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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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은 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6장은 친밀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복은 하나님 앞에서 관계 맺는 것이고 그 관계가 더 생명관계로 친밀해지기 시작하면 그 관계에 따르는 생명 또는 열매인 신앙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이라는 것, 산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로 이야기하면 복이라고 하는 관계성을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내가 해야 될 사명은 친밀해지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미래의 생명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편에서 보면 창세전에 복을 주신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이고 그리고 그것이 생명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5장은 복의 신앙이고 6장은 친밀감의 신앙, 7장의 신앙은 생명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생,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는 것, 사람이 산다는 이 삶이 영원한 삶으로 오는 것이 삶입니다.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삶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우리 인생은 죽으러 가는 인생이라고 한 말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지 영원한 삶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얘기하면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은 두 가지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과 시간적인 개념의 영원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만나야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을 드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성을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오신 주님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성탄절과 부활절이라고 하는 두 가지 절기 밖에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든지 맥추감사절이라든지 이런 날은 구약에서 지켰던 하나의 절기이지 사실은 기독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은 생명을 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영원성입니다. 성탄의 신앙과 부활절의 신앙 이 두 가지가 있어야지만 기독교인들의 온전한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만 믿으면 생명을 얻기는 얻었는데 영원성인지 임시적인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고 부활만 믿는 것은 영원성은 갖고 있는데 생명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7장은 철저하게 생명의 친밀감을 통해서 생명의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에 대해서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지만 내가 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원복, 원형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원래, 본래, 근본적인 내 이미지,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친밀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인데 소위 생명관계라는 것입니다. 생명관계는 엄밀히 따지면 생명과 생명이 서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 서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6장은 기도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다워지는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관계를 우리가 아는 것,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내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 되는데
지금 마태복음을 요한복음으로 다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얘기하는데 요한복음은 4복음서라고 말합니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요한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관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가복음을 가장 먼저 썼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가장 짧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먼저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가가 먼저 썼고 마태와 누가가 베껴서 쓴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학자들은 마태복음을 먼저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마가가 제자가 아니고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이고 교부들이 성경을 편집할 때 마태를 가장 앞에 편집한 이유는 마태가 먼저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마태가 먼저 썼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왜 먼저 썼을까를 생각해보면 사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이 마태복음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초신자들은 요한복음을 굉장히 어려워합니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마태가 더 높은 수준입니다. 왜냐하면 세 복음서를 다 섞어서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 마태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영의 세계와 실제 세계와 모든 것을 다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구원파입니다. 구원파가 엄밀히 따지면 유대교인입니다. 유대교인은 자신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자기는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면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논리입니다. 이것이 구원파의 논리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게 맞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태복음은 행위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갊이 있다는 말은 지옥에 간다는 숙어인데 우리가 7장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고 마태복음 전체를 잘못 이해하면 지옥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결국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고 그 기준이 마태복음에서는 다 행위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 무슨 행위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 괴로워해야 하는데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로마서를 들으면 ‘아멘’하지만 마태복음은 굉장히 힘든 얘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희 장인어른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장인어른이 합동측 목사님이셨는데도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기준은 다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라면 여쭤봤을 텐데 그 때는 혹시 영업비밀이 있으신가 해서 제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합동측, 장로교의 입장에서는 원래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박수치는 것도 안 되는 사람들이 행위를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7장이 핵심이고 꽃입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대라는 것은 기본입니다. 기본에 더한 것을 원하는 것이 7장입니다. 마태복음의 모든 시작은 7장부터 입니다. 5장과 6장을 전제하고 있는 7장입니다. 예를 들면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복의 개념을 헷갈린 것뿐이지 너희들은 복 받은 사람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생명관계를 이미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7장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나 누가나 요한복음 보다 왜 앞서 있느냐 하면 요한은 본질을 얘기한 것이고 마태는 이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7장의 신앙입니다. 생명나무의 삶입니다.
우리는 선악과의 삶으로 살았습니다. 누가 옳았냐 그르냐 옳고 그름, 누가 죄인이냐 죄인이 아니냐, 내가 죄를 지은 것이냐 안 지은 것이냐, 내가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죄냐 아니냐, 이것이 다 선악과입니다. 음란의 기준을 말할 때 예쁜 여자를 3초 이상 바라보면 음란이라고 한답니다. 1초를 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선악과입니다. 3초를 보든 30초를 보든 3분을 보든 선악과의 문제 속에서는 그것이 늘 죄가 되는 것입니다. 후다닥 지나갔다면 내가 봤을까? 못 봤을까? 생각하고 또 눈을 일곱 번을 씻어야 되나? 여덟 번을 씻어야 되나? 생각하는 선악과나무입니다. 선악과나무 속에서 살면 맨날 죄를 어떻게 씻을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또 이상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죄인지 아닌지, 저것이 조상의 죄인지 자기의 죄인지 맨날 그 죄성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나무입니다.
십자가 나무는 정죄는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죄냐? 아니냐? 라고 하는 것은 뛰어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은혜 받았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한 번은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들으면 열 받습니다. 맨날 자기만 은혜 받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자기한테만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나무도 좋은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기초의 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마태복음 7장으로 얘기하면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절)’ 반석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집이 안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 기초의 도는 사실 굉장히 중요합니다. 63빌딩을 지으려고 하는데 5층짜리 터를 닦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너집니다. 적어도 60층이 올라갈 만한 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5층짜리 집을 짓는 터와 60층짜리 건물을 짓는 터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 터가 좁으면 안 되는 것처럼 십자가의 나무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터만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00층짜리 집터를 만들어놓고 가건물을 짓고 살면 맨날 은혜 받았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해서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