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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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은 종말론적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영원한 시간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이 역사 속에서, 이 육신의 시간을 영의 시간으로 쓰시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관입니다.

영의 시간, 영원한 시간 속에서 육의 시간을 비교해 보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소위 짜투리 시간이라고 얘기하는데 미국에서는 하루에 한 건만 하면 정말 일을 다 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한 건만 하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24시간 중에 짜투리 시간 5분이나 10분 또 잠깐 쉬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우리가 쓸모없는 시간으로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의 시간을 120년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또는 사람의 연수가 70이고 강건하면 80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B.C 2500년 전에 사람이고 지금이 2014년이니까 4500년 정도 되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는데 아무리 긴 육의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영의 시간에서 보면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시간 속에서 보면 먼지만도 못한 시간 속에서 뭘 하겠나 하고 하겠지만 주님이 33년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6시간을 계셨던 이 시간 속에서 주님은 영원한 시간을 사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에서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이 개념을 우리가 다시 이해하지 않으면 종말론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맨날 끝을 보고 있는 신앙으로 이해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한 세대, 30년이 지나가기 전에 오신다고 이야기했던 부분들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 논 팔고 다 팔아서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역사들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맨날 일은 안 하고 먹기만 하니까 ‘일 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때 논 팔고 다 팔아서 공동체생활을 했는데 공동체 생활을 한 이유가 주님이 곧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지금 종교학자들 중에는 최고의 사기가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할 때에 가깝다는 것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라는 의미인데 그 정도로 가까이 계시다고 얘기해놓고 아직도 안 오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 마가, 누가하고 조금 다른 복음서가 요한복음인데 요한복음은 그것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을 합니다. 종말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 것으로,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는 개념,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거의 90년에서 100년 정도에 썼던 성경인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30년이 지나도 안 오시니까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려고 하는 측면이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세기가 끝날 때 마다 주님이 오신다고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1992년 10월에도 주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안 오셨습니다. 2천 년에도 2012년에도 오신다고 했는데 안 오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또 오신다는 때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천년에도 아마 그 이야기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5분 남았다고 곧 오실 것이라고 실제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니까 시간의 개념이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조차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EC가 연합이 되어서 10개 국가가 되면 지구가 멸망시기라고 하거나 1948년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나서부터 60년이 되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얘기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6-27절)’

그리고 24장을 잘 읽어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42-43절)’

그런데 또 42절에 보니까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때는 알게 오신다고 하고 어떤 때는 또 모르게 오신다고 말하고, 혼재되어 있습니다. 다미선교회에서 10년을 계셨던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 말씀을 쭉 들어보면 1992년 10월 몇일에 주님이 오셔야 될 것 같았습니다. 숫자를 다 계산해 보니까 딱 그날 오셔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한테는 도적같이 오는데 사실은 안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알 것이다, 분명하게 모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모르지? 나는 알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미선교회나 신천지에 가야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입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모르고 있는데 나는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고 끝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인 것입니다. 신천지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 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와 종말론은 사실 다릅니다. 말세는 사람들을 호도시키는 경향이 있고 종말론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로 이해하지 말고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도 말세가 아니고 철저하게 그 당시의 교회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성으로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사람들은 자꾸 말세라고 하는 미래의 사건에 사로잡혀서 현재를 포기하고 삽니다. 그래서 집 팔고, 다 팔아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이것이 말세신앙입니다. 현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미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한테 현재를 가장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그것이 전도서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다,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전도서가 얘기하는 핵심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신앙입니다. I am who I am. 하나님은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앙은 현재의 신앙인데 요한계시록은 지금 현재의 교회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견디고 이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현재 속에서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절)’

현재의 신앙 안에 두 가지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견디는 것, 준비하는 것,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견디는 것이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지막 심판이라고 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진리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견디고 준비할 수 없습니다. 견디고 준비할 수 있는 믿음의 내용은 시작은 하나님이 하셨고 그래서 모든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인데 현재 속에 있는 우리의 모든 모습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러내고 살았는지, 빛과 소금으로 살았는지 끝에는 하나님이 계산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빛은 드러내려면 등경 위에 둡니다. 위에 있다는 뜻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빛이 어둠을 드러내는데 빛인 내가 어둠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늘 사람들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얼마만큼 드러냈는지 얼마만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로마에서 나오는 베드로 앞에서 주님은 로마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로 간다고 대답하십니다. 로마는 휘황찬란한 도시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로마의 권력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시는 것입니다.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 것으로 압니다.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지 않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벼랑 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도피성을 찾아가는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죄를 지은 사람이 피해있을 수 있는 곳인데 그곳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피성에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이제는 도피성을 만드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있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도망자의 삶이 아니라 도피성을 만들어 주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신천지 가야지 구원받고, 어디를 가야지만, 무엇을 배워야지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주님 안에서 견디고 준비하는 삶을 살고 견디고 준비하는 자들을 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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