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2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90


시편 23편은 굉장히 깊은 차원들을 우리한테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부족함이 없습니다. 1절은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나 부족함이 없어요, 나 부족함이 없어요,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주셨어요.’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납니다. 맨날 받기만 하고 주는 게 없어서 화가 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푸른 초장과 물가는 나를 자라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내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하니까 의의 길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라는 사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의의 길로 가려고 하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 하나님이 나를 그 안에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구나.’ 임마누엘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군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군요.’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나 계시는 성령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넘치니까 나누고 베풀고 섬길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신앙에서 ‘넘치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5절의 신앙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목자와 양의 개념이 있는데 5절부터 6절까지는 주인과 손님의 개념이 있습니다. 메타포, 상징이 다릅니다. 그런데 나는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이 내 잔이 넘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넘침을 통해서 내가 나누고 베풀고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봐야 합니다. 4절을 반드시 통과해서 5절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손님이 주인과 같이 되어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뒤를 따릅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집에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늘 단일을 이루는 삶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할 때 1절부터 5절까지는 현재형으로 썼는데 6절만 미래형으로 썼습니다. 다윗이 5절까지 된 것이고 꿈이 6절인 것입니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말씀이 시편 53편 말씀입니다. 비석에 1절 말씀을 적으려고 하기에 제가 1절과 6절을 동시에 적으라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6절까지 가신 것으로 인정해드리고 우리도 6절까지 살기로 가족들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태복음이 대단한 것이 시편 23편 5절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의 삶으로 살아내자고, 그렇게 살아낸 분이 예수님이었다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진짜 유대인이고 진짜 유대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7장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제는 생명나무로 살아야 합니다.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이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입니다. 마태복음이 지금 얘기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명나무로 살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14만 4천 명이 모아지면 신천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신천지 교회에 가야지만 신천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신천지라고 하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생명나무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맨날 선악과만 보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에 대해 묵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 은혜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로만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그 생명나무로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저희교회 집사님 한 분이 집사임명을 받고 나서 집사로 살아야 되는데 맨날 집사가 아닌 자매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자매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게 잘 산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가 되니까 옛날이 좋았다고 이제는 누구를 자꾸 섬기라고 하니까 힘들다고 집사 안 하면 안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로 살아야 합니다. 생명나무가 선악과를 뛰어넘는 것이고 십자가의 나무도 뛰어넘은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이제는 선악의 문제도 십자가의 문제도 뛰어넘은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나면 생명나무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영어로는 다 tree입니다. 그런데 세 나무가 다 다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결국에는 나무의 문제라고 말씀하는데 그 나무가 선악의 나무냐, 십자가 나무냐, 생명나무냐 종자가 다른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5절까지는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첫 번째 선악과의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선악과의 비판은 분별과 다릅니다. 이 비판은 죽이는 비판입니다. 욕쟁이 할머니가 하는 욕이 은혜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인데 틀이 아니고 그 내용은 할머니의 마음이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선악과의 비판은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데 ‘너 죽었어.’입니다. 선악과의 비판은 무슨 말을 해도 다 죽입니다.

누가 페이스 북에 쓴 글인데 밀양의 전도연이 교회를 갔는데 약국 아줌마가 전도연에게 다 잊으라고 다 용서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이 왜 전도연에게 칼이 되고 정죄가 되느냐 하면 그 안에 애정이 없습니다. 전도연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보고 있는 사랑이 없고 논리만 있는 것입니다.

밀양에서 전도연을 진짜 사랑했던 그리스도인은 믿음 없는 송강호였습니다. 믿지도 않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닙니다. 주차장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진짜 예수의 사랑이 있습니다. 전도연, 한 생명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연이 무슨 말을 해도 계속 쫓아다니고 같이 있어줍니다.

어쩌면 선악과의 비판은 ‘말을 곱게 합시다.’ 가 아닙니다. 목사님들하고 성경공부 할 때 가장 힘들어하시는 말씀이 99:1입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 찌질한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99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갑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이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뒤지고 찾아서 잔치를 합니다. 계산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나간 아들은 철없이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이 중요합니다. 99:1이든 9:1이든 1:1 이든 다 이해가 안 됩니다. 경제논리로는 죽었다 깨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들 하십니다.

만약에 교회 안에서 한 명이 말썽을 부린다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나가면 조용해질 것 같습니다. 나간다고 하면 안타깝다고 말을 하면서도 잡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직의 논리로 따지면 말이 안 되는 것이 99:1입니다. 1을 찾아서 가는 이유가 논리가 아니고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고 있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는 것입니다. 99, 전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지만 99를 포기하고 하나를 찾는 목자의 심정, 여인의 심정, 아버지의 심정,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선악의 비판이 심정적으로 좋은 말, 고운 말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에는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들보가 있고 티가 있습니다. 들보를 가진 사람이 티가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는데 결국에는 티가 들보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자기도 보입니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상대의 티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자기도 알고 있는데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까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기 들보가 있으니까 그 들보를 숨기기 위해서는 티가 들보라고 얘기해 줘야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입니다. 공격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보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의인도 죄인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소위 선악과의 나무입니다. 선악과나무가 얼마나 무서우냐하면 의인도 죄인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죄인도 의인으로 만듭니다. 우리 다 찌질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찌질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을 찾는 생명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단순하게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고운 말을 쓰라는 말도 아니고 선악과의 나무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도 내가 티를 찾아내는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머리가 곱슬이라서 싫고 키가 커서 싫고 눈이 두 개라서 싫고 다 싫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거룩한 것이 진주이고 개와 돼지가 동급입니다. 선악과는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게 합니다. 진주의 가치를 몰라줍니다. 돼지가 진주를 싫어하는 것은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주를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팔아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십 억짜리 진주가 있다면 진주를 가지고만 있다가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팔 것입니다. 팔아서 내가 필요한 데 쓸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주의 가치입니다. 진주장사가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진주를 삽니다. 진주 자체가 좋아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빌게이츠고 우리는 그것을 팔아서 남을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파는 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진주도 사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신앙의 차원도 높여야 하지만 내 인생의 차원도 높여야 합니다. 나한테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닌 제 삼자를 보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독일학자가 이 세상에는 ‘나’가 있고 ‘그것’과 ‘너’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 선악의 문제입니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나와 너의 관계까지 가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좋은 면만을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뒷면까지, 그 사람의 어두운 면까지 다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의 ‘너’입니다. 이것이 생명관계이고 이것이 생명나무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선악의 문제로만 계속 보면 개나 돼지 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일을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살지 않으십니다. 늘 돈 안 되는 일만 열심히 하십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같이 울어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말과 삶을 일치시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지고 있는 좋은 면을 말로 까먹지 마시라고 얘기했습니다. 개와 돼지에게는 개와 돼지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합니다. 선악과의 문제에 잡혀있는 사람에게는 가끔 협박도 필요합니다. 개한테는 몽둥이도 필요한 것입니다. 개를 너무 사람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역리를 계속 경험하게 되면 순리처럼 생각하게 되고 순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실 개는 개이고 돼지는 돼지입니다. 개와 돼지를 너무 대우하고 살면 안 됩니다. 주님도 듣지 않을만한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못 알아듣는 애들은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다가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개가 나타났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면 진짜 대단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도 있고 늑대의 탈을 쓴 양도 있는데 양이라고 말해도 자꾸 늑대 짓을 하고 있으면 그냥 늑대인가 보다 하고 살면 됩니다. 너무 괴로워하거나 너무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너무 하나님처럼 살면 안 됩니다.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