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95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연장선에 있는 말씀입니다. 1절 ‘그 때에’ 라고 할 때의 그 때는 종말론적 시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인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간이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간이 축복의 시간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멸망의 시간, 심판의 시간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24장에서 말했듯이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신앙이 종말론적 신앙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세상을 회피하고 세상에서 도망치면서 살아가는 말세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을 살아내는 것, 믿음은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지 오늘을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세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이 다른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 25장 말씀에서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 종말론적 신앙,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무엇인지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비유는 열 처녀 비유인데 이 말씀이 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13절에 보면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습니다.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고 신부를 도와주는 들러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결혼식을 제대로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우미들입니다. 그런데 도우미들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밤늦게 올 것을 생각하고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빨리 올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절)’

그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늘 준비하고 있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 날과 그 때라고 하는 시간에 관련된 말인데 시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시간이 첫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 알파와 오메가의 시간입니다. 알파는 첫 번째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첫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고 오메가는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마지막 시간을 두시고 그 시간에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고 믿는 자들에게 축복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가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믿는 자들은 늘 내가 어느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시간에 대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라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을 합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습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야 되는 시간들이 있는 것인데 늘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에 잡혀있든 미래의 시간에 잡혀있든 과거의 시간 속에 사로잡혀서 아파하고 슬퍼하고 또 미래의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4장 표현으로 얘기하면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7-18절)’ 내려가지 말고 돌이키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거나 또 어떤 것에 마음을 쓰는 것 때문에 내려가려고 하고 또 돌이키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지 과거의 어떤 것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의미를 무시한 역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거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과거는 내가 살았던 현재니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을 잘 살기 위한 방편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있을 때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운데 현재성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잘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절)’

경제법칙 중에 마태복음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는 있는 자는 나눠주고 없는 자는 받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효과는 있는 자는 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마지막이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중간, 평등이 없는 것입니다. 더 갖든지 아예 빼앗기든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믿음은 토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삶은 열정의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열정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열정이 너무 지나치면 광신도가 되기는 하지만 그 열정이라는 것 자체는 밥을 먹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맛있게 즐겁게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먹는 것인지 안 먹는 것인지 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시체가 돌아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질 것이고 없는 사람은 더 빼앗길 것이라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가지고 있는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달란트가 굉장히 큰 돈입니다. 한 달란트가 600억 정도 되는 돈이라고 합니다. 그 돈을 종 셋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왜 어떤 사람은 남기고 어떤 사람은 더 빼앗겼을까요?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26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두 배로 남겼습니다. 15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 재능대로 준 것입니다. 탈랜트라는 말이 달란트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인이 종을 알기 때문에 종의 재능을 보고 그 종이 할 수 있는 만큼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땅에 묻어두었다는 것은 재능을 숨긴 것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19절)’

결산이 종말론적 개념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반드시 결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 선물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4절)’ 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치밀하고 정확하고 분명한 사람이라 심지도 않았는데 거두고 경작을 하지 않았는데도 모으는 능력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굳이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종은 주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주인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악하다고 하는 이유는 주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착각이었습니다. ‘우리 주인은 이런 분이야.’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 주인이 왔을 때 그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27절)’

이자놀이라도 하지 그랬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안 하고 다 하나님 앞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이 뭐든지 다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능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다른 나라에 가면서 돈을 준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가지고 장사해서 두 배로 남긴 종들은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자놀이라도 해서 먹고 살기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이미 빼앗기고 이미 없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600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지입니다.

원래 종은 주인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데 이 종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나머지 두 종처럼 주인에게 ‘보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대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세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만 보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내가 아버지를 알고 내게 주신 재능, 능력이 있어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는 것입니다. 오늘 가도 떳떳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그래서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빼앗기는 삶을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잘 살면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선물을 땅에 묻고서 자신은 왜 먹을 것이 없느냐고 하면서 삽니다. 재능을 숨기지 말고 쓰라는 것입니다. 재능을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종말, 끝이라고 하는 의미가 단순하게 끝이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있는 자는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긴다는 말이 끝이 아니라 끝에서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풍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풍성합니다.

제가 예전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을 읽으면서 우리는 심판 받고 죽는 구나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안 받는다고 했는데 왜 내가 심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심판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나에게 주신 부르심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르시면 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풍성하게 풍족하게 대우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은 빼앗기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쓰라는 것이고 그 다음 두 번째 비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더 풍족하게 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쓸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시간을 아껴서 쓰라고 하시고 또 달란트를 주시면서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달란트를 지극히 작은 자들을 향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핵심입니다.

32절 말씀을 보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절)’

‘내가’ 는 임금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임금께 그렇게 했느냐고 37절에 말합니다. 그랬더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임금께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임금입니다. 임금이 예수님이고 형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아픈 사람은 돌보고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행한 것입니다.

우리한테 지극히 작은 자는 자기 삶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 가운데 있고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양들은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염소들은 안했습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

그러자 주님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지극히 작은 자들을 향해 쓰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 시간과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이고 열매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돌볼까를 함께 의논하고 협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극히 작은 생명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양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종교성으로 하다보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쫓아다니면서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