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로마서 14:13-23, 레위기 23:15-22)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에 이르기까지라고 하는 그 믿음의 역사를 로마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에 이르기까지라고 하는 믿음의 모양과 믿음의 수준이 분명하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내가 믿는 것도 믿음이고 또 그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도 믿음이고 또한 내가 살아야 될 뜻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하는데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주신 세계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해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겠다고 결정하셨고 또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 속에 책임이라고 하는 말씀을 쫓아가는 믿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내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믿음의 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내 몸이 압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의의 병기로 살지 못하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고 있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육신의 법이라고 하는 육신의 메카니즘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나,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절망스러울 정도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그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더 괴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려고 하면할수록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부터 높아지는 믿음의 차원을 바라볼 때 마다 더 죽을 맛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고 하는데 이미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이고 여전히 절제하지 못하고 욕구와 욕망을 쫓아가는 내 모습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날마다 주님 앞에 죽노라 매일매일 십자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계속 우리에게 내가 생각하는 판단, 내가 생각하는 감정,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3장부터 11장 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으면 율법주의로 갈 수밖에 없게 되어 인생을 척하고 살든지 아니면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며 살든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부터 나타나는 또 다른 세계를 도저히 인간이 이를 수 없는 또 다른 윤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CTS에서 라디오방송을 녹음하는데 반대편 목사님은 아주 보수적인 목사님이시고 그 목사님의 반대편 입장에서 논쟁하는 사람이 저입니다. 설전을 하다보면 서로를 비판하게 됩니다. 방송을 한 번도 듣지 않다가 제가 직접 들어봤는데 제가 촉이 살아서 너무나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 저녁에 탁구를 치는데 노량진교회 목사님이 다리가 불편하십니다. 노량진교회 교인들은 탁구를 정말 잘 치는데 목사님한테 다 집니다. 목사님을 생각해서 져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또 당신이 실력이 늘어서 다 이겼다고 대응을 하십니다. 그런데 저랑 탁구를 치면 제가 목사님을 계속 이깁니다. 경기를 시작할 때 마다 오늘은 꼭 져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내가 봐 줄게.’ 라고 한 말씀하십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가슴에서 승부욕이 부글부글 올라옵니다. 거기다 또 한 마디 ‘의외로 잘하는데?’ 라고 하시면 발동이 걸려서 제가 이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기고 나서 져드릴 걸 하면서 또 후회합니다. 그런데 노량진교회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십니다.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해도 잘 대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들께 저보다 영성이 깊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극이 오는데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찌르면 반응이 와야 되는데 반응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계속 찌를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느냐고 계속 우리를 찌를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수많은 자극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내가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죽노라, 라고 한 사람이 다니라면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녹음을 해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제가 말을 했지만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듣고 나서 제가 결심했습니다. 가능하면 들어주고 가능하면 미리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무슨 말을 하고 사십니까? 하루 종일 어떤 뜻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다시는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 부딪칠 것과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하면 그 앞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길을 걸어갈 때 부모가 앞에 있는 것들을 먼저 치워줍니다. 우리가 어떤 관계를 할 때 관계에서 미리 치워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비판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속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도 죄를 만들어서 죽이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딸이 자기 친구얘기를 하는데 공부를 아주 잘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는 잘 해도 뭔가 부족한 것이 하나 있겠지? 라고 했더니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노래도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그래도 뭔가 하나 부족한 점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계속해서 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속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한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유대인들에게 음식법이 있습니다. 레위기에 있는 말씀에 보면 사람과 사물과 짐승은 딱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정한 것, 두 번째는 정한 것, 세 번째는 거룩한 것입니다. 동물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부정한 것과 정한 것과 거룩한 것이 있는데 레위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늘 거룩한 것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맞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정결법과 거룩한 법을 쫓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약에 있는 말씀에 보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새김질하고 굽이 있는 것,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피는 먹지 말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법을 주셨습니다. 부정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한 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추구하고 살아야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먹는 것조차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들의 법이 있습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먹는 것조차도 거룩해져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 먹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을 먹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한 먹거리에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먹는 자마다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에 보면 생명나무를 먹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으로 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단순하게 먹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음식만이 아니라 그릇도 구별했습니다. 어떤 그릇이 깨끗한 그릇인지 구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은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구별했습니다. 내가 누구와 밥을 먹었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먹는 절차도 있었습니다. 절차도 중요하고 사람도 중요하고 그릇도 중요했습니다. 물론 음식의 종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유대인들이 정한 식품이라고 정한 포셔라는 상표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식탁법은 굉장히 절차가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먹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진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은 초대교회에 특별히 로마교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예수님은 음식에 대해 세 가지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5-16절)’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정결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거꾸로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법은 들어가는 것이 정결하면 나오는 것도 정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들어가는 것이 정결하다고 할지라도 거룩하지 않은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의 성전에 무엇이 거쳐서 나가느냐, 마음이 필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통과시키느냐가 아니라 제대로 거룩함으로 통과를 시켰느냐 안 시켰느냐 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고 마귀는 우리에게 유혹을 주는데 시험이든 유혹이든 그것이 나를 통과할 때 어떻게 통과시키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늘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예수님과 부딪쳤던 것은 안식일의 문제 때문이었지만 사실 안식일의 문제의 내용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있는 말씀처럼 손을 씻었느냐 안 씻었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날 밀밭 길을 걸어가다가 제자들이 밀을 까먹었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에 음식을 먹느냐고 하니까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 그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예수님이 밥을 드셨습니다. 정결법에 의하면 누구와 밥을 먹느냐에 따라서 정결하냐 정결하지 않냐가 결정되었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정결법에서 벗어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시는 분이 되셨느냐 하면 그 안에 마태와 그 안에 삭개오와 그 안에 막달라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떡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왜 생명이 될 수 없느냐 하면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지만 생명이 그것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맞는데도 틀리다고 얘기할 수도 있고 가만히 침묵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가만히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한테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는데 저는 꿋꿋하게 잘 살았습니다. 전과의 가격을 높여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5천 원짜리 전과를 사야 되면 8천원이라고 값을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 때는 거의 완벽한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어머니랑 얘기를 하다가 제가 지난날에 했던 일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모르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신 어머니의 생명을 품고 있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서로 무관심하라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생명을 보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떡을 먹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율법의 떡을 선악과를 먹고 있으면서 여전히 비판의 눈으로 정죄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절)’ 

먹는 절차, 먹는 사람,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정말로 믿음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내가 하지 않고 내 욕구와 욕망을 가지고 하고 있는 것인지 보아야 합니다. 

제가 레위기 23장 15절에서 22절 말씀을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칠칠절, 오순절의 제사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순절 제사법에 아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은 날짜로는 50일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된 날입니다. 주님은 유월절에는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얘기하십니다. 그들의 고난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그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애굽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한꺼번에 끌어올리셨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무교병을 먹은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 이스트가 들어가지 않은 떡입니다. 누룩은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고 세속의 정신과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애굽의 정신, 권력과 욕망과 죄로부터 구별되었다고 하는 의미로 누룩을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누룩이 있는 떡을 먹은 사람들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벽하게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유교병을 먹습니다. 누룩이 있는 떡을 먹은 것입니다. 천국의 비유 안에 누룩이 있지만 누룩의 의미는 거의 다 세속의 정신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유교병을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유교병은 세속의 정신이 더 이상 그들을 흔들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피하고 죄와 구별되어서 죄 짓는 것을 찾아가지 않는 삶이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죄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일상의 삶 가운데 들어가서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곳은 거룩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갈 데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든, 죄인과 함께 먹든, 날짜와 상관없이 먹든,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왜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은 생명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병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죄와 피 흘리면서 까지 싸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평화를 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는 peacemaker 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고 세상이 저렇고 계속 욕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세상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만들어내는 하나라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대에는 늘 세상을 비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40이 되고나니까 이제는 누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기성세대이고 내가 만들어낸 세상인데 하나라도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감리교 문제 있다고 다들 얘기하는데 이제는 감리교의 정회원이고 그 안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책임져야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짊어지고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교병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병을 먹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신약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제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유대교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어? 그러면 할례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나한테 와.’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가라.’ 고 하는 종교입니다.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렇게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에 들어가서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조사했더니 기독교인들이 한국사회의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이미 기득권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가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빈민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기꺼이 유교병을 먹는 믿음입니다. 누룩이라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맞짱을 떠서 살아야 합니다. 한국사회가 싫어서 이민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 사회에 가는 순간에 그 사회는 이상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목사님 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디목사님이 이 세상에 가장 건강한 교회는 없다 그리고 있더라도 당신이 가는 순간에 그 교회는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교병을 먹고 이겨야 되는 것이지 누룩을 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자는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가는 자입니다. 내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지치기해야 되고 어떤 순간에 버려야 될 것이 있는 것이고 죽음의 자리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가 되는 삶이 끝이 아니라 사도가 되라고 얘기합니다.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는 다시 배와 부친을 만납니다. 그래서 똑같이 어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삶이 있지만 가장 비범함이 살아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 다 죄라고 하신 것처럼 믿는 내가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키고 살고 있는 ‘나’가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다 성도입니다. 카돌릭에서는 성인, saint는 기적을 경험하거나 대단한 일을 해야지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saint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성도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연약함과 그 사람의 아픔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공동체는 신비공동체입니다. 비루한 자, 억울한 자, 빚진 자, 누가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거룩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 다 죄라고 할 때에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나에게 보이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 어떤 것이든 내가 만지는 순간에 거룩함이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제가 한동안 우리교인들은 왜 꼭 망하고 나서 올까? 고민했습니다. 부자였던 사람들도 나를 만나는 순간 왜 가난해질까? 그것이 저한테 숙제였습니다. 그리고 부자를 만나면 제가 어느 순간에 작아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을 줘야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그렇게 대우하고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부딪칠 것과 거칠 것을 치우는 방법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니라. 
행동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라고 하는 묻고 듣는 과정을 갖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어떻게 하시고자 하십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믿음의 역사, 이 믿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서로 비판하지 말고 부딪칠 것과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고 속되다고 말하는 내가 속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한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거룩한 행위에 우리 스스로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나를 거룩한 사람으로 보시고 
나를 통해서 그 거룩함을 드러내어서 
나누고 베풀고 섬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만나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내가 거룩함을 지켜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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