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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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에다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얘기하는데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녀권이고 그 신분에 맞는 권위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관계로 오신 것이지만 그 관계를 주신 목적은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일이 먼저 생기면 일의 관계는 기본이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일꾼은 패러다임, 틀이 달라진 일꾼입니다. 그래서 일을 통해서 관계로 가려고 하는데 일을 통해서 관계로 가려고하면 신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해도 100% 완벽하게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분이 복음이라면 일은 율법입니다. 복음이 되어야지 율법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복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할지라도 관계를 통해서 일을 해야지 일을 통해서 관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관계와 일이 되면 또 다른 사랑과 관계와 일을 하는 사람하고 서로 연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연합이 될 수 있을까? 라고 할 때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데 남자로서의 자기의 정체성 남자가 가지고 있는 권위 여자가 가지고 있는 여자의 정체성, 여자의 복종이라고 하는 관계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1:1이 됩니다. 복종이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생명을 품는 것도 복종의 하나의 형태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무조건 복종해? 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어미 새가 자기의 새끼를 품고 있듯이 품는 것이 복종입니다.

EBS에서 최진석교수님이 강의를 하시는데 그 강의를 듣다보니까 남자의 남성성은 노자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여성성은 공자의 개념이 가깝습니다. 생명은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어야지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만 옳다고 또는 노자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말할 때는 철저하게 노자의 사상성을 얘기하고 여자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말할 때는 공자의 사상성을 얘기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1이 되는 것입니다. 관계와 일을 배워야지만 관계와 일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주신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일,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본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주신 말씀, 주신 사람, 주신 일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계와 일입니다. 관계와 일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세상의 모든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관계성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셨는지 자기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다른 사람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일꾼과 신약에서의 일꾼이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야구경기의 베이스에 1루, 2루, 3루와 홈이 있습니다. 홈에서 1루로 갈 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2루로 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3루롤 가면 산은 물이면서 산이고 물은 산이면서 물입니다.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1루의 개념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면 산이 산이 아닌 것입니다. 산이라는 것 자체도 우주의 하나의 부분일 수 있고 또 산과 물이 같을 수도 있고 산이 산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이 물이 될 수도 있고 산이 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변화무쌍 하면서도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같이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1루에서 2루로 가야 되는 관계가 있고 2루에서 3루로 가는 관계가 있고 3루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관계가 있습니다.

1루와 2루 사이가 구약이고 2루와 3루 사이가 신약입니다. 신약은 틀이 다릅니다. 구약의 것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이해가 안 되는 세계가 너무 많습니다. 건강하고 부자이면 하나님 앞에 축복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개념은 다릅니다. 부자가 과연 천국에 가기 쉬울까?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진짜 건강한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라인을 타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일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영적인 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라인을 보고 있는 것이 소위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해서 설명을 하면 소위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개콘으로 얘기하면 ‘의미 없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로 얘기하면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이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도 있지만 그 안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3루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안타를 쳐서 2루로 가면 아웃됩니다. 반드시 1루를 거쳐야 합니다. 갑자기 1루에서 3루로 뛰면 안 됩니다.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는 절대로 지름길이 없습니다. 배우는 과정도 똑같은데 어린 아이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뛰고 말하고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지만 사실은 만 번을 들어야지 단어 하나를 소리 낸다고 하고 수없이 넘어지는 것을 연습해야지만 걸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다 과정이었습니다.

1루의 틀이 있고 2루의 틀이 있고 3루의 틀이 있습니다. 그런데 1루의 틀에서 2루를 볼 수는 없습니다. 가 봐야 아는 것입니다. 가보니까 새로운 틀이 생기는 것입니다. 9장은 사실은 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포도주를 담그는데 새 포도주에 담지 않으면 부대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부대는 틀이고 새 포도주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바뀌고 틀은 그대로다 안 됩니다. 그리고 틀은 바뀌었는데 내용이 바뀔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을 믿는 사람이 있고 또 신약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은 끝난 것이고 이제 신약의 시대니까 신약만 배우자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이 동시에 우리한테 성경이라는 말씀, 정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해서 함께 그것을 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신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개념은 병들고 아프면 가난하면 다 저주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것이고 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고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이런 논리가 다 구약의 개념입니다.

1루,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현실의 세계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가운데서 여전히 잘 살지 못하고 한계가 있는 그 모습 속에서 늘 죄를 묵상하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망의 권세 앞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2루입니다. 또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세계입니다. 죄와 저주와 사망의 권세는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이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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