의 결과가 거역,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품고 빛으로 오셔서 빛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얘기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이미 빛 가운데 있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속의 정신이 있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 본질은, 내 신분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내가 빛을 경험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으로 나를 인정하시고 그렇게 부르셨는데 여전히 땅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어둠 안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계속 완전하고 온전하게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입니다. 안 믿은 사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 보면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는 모르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왜 부를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어둠 속에서 반드시 어둠의 끝을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빛은 빛으로 따로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이 있는 곳은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왜 하셨을까? 그것은 거역한 천사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려고 했는데 하나님 말 안 들었다고 무조건 심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2~3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런 증인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대뽀로 공의로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것이 정당하다, 이것이 맞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확증을 하고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주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증인 프로그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빛의 DNA를 가진 사람들이 맨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그 마음은 세속의 정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짜입니다. 그림자입니다. 이것이 다 어둠에서 온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나는 용서와 사랑과 겸손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계속 속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있는 내가 ‘척’ 하고 있는 것이고 맨날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안 되는데 척하는 것입니다. 안 되니까 계속 남을 탓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인데 상대가 계속 건드렸으니까 상대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어둠의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미움에 익숙해지고 늘 살아가는 것이 미움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척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빛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내지 못하면 주님 앞에 가서 어떻게 빛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하늘이 있다면 빛이 점점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주님의 영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본질로 가야 되는 것인데 본질의 삶으로 여기서 살아내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살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둠과 싸우면서 견디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미움의 세계 속에서 죄 가운데 있는 삶 속에서 견디고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묵상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죄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막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샌들을 신는데 식사를 하려면 손을 씻고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발을 어제 씻었기 때문에 오늘 안 씻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막의 모래먼지 속에서 살기 때문에 늘 먼지가 발에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죄가 묻어있는 삶이 있습니다. 죄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미 끝났습니다. 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내려면 내가 미워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내가 내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미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미움을 없애려고 자꾸 미움이 없는 세상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이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내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수도사가 기도하는데 늘 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됐습니다. 그래도 그냥 파리가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파리를 잡느라고 기도를 못하게 됩니다. 공부하려고 하는데 책상이 지저분해서 책상 깨끗이 정리하다보면 피곤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가 공부하려고 하면 영화가 보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파리가 오면 파리 잡으려고 하고 모기가 오면 모기를 잡으려고 하고 매날 쫓아다닙니다.
‘나는 왜 이렇게 저 사람을 미워할까? 이건 다 쟤 탓이야. 쟤는 이것이 문제고, 나는 왜 이러지? 하나님 제가 또 죄를 짓고 있네요.’ 하면서 맨날 척하거나 탓하면서 삽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도 하나님의 것이고 첫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첫 번째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현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신앙은 계속 현재를 살지 못하고 현재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미선교회에 들어가야 되고 신천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종말론적 신앙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그렇게 이겨냈다고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못삽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로부터 완전히 파괴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종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종말이 아니었습니다. 때가 되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일어나긴 했는데 주님한테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실 때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이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라는 빛의 세상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더럽고 추한 이 세상에서 빨리 나가야지.’ 라고 생각하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너는 달라.’ 라고 이분법적으로 말씀하면서도 ‘너도 여기서 살아야 돼. 그것이 다 네 것이야. 하나님의 것이야.’ 라고 통합적으로 얘기합니다. 이 딜레마가 계속 있기 때문에 맨날 여기서 엉거주춤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