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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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절)’

생명관계하는 사람들은 구하고 삽니다. 그리고 찾고, 두드리고 삽니다. 구하는 것은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악과를 먹었고 예수그리스도가 떡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먹었고 내가 생명나무를 먹었습니다. 사람이 수많은 고기와 물고기와 생물, 생명들을 먹고삽니다. 생명을 먹어야지만 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에 필요한 요소들을 구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찾는 것은 내가 그 생명이 필요해서 먹었으면 이제는 생명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생명이 따르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두드리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사실은 이것이 주님 앞에서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은 다 부정적인 말, 선악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 부터는 생명나무를 추구하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성경은 구하는 것, 필요를 채우는 것이 기도라고 얘기합니다. 기도의 삶은 우리가 생명나무를 계속 유지하고 살아내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

아버지가 주는 것이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생명나무를 먹고 마시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생명에 필요한 것이 말씀이고 말씀을 육신화시켜서 그 말씀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삶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 아버지가 주신 생명, 아버지가 주신 말씀, 아버지가 주신 일에 대해서 구하고 그것을 추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늘 두드리셨습니다. 문을 노크하면 내가 여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생명이 생명다워지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또 다른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기다려야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12절을 황금률이라고 얘기하는데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사람과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받았다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삶으로 살아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 받은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힘이 요한1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먼저, 두려움이 없는, 자원함에서 나옵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꺼이 환대하면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상대가 나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나? 일 것입니다. 이 생각 자체가 타락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우리 가운데 오는 것이 진짜인 것입니다. 이것이 조건 없이 내가 즉시, 온전히, 기쁘게 드릴 수 있는 자원함의 사랑입니다. 누가 선물을 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뭔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계속 소설을 쓰다보면 그 자체의 귀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꺼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인데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을 대적할 때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나무라는 것은 조건이 아닌 무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관계적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대접하는 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인격적인 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절-14절)’

생명나무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 힘든 이유는 첫 번째 문이 좁고 두 번째 길이 협착하고 세 번째 찾는 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생명나무의 삶입니다. 반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이것은 늘 선악과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삶입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99가지를 먹으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한 가지 먹지 말라는 것을 찾아 가서 먹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확률은 1%밖에 안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99가지가 다 죄가 되었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예수그리스도의 길만 한 가지입니다. 죄 짓는 사람들은 또 모여서 작당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모일 때 마다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면 왕따가 되어야 하고 손해를 봐야 합니다.

‘문’은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길을 가려고 할 때 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들이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들이대십니다. 들이대지 않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꼭 들이대십니다. 진짜 좁은 길을 갈 것이냐고 물어보십니다. 좁은 길은 고독을 경험하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나무입니다. 완전히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거꾸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나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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