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갑옷 (로마서 13:11-14, 이사야 61: 1-11)
로마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의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은 영적인 예배라고 하는 것은 몸의 삶의 습관을 갖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또 다른 질서가 있고 또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려고 하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삶의 공간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순리가 역리가 되었고 또 무엇을 하든 그것이 헛되고 헛된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향방을 모르고 그저 그렇게 갈지자로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선택하는데 선택할 때 마다 우리는 악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고 내가 선한 것을 하려고할 때 마다 또 다른 수렁이 되고 내가 그럴 때 마다 인생의 늪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운행이란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듯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품고 계시는 것으로 역사를 시작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혼돈을,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시고 의미 없는 삶 또는 분별없는 삶 을 의미 있게 분별력 있게 만드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태초에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절)’
사람이 공허하고 또 순리를 역리처럼 살아가고 분별할 수 없는 그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빛으로 오셔서 빛 가운데로 우리를 끌고 가시겠다고 선언한 것이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선언입니다.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에 있는 말씀은 빛의 역사를 우리에게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마음이 상한 자였고, 사람은 본래 포로 된 삶으로 살아가는 인생이었고, 사람은 동서남북, 위아래 모든 것들이 갇혀있는 살 수밖에 없었고, 날마다 절망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자인데 주님은 우리 가운데 빛으로 오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실 것이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실 것이고, 슬퍼하는 자에게 참 된 기쁨, 참 된 감사가 흘러넘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 우리 가운데 있는 참 된 그 빛이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인정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가 꿈꾸고 있는 그 빛의 세계를 통해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역사,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땅의 사람들, 그 땅의 사람들에게 온전한 빛의 역사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리고 살아갈 때에 그 누림이 혹시 잘못된 누림이 아닌지 생각되어서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고침과 자유와 놓임과 참된 기쁨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빛의 자녀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9절)’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삶들이 모든 생명들이 ‘저 사람 정말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이야.’ 라고 인정받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1절)’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 된 소식, 어둠을 비춰줄 수 있는 참 된 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비천한 자, 겸손한 자,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람 또는 우리가 이미 빛으로 보는 사람일수록 그 가난 가운데 비천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갑옷을 입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비천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은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11절)’
시기를 아는 자입니다. 잠 속에서, 어둠 속에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을 아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늘 주님 앞에 선택 받고 분별 받고 하나님의 빛의 자녀라고 하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 시기, 시간을 보고 있는 자입니다. 내가 삶의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50이 가까워 오니까 뭔가 이루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뭔가 내가 한 각을 이루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까 30대도 똑같았습니다. 제 선배가 30이었고 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을 때 그 선배를 보면서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배, 선배 나이가 30인데 정말 별 볼일 없는 것 같다. 나는 30이 되면 선배하고는 다르게 살고 싶다.’ 나이 30이면 뭔가 이루고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그 선배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 30에 저는 미국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배와 별 차이가 없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똑같이 지금 50이 다 되어 가는 이때에 내가 뭔가 이루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봤더니 어떻게 보면 그것도 허상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이 시기에 이 시간 속에서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속에서 시기를 알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50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 친구들을 만났는데 친구 중에 한 명이 어느 복권방에 갔더니 스물 한 번 째 로또 당첨된 곳이라고 현수막이 붙어있더랍니다. 그러면서 그 집에 가서 로또 하나 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또 1등이 얼마정도 되느냐고 했더니 8억 정도라고 했습니다. 시시해서 안 샀습니다. 겨우 8억에 제 믿음을 팔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늘 로또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늘 지름길로 가고 싶어 합니다. 내가 통과하지 않고 내가 겪지 않고 지금 가진 현실을 무시해 버리고 늘 다른 것들을 추구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더 깊은 잠입니다. 현실을 못 보게 하는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잠 가운데 우리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한 방에 무엇인가 이루려고 합니다. 신앙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공도, 업적도, 명예도, 이름도 한 방에 이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방 없습니다. 제가 그래서 요즘 겸손해져서 은퇴하신 목사님들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관계없이 그냥 은퇴하신 것만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나도 은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깨어있다는 것, 시기를 알고 있다는 것은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12절)’
밤의 역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아직 낮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밤이 더 깊은 것입니다. 밤이 더 깊으면 깊을수록 낮이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밤이 더 깊으면 깊을수록 밤이 더 어둡다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 이 여섯 가지는 대낮에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 몰래 숨어서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대낮에 술 취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용간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제 먹을 때가 됐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시기를 대놓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뒤에서 수군수군 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고 실제로 그 마음속에서는 다툼과 시기가 있습니다. 뒤에서는 그렇게 욕하다가 앞에서는 딴 소리 하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저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똑같은 얘기를 하니까 저만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식과 다툼과 시기가 있는데 방탕과 술 취함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끌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내 아들이 잘 못해서 선생님 앞에 가면 다 친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20대 때 길을 가는데 전봇대가 달려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전봇대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헤이딩 했습니다. 인생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휘청휘청 갈지자로 가고 있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술을 먹고 운전하다가 경찰에게 잡혔는데 미국에서는 그 죄가 굉장히 큰 죄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자기는 분명히 똑바로 운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차가 지그재그로 달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이런 모습일는지 모릅니다. 나는 지금 똑바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안에 밤이 있습니다. 내가 숨을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함이라고 하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회 거기다가 음란과 호색이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쾌락으로 몰고 가고 도구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시는 참 된 기쁨을 쾌락으로 쓰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쓰는 것, 사랑도 도구입니다. 관계도 도구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과 관계를 합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제일 인격적인 사람이 가만히 끊고자 합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목적으로 만나는 것, 사람이 좋아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도구로 쓰려고 하는 쾌락이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다툼과 시기, 늘 분열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사모님은 매일 이민 가고 싶다고 얘기하십니다. 이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원전입니다. 원전 하나가 터지면 250km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죽음입니다. 일본에서 중국에서 원전이 터지면 대한민국이 정말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민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에 후쿠시마에서 원전반대운동을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이 자기는 늘 후쿠시마에 가서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만났을 때 첫 번째로 한 이야기가 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공격이 안 된다고 어디를 치시려는 것이냐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자기는 적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후쿠시마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속에 들어간 것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다툼과 시기 속에 분열과 죽음으로 늘 갈 수밖에 없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밤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이것이 사실은 영적인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전쟁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는 자녀이고 그래서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둠과 싸워야 되는데 그 어둠이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방탕한 자, 술 취한 자, 음란한 자, 호색하는 자, 다투는 자, 시기하는 자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붙잡고 있는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갑옷입니다.
이사야서 61장에서 보니까 구원의 옷, 공의의 겉옷, 신랑의 제사장관, 신부의 단장함, 이것이 구원의 옷을 입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빛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통치 받는 삶을 사는 것인데 통치 받는 삶은 전쟁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옷을 입어도 티가 납니다. 옷은 각자의 개성대로 입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옷 자체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빛의 옷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신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 저 사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 ‘아 저 사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 다 보입니다. 그렇다면 튀는 것입니다.
그런데 튀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라고 합니다.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빛이라고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통치 가운데 있으면서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영적 권위, 갑옷을 입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그 싸움은 영적 전쟁, 가치관의 전쟁, 말의 전쟁, 태도의 전쟁, 삶의 자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증언의 싸움입니다. 여러분 지금 싸우고 계십니까?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 아셔야 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던 아픔이나 상처나 그 전쟁이 얼마나 동물과 같은 전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고상하게 괜찮게 그럴듯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상처 받았다고 해서 칼이 스쳤다고 해서 울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아들이 어제 손가락이 긁혔다고 너무 아프다고 울고 있는데 보니까 상처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서 소대장이 대대장한테 상처가 너무 아프다고 운다면 절대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빛의 옷을 입은 사람은 엄청나게 티가 나지만 그 곳에서 어둠의 가치관과 싸워야 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다리가 없어질 수도 있고, 팔이 없어질 수도 있고, 내가 부상당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 도망갈 데도 없습니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빛의 옷을 입은 사람이 도망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를 숨겨도 보이고 눈 감아도 다 보입니다. 안 보이는 데 숨는다고 숨어도 빛이 환할 것입니다. 도망갈 데가 없으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의 체질화가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방탕과 술 취함 속에서 내 몸을 곧게 하고 정확하게 걸어갈 수 있는 체질이 되어야 하는데 그 체질은 ‘너를 향해 지친다.’ 너 때문에 지친다가 아니라 너를 위해 지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지금 각성제사회, 성공하는 사회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치지 못하게 각성제를 먹습니다. 고3 학생들이 잠 안 자려고 약을 먹는 사회입니다. 우리도 눈이 좀 침침하고 몸이 피곤하면 영양제 챙겨 먹습니다. 김OO전도사님 친구 분들 모이면 영양제 나눠 드신다고 합니다. 어제 제 친구들도 밥 먹고 나니까 약 하나씩 먹으라고 나눠줬습니다. 이제는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지치는 거 못 봐줍니다. 다 쌩쌩하게 살아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나는 똑바로 걷고 있고 정신 차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 약 때문입니다. 똑바로 걷고 있는데 사실은 갈지자로 걷고 허공에 주먹질 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공동체는 스승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40일 동안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살해의 위협 가운데 있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회가 가장 피로한 사회였고 가장 힘든 사회였습니다. 그 힘든 공동체 가운데에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고 나니까 그들에게 또 다른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한테 지친다.’ 가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친다.’ 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못하고 보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피로가 아니라 또 피로하기 때문에 그 사람 만나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서로 보고 서로 화해시키는 그래서 내가 힘든 에너지지만 함께 그것을 써 주는 것입니다.
우리 다 피로합니다. 새벽예배를 드리니까 가끔 비몽사몽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를 위해 지치며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 별명이 요즘 ‘정기도 목사’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하니까 별명이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싫어했던 ‘기도하세요.’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가장 지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똑바로 몸을 가누는 첫 번째 체질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지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긍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어둠 속에서 더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 가운데서도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요일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엘리야의 기도를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가뭄 가운데에서 한조각 구름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한 점을 보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비를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내려가라고 얘기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분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정확하게 드리지 않지만 저에게 구름 한 점이 보였습니다. 한 참 지난 뒤에 간증을 하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한 점도 보여주시고 물질에 대한 한 점도 보여주셨습니다. 피로하고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힘듦을 통해 우리에게 회복이 오고 우리에게 능력이 옵니다. 저는 저 혼자만 느끼는 행복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제발.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까지 우리가 끌고 온 것이 정말 기적입니다.
우리가 그냥 빛의 옷만 입고 살면 괜찮은데 모욕과 수치를 뚫고 가면 되는데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싸우라고 얘기하시는 것이니까 우리가 함께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음란과 호색을 이기는 빛의 갑옷은 함께 위험을 공유하는 체질이 됩니다.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일수록 콩 한조각도 나눠먹어야 합니다. 아픔도 공유하고 기쁨도 공유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복도 함께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순신장군이 되면 안 됩니다. ‘이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저는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면 기도의 제목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데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힘들고 지칠 때 마다 그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을 통해서 다시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툼과 시기를 벗어나는 빛의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체질이 되려면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그런데 다름이 축복입니다.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을 통해서 내 마음이 넓어집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쓰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분명히 틀렸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고 자기의 규격 안에 상대를 몰아 놓고 규격화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단속사회입니다. 모두를 다 규격화 시키는 사회입니다. 사람을 똑같이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학교를 나와야 하고 똑같이 취직을 해야 하고 똑같이 성공해야 한다고 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어 지는 또 다른 가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창 중에 68명 중에 68등 했던 친구가 제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복음 아닙니까? 1등만 잘 사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공부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지능도 다중지능이라고 해서 공감하는 능력도 지능이고 관계를 하는 것도 지능이고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지능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반드시 쓰시겠다고 하셨는데 반드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서 빛의 갑옷을 입자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속의 정신과 세속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내는 견디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셔서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품고 계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영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다른 세계, 그 어둠을 뚫고 지나가는
빛의 세계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불러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내가 영적 전쟁을 하겠노라고 결단하십시오.
밤의 역사,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겠노라고
진리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기를 간구하고 살겠노라고
그 진리를 위해서 내 스스로 내어주겠다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