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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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은 축복의 장이고 6장은 친밀감, 7장은 열매입니다.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8장부터는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복음은 내가 복을 쫓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진짜 복음에 대한 핵심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8:17)’

라고 하는 이사야 53편에 있는 말씀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어졌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를 다 짊어지시고 과거의 죄든 현재의 죄든 미래의 죄든 그 모든 것들이 끝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것 자체가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열심히 일을 해도 벌어지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기도 하고 나에게 공급되는 어떤 것이 끊어진 것이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 몸의 허약, 연약함, 몸이 아픈 것도 죄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구약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마음으로부터 절망하고 슬퍼하고 아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를 이야기하는 단계에서 구원파는 그래서 이제는 누리고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파가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복음이 이루고 사는 삶입니다. 신앙에는 이룸과 누림 두 가지가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누림만 이야기하니까 유대교가 됩니다. 소위 선민사상만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야.’ 하면서 누리고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림만 있으면 안 되고 이루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복을 허락하셨는지를 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마음과 몸이 단단해지고 견고해지고 또 풍성해지고 부유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얻고 강건하고 담대한 삶으로 살아야 되는데 왜 나는 그 속에서 누리고 살지 못할까? 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하심이 실제로 경험되는 것은 온전과 완전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인데 이 누림을 왜 경험하고 살지 못할까? 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숙제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몸 자체가 여전히 죄에 익숙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운오리새끼가 원래의 자기 몸대로 살면 백조로 사는 것인데 오리로 오랫동안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리의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내 몸대로 살면 백조인데 내 몸으로 살지 못하는 오리의 습관이 나의 천성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어둠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는데 빛으로 오신 세상의 바깥은 여전히 어둠입니다. 내가 빛 가운데 있을 때는 온전함을 가지고 있다가 어둠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이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하니까 어둠의 것을 얘기하고 어둠의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 세상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죄에 익숙한 체질이고 그 몸이 어둠의 환경 안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인데 하나님이 온전함과 완전함을 이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죄 가운데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하면 증인의 삶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고난 가운데 들어가셔서 우리의 지금의 고난이 고난이 아니라고 하는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고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많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소망이 되어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서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되느냐 다시 일어나서 주님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내가 왜 죄를 지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죄를 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주님이 정말 필요하다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더 주님 앞에 위임하고 위탁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이미 넘어진 자들을 향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죽었다면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고 살고 이루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주님도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배고파하시고 인간의 삶을 똑같이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패배한 자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이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8장은 우리의 믿음의 삶이 만지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귀신은 영인데 영은 육이 되어서 영육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소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영과 육이 하나가 됐습니다. 사람은 영육의 존재로써 하나님의 완전체로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원래 영이시라는 말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영이라고 하는 존재는 늘 육을 지향하고 있어야지만 영육이라는 단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영은 자유하고 육은 그 안의 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함,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진리가 영이라고 한다면 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구조와 같은 것이 육입니다. 물질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삶을 영적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철저하게 내가 이제는 육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삶을 살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삶이고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실제로 육으로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을 때도 믿음으로 먹어야 되고 놀아도 믿음으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 급훈이 ‘놀 때 놀고 공부할 때 공부하자.’ 였는데 인간이 꼭 놀 때 꼭 공부하고 싶어지고 공부할 때 또 놀고 싶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정말 죄성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삶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Touch, 만지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Touch가 육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만지면 만지는 것이 생명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구약의 개념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 기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개념은 일정한 공간 안에 있어야 거룩합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하나님의 공간인 성전 안에 있어야 거룩한 물질이 됩니다. 공간과 주체와 기름 부으심이라고 하는 절차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개념으로 넘어가면 공간 무시, 주체 무시, 절차 무시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었고 유명한 의원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실 때 일반 적인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계속 만지시고 말씀하시는데 그 모든 사건들이 사실은 믿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든 선포를 하시든 가르치시든 궁극적인 목적은 십자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르치는 것을 너무 잘 가르쳐줘서 영적 지식을 이야기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뭔가 깨닫는 것을 강조하고 산 것입니다. 그것이 다 이단입니다. 선포하는 것을 너무나 강조하는 곳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맨날 예언하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족집게 소리 듣고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신 목적이 십자가였습니다.

영적인 이야기가 역사가 되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신비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다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일수록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주여 삼창을 하고 ‘믿습니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삶에 변화가 하나도 없고 어떤 영향력도 없다면 이미 가짜입니다. 내가 삼십 년, 사십 년, 팔십 년을 믿어도 그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만지는 것을 통해서 실제로 병이 나아지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고 그 믿음의 통로가 만지심입니다. 믿어져서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는 믿음의 주체들이 있는 것이고 또는 주님이 낫기를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체가 되든 객체가 되든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5장은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6장은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고 7장은 그래서 열매로 실제로 삶의 역사 속에서 작은 것부터 드러내고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8장 1절부터 4절에는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그 당시 문화에서는 불치병이었고 공동체에 해악이 되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반드시 제사장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와야 했습니다. 단순한 개인의 병이 아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느냐고 말하니까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원래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법에 의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에 손을 대는 순간에 그것이 더 이상 성물이 아닙니다. 성물이 거룩하지 않은 것에 붙어있기만 해도 성물이 될 수 없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도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간과 주체와 절차를 다 지키고 있어야지만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능력은 너무나 커서 나와 하나님을 분리시킵니다. 또 공동체 안의 나라고 하는 존재를 파괴시킵니다. 죄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만지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 죄에 대해서 아주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 죄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복음의 능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죄도 복음에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같이 뛰놉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칩니다. 독이 죄이고 사자가 죄인데 그 죄 때문에 죽지 않고 그 죄 때문에 내가 상하지도 않고 헤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능력을 내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사람들이 함부로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귀신이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논리입니다. 구약의 논리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귀신이 타고 들어갑니다.

저는 기도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기도 받는 사람에게 손을 대고 기도하도록 합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다 부르셨습니다. 목사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공간에 있는 사람만 부른 것도 아니고 특별한 교단만 부른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르셨고 그렇게 대우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첫 번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메시아의 마음이 있고 두 번째는 제사장에게 보여주라고 하신 것은 그 병이 그 사람의 믿음대로 나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입증할 수 있을 만큼으로 정확하게 나았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소문을 냈다면 아마도 나병환자들이 떼로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병환자 전문의가 되셨을 것입니다.

5절 부터는 한 백부장, 백 명의 부하를 데리고 있는 로마 군인이고 이방인인 그가 예수님께 자기 집에 오지 마시고 말씀으로만 하면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굉장히 높게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이러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에도 종류가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대단한 믿음이 있고 대단하지 않은 믿음이 있습니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12절)’

육의 라인이 아니고 영적인 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라인이 믿음의 라인입니다. 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도 아브라함의 민족이고 이스라엘 민족인데 믿음의 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피로는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그 당시의 백부장은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 순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피로 얘기하면 다 침략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얘기합니다.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서 거기서 울 것이라고 합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절)’

자기의 믿음의 라인이 있었던 것인데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믿음은 말씀이 역사, 말씀이 사건, 말씀이 행위라는 믿음입니다. 헬라적인 사고가 들어가니까 말씀과 행위가 분리되어버렸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약속한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말하고 지키는 것이 같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우리의 말과 행위를 자꾸 분리시킵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시기를 ‘예’ 라고 대답했는데 가지 않고 ‘아니오’라고 대답했는데 갔다면 두 번째가 더 낫다고 하셨는데 사실 원래는 ‘예’ 하고 가야 되는 것이고 ‘아니오’ 했다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했을 때 백부장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말씀이 사건이다.’, ‘믿음이 실재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 = 종교행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믿음이 실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종교의 놀이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본이 되는 믿음이 된 이유는 말씀이 실재, 말씀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진짜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아 주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만지시니 와서 주님을 수종합니다. 나병환자나 백부장의 하인이나 베드로의 장모나 치유하심의 역사를 예수님이 5장, 6장, 7장의 산상수훈을 통해서 이제는 믿음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치유의 은사가 따로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치유하는 역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53장에서 말하고 있는 몸의 강건함과 물질의 풍성함과 내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역사가 십자가의 사역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것을 나누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얘기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습니다. 성락교회에서는 감기귀신도 있고 또 무슨, 무슨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유교적인 사고를 말하는데 귀신은 원래 영의 존재인데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사단이라고 얘기하고 그 사단의 종류 중에 귀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할머니 귀신, 처녀 귀신, 총각 귀신 이런 귀신들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할머니 귀신은 할머니가 죽어서 귀신이 된 것이 아니라 할머니 모양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육신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라서 말씀으로 얘기하면 원래 영은 하나님, 사람, 영, 물질의 세계라는 이 순서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영을 다스리고 물질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이 왜 사람에게 관심하느냐 하면 사람이 바로 서면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로 얘기하면 영이 위로 올라가고 물질의 세계가 세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물질에 사람이 눌려서 신도 사람이 만든 신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환경과 정신에 눌려서 신도 자기가 만들어낸 신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리인데 역리를 순리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이 바로 서야합니다. 사람이 바로 서야지만 전부 순리로 변합니다.

영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는 것이 천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각각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있습니다. 마니또 게임을 해봐서 알지만 정말 행복합니다. 구약의 개념으로 얘기하면 사람이 부리는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천사는 우리의 바깥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굳이 천사가 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본사를 알고 있는데 지사에 가서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천사가 중요하지만 우리한테는 더 뛰어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LTE 세상에서 PC통신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일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사실은 천사도 부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악한 영입니다. 할머니 귀신, 할아버지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자가 다릅니다. 사람과 귀신은 DNA, 존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귀신이 하는 일은 사람에게 들어와서 악한 것을 부리게 만듭니다. 영은 늘 육을 추구하는데 귀신도 무작정 들어오지 않고 영접할 때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말로 귀신을 영접할 때가 있습니다. 귀신은 한 번 들어오면 잘 안 나갑니다. 주님은 보좌싸움을 하지 않으시는데 귀신은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보좌 싸움 합니다.

귀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가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 같이 압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패턴을 통해서 이 사람은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막아놓으셨습니다. 만약에 내일 죽을 걸 알고 산다면 노세, 노세 젋어서 노세 하면서 놀다가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미래를 안다면 하나님도 필요가 없습니다. 만나의 역사가 날마다 내가 주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막아놓으셨는데 그것 때문에 귀신은 늘 과거의 패턴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패턴을 보고 찍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신 같이 맞는 것입니다. 사람이 패턴을 뛰어넘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습니다. 웬만해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가족력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이 가계도를 보니까 죄가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말이 있었고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것은 사실은 귀신의 역사입니다. 집안에 암환자가 있다면 그 가족들이 먹는 음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비슷한 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패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180도 다른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어떤 각성을 통해서 그런 저주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귀신이 가지고 있는 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사람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인데도 자기 공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귀신이 물에서 나오면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귀신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주님과 관계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관계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성이 없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귀신이 사람에게 붙어서 무엇인가 하려고하는 자체가 이미 역리가 순리가 되어서 내가 어떤 영에 사로잡혀서 그 생각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 그 생각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고 떠나야 합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맨날 그 안에서 조종당하고 그 공간에 잡혀있고 주님과 관계를 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들려서 관계가 좋아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귀신에도 하얀 귀신이 있고 검은 귀신이 있습니다. white devil과 black devil입니다. black devil은 수준이 낮은 귀신입니다. 머리 휘날리고 피 흘리고 소복 입고 나타나는 귀신은 초등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굉장히 낮은 수준의 귀신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면 도망합니다. 그런데 white devil은 십자가를 보고도 도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도망가는 귀신은 믿음이 좋은 귀신입니다. 이게 한 순간입니다. 내가 어떤 영에 확 잡힌다는 것은 한 순간이지 ‘나는 괜찮아.’ 이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오신 분이 중국에 있을 때는 기적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서 자신이 굉장히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한국에 오니까 싸움에 대상이 안 보여서 너무 힘들어서 다시 북한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귀신이 보였는데 여기서는 다 천사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은 다 무너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white devil 이고 그런 것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말하기를 최고의 귀신은 천사처럼 온다고 했습니다. 제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실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 뒤에 뭔가 불안한 기운이 보여요.’ 라고 하면서 자시한테 기도를 받고 헌금을 좀 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 실재는 돈입니다. 기도발이 아무리 쌔도 목적이 돈입니다. 영적인 세계일수록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같이 갈 하나님의 공동체가 있느냐 그것이 실재입니다. 대단한 말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고 대단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해도 맨날 혼자서 나그네처럼 살고 있다면 나그네입니다.

역학은 통계학입니다. 통계학인데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을 빼버리면 통계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될 수 있어.’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릅니다. 그것이 하나의 확률일 뿐이지 내가 반드시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확률적으로 맞출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계학인데 거기다가 믿음의 세계를 집어넣으니까 자꾸 미래를 보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믿음을 빼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통계학을 공부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미래의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미래의 사건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철학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완전히 사기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도 가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이고 어른들은 더 잘 보십니다. 저에게도 사람에 대해서 80%정도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1990년대 대학원에 다닐 때 병을 고친다는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원의 치유의 확률을 따져보니까 10명 중에 1명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1명을 고치는 것 때문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러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1명을 10%라고 했을 때 그 중에 9명은 다시 재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다지면 99.9%는 낫지 않는 것인데 0.1% 때문에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취직할까요? 못할까요? 50%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이번에 600명이 지원해서 3명을 뽑는 직장에 시험을 보고 기다리는 청년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마음이 합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릴 때 다시 봐도 합격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하신 거 알고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라는 것을 해봤다는 것입니다. 가끔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꿈속에서 미리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점쟁이가 나의 신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맞췄다고 해도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내 인생에 변화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번에 교황이 내한해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대통령 선거를 하는데 어떤 절에서 그것을 맞췄다고 그 절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오면 또 바뀔 수 있을 것이고 또 교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맞췄다면 또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고 힘을 쫓아서 그냥 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셔서 내 안에 계시는데 내가 말씀을 먹어야 되는데 나의 정과 욕을 채우는 다른 영을 먹습니다. 어떤 영을 먹을 것이냐의 선택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다른 영 때문에 매일 갈지자로 가고 허공에다 주먹질 하고 살고 있느냐 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습니다. 그 영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영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씀의 영을 먹어야 되는데 그 말씀의 영이 실재입니다. 내가 내 육신을 채우고 내 육신이 썩지 않을 육신으로 변화되게 하는 영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계속 내 즐거움에만 빠지게 만드는 영을 먹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먹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귀신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빨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부름이 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는 소리가 있고 귀신을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것을 보면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구나.’ 라고 하는 것은 물질의 영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물질을 섬길 것인지 두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덥석 잡아버렸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만 나는 계속 물질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의 자녀인데 자꾸 삶은 다르게 살고 있는 것을 계속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잘못 먹은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합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신이 있고 귀신이 있습니다. 신과 귀신의 차이는 신은 소위 조상신이 되는데 입신양명을 한 사람만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참봉이나 진사 정도로 올라가야지 집안에서 조상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자는 입신양명이 돼도 조상신이 될 수 없습니다. 입신양명이 안 된 사람들은 다 귀신이 됩니다. 사람은 딱 두 가지 종류입니다. 신이 될 사람과 귀신이 될 사람입니다. 이것이 유교의 개념입니다. 떠돌아다니는 귀신은 맨날 슬퍼하니까 달래줘야 하는 것이고 제사상에 절을 하는 이유가 조상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가 상놈의 시대가 됐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조상신이 되지 못하는데 지금은 웬만하면 다 조상신이 되고 웬만하면 다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아무나 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되거나 귀신이 된다는 것이 유교의 개념입니다. 기독교의 개념은 종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입신양명을 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귀신이 될 분인데 사람이 죽으면 또 갑자기 영웅시되어서 잘 모셔야 되고 잘 드셔야 된다고 해서 제사 음식을 차리십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 때문에 제사를 안 드리게 돼서 못 드시게 됐다고 저희 어머니께서 태산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교개념의 믿음입니다. 그럴 때 저는 천국에 가면 뷔페가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믿음의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의 체계가 다른 것입니다.

정신병과 귀신들림은 또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합니다. 귀신들리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귀신을 내쫓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귀신을 내쫓으려면 능력의 싸움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력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의 싸움입니다. 진리의 싸움이라는 것은 맨 정신일 때 예수만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능력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한 마디만 해도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귀신 쫓기만 하려고 합니다. 진리의 싸움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가 2층에 사는데 창 밖에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귀신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뜸 굶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1주일 굶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의 연약함 때문에 갑자기 그런 정신적인 문제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안에서는 주로 약을 먹이는 이유가 호르몬을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귀신 들렸다.’ 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람들을 낙인찍는 것이 되는 경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귀신이 들렸다 해도 정상인처럼 취급해 주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고 그 안에 있는 정신과 싸워야 되는 것이지 자꾸 사람을 패다가 잘못하면 죽이는 수가 있습니다.

종교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이 있는데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마음을 주실 때가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정말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잘 모르지만 함께 공감하고 함께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지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변화 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자족하고 살라고 하시면 그 뜻을 따라 가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정말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안 들어주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기도발이 쌘지 안 쌘지가 아니라 그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세우려고 하시는 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형제를 위해 기도했을 때 그 형제가 목사님의 기도에 감동해서 다리 길이가 다른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게 신앙생활 잘 해야지 라고 결단했다면 다리가 낫는 것 보다 더 좋은 기도의 응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꾸 병이 고쳐졌느냐 안 고쳐졌느냐 라고 판단을 하게 되면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냐 능력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 수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실재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왜 보여주셨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수단입니다. 오병이어가 맨날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때 그 사건만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그것이 주업이셨다면 식당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 뒤 돌아보면 기적과 같은 일들이 머무나 많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기흉에 걸려서 허파에 물이 들어가서 다음날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전도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하실 때 자꾸 기침을 하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일 수술을 할 때 꼭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기침할 때 병이 나은 것으로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허파에 찼던 물이 2/3이었다가 1/3로 줄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는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서 ‘너는 내 일을 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 때 침대에 누워서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성경말씀이 튀어나와서 정말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만약에 정신병이었다면 지금 여기에 앉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귀신의 세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거다, 저거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기적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영적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병이어를 믿습니다. 오병이어는 그들을 배부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예수님 쫓아다니니까 배부르다고 먹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201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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