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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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부터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가 바뀌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가 생명나무, 사람을 살리는 나무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생명나무의 원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살리고 싶은데 살리려고 하니까 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욕을 한다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고운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죽습니다. 욕을 하면 살고 고운 말을 하면 죽는데 내가 욕을 하는 순간에 나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또 다른 ‘너’가 있습니다. 줄줄이 99명이 있고 나는 혼자입니다.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생명나무입니다.
독을 써야 사는데 독을 안 쓰고 약을 주면 약발이 살아서 더 죽습니다. 원래 괜찮았는데 약을 먹는 순간에 피가 더 잘 돌아서 병이 더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독을 쓰는지 약을 쓰는 지 다 보고 있습니다. 독을 쓰면 사람은 살지만 독을 쓰고 있는 나를 향해서 사람들이 살인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가 아니고 실제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는데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남편이 거절하고 선을 그어야 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을 긋지 못하고 맨날 아내든 남편이든 살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열녀문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다 죽습니다. 이것이 실제입니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자체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를 떠나는 것이 생명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하게 보이는데 악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보이는데 선합니다. 99%의 선과 1%의 악이 있고 1%의 선과 99%의 악이 있습니다. 어쨌든 선악과입니다. 사단은 1%의 죄를 계속 공격하기 때문에 1%가 아닌 100%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완벽하게 온전과 완전의 100%입니다. 온전과 완전의 100% 선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밑 빠진 독을 막는 두꺼비입니다. 밑 빠진 독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두꺼비가 와서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아니면 물속에 집어넣는 것인데 그것이 은혜의 강물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셔서 막아 주시든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강물에 내가 빠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00%입니다.
그런데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구멍이 하나 뚫어져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샙니다. 1% 새는 것이 나중에는 완전히 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99%의 선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우리는 다 악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방법을 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독을 경험하지 않으면 독이든 뭐든 쓸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는 99% 선한 자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생명나무로 살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나무를 통과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절)’
다 99% 선한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
안다는 것이 히브리어로 야다, know인데 아담이 하와를 알아서 가인을 낳았습니다. 안다는 것이 내가 생명나무를 알아서 또 다른 생명을 낳아야 되는데 우리는 맨날 생명나무를 모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생명이 없습니다. 맨날 99.9999999%의 선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0.0000001%가 안 되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래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나야 진짜 독을 쓸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걱정합니다. 다 거기에 메어있습니다.
연대 의대 교수인데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 왔기에 왜 왔느냐고 했더니 몽골에 의료선교를 하러 가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모든 부와 명예를 다 버리고 몽골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사람은 생명나무를 봤기 때문입니다. 계산이 안 되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미치면 좁고 협착하고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그 길을 굳이 찾아서 갑니다. 너무 고상하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25절)’
집을 지을 때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비, 창수, 바람, 다 하나님의 들이대심입니다. 진짜 생명나무인지 아니면 여전히 선악과인지 들이대실 것입니다. 비의 사건, 창수의 사건, 바람의 사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내는 분별의 기준입니다. 진짜 믿음은 비나 창수나 바람을 통과하고 나서 나올 때 알 수 있습니다.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다 가짜입니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생명나무로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 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물의 통과가 있고 불의 통과가 있습니다. 물과 불을 견디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골짜기 자체가 음침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만 보거나 십자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생명나무를 봐야 합니다. 생명나무를 내가 보고 있는지 생명을 묵상하고 있는지 내가 살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중요합니다. 다른 버전으로 얘기하면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내 마음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정말 다릅니다.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을 때는 주걱을 든 사람이 큰 자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서 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조건 없는 사람이 지극히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큰 자가 아닙니다. 아무튼 생명을 살리는 것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분별하게 됩니다. 똑같은 상황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와 기독교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수준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면 불교와 기독교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도 보통 수준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교회와 교회가 다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똑같은 교회인데 그 교회의 수준과 차원이 다릅니다. 성막의 뜰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과 성소와 지성소에서 관계하는 것이 다르듯이 신앙의 차원도 다 다릅니다. 생명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분별력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나쁜 식으로 가면 그것이 또 다시 분별이 비판으로 가서 선악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나무와 싸우는 것입니다.
죄의식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생명나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으로 따지면 오살죄가 있고 고살죄가 있습니다. 오살죄는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죄이고 고살죄는 그 자리에서 심판 받을 죄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용서 받을 죄가 있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뱀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았는데 아담과 하와에게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꾀임에 넘어가서 지은 오살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도 똑같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참새 한 마리도 책임지십니다. 욥을 봐도 하나님이 사단에게 뭐든지 다 해도 되지만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 ‘내가 그 대 잡았으면, 그 때 그렇게 했으면, ~~할 걸.’ 그런 생각을 하는데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결정에 어떤 실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가 이미 나의 죄까지 짊어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