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3
첫 번째 ‘공중의 새를 보라.’
염려 하지 말아야 될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공중을 나는 새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 않고 거두지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26절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새도 다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공중의 새 보다 귀하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의 특징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솔로몬의 옷 보다도 더 나은 것이 백합화입니다.
세 번째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들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하루살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하나님이 백합화도 입히고 들풀도 입히십니다. 백합화는 솔로몬 보다 더 예쁘게 입히시고 들풀은 하루 밖에 안 사는데도 입히십니다. 입히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잘 입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공중의 새 보다 백합화나 들풀 보다 왜 우리가 더 나을까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32절)’
공중의 새나 백합화나 들풀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자녀관계가 아닙니다. 자녀관계가 아닌 것들도 먹이고 입히시는데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먹고 입는 것 아버지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아버지가 없으니까 먹고 입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실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33절)’
이것이 지금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는 생명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 보고 복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버지와 친밀해지는 것이 목적이지 아버지가 할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을 다 내 스스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와 의라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는 것입니다.
34절은 첨가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한 날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한 날에 족하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어를 쫓아가 보면 재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자연의 재난이나 자연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난의 고통을 내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살면서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라는 것 자체를 반드시 그 문제 안에서만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사건이 사건으로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축구를 하다가 공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딱 맞는 순간에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나에게 계속 나쁜 일이 벌어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아니면 ‘우리 조상이 무슨 죄가 있기에.’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끄집어내어서 자기의 죄성에 집어넣고 문제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땅에서 살면서 늘 땅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은 일을 겪으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비를 맞으면서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또는 ‘우리 조상이 무슨 죄가 있기에.’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문제로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이 치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just accident’ 단지 사고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확대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가 내 영까지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는 말은 그 문제를 문제로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너는 다 그래. 너는 항상 이래.’ 라고 확대를 합니다. ‘항상, 인간이, 늘’ 이라고 말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이 다치면 안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한 날의 괴로움, 그 문제 속에서 내가 영적인 것으로 치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미 영적인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맨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사건을, 이런 상황을, 이런 사람을 주셨는지 이상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을 다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통해서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을 보기 시작하니까 영이 아니고 ‘아, 이 문제구나.’ 생각하고 문제를 수용하든지 해결하든지 또는 그냥 가만히 있든지 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가 없어서 염려하고 한 날의 괴로움에 대해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제 친척 중에 한 분은 예수를 정말 잘 믿으시는 분인데도 평생 한숨을 쉬고 사십니다. 그래서 그 집에만 가면 저도 힘이 듭니다. 제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저희 교인 중에도 한 숨을 쉬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등을 때립니다. 한 숨이 나올 때 마다 ‘주여’하라고 얘기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 있지만 그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기도를 세 번을 했는데 안 들어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한테 신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병자도 고쳤던 사람이고 뱀도 집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기도는 응답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이 자고치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으로 수용해버립니다. 만약에 바울의 가시를 계속 파헤치고 파헤쳤다면 아마도 사도바울은 그 가시 때문에 죽었더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죽었습니다. 가시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냥 살았습니다.
사랑이 더 큰 것인데 결혼이라는 틀이 생겨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만 하고 연애만 하는 사람은 생명이 안 나옵니다. 실수로 나올 수도 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결혼은 지옥입니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세계가 있으면 그 영의 세계가 반드시 종교의 형식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야지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은 넓기 때문에 하나님만 아니라 다른 영들도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다 채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는 형식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릅니다. 불교는 종교의 형식이 노력해야 되는 것이고 기독교의 형식은 수단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가장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한 사람과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결혼의 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