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 1. 사람이 무엇이기에(시편 14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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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늘 사람에게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신앙의 본질, 신앙의 기본을 배웠다면 이제는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어떻게 살아낼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번에는 욥기 말씀을 강해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욥기 말씀을 전하다가 교인들이 다 빠져나갈 것 같아서 멈춘 적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믿고서 복 받은 얘기를 해야 하는데 하나님 믿고서 힘들어진 이야기만 하니까 힘든 사람들한테 더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욥기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욥기 말씀을 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져서 전하려고 하는데 바로 시작하지 않고 완충역할을 해 줄만한 주제설교를 잠깐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몇 주간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 라는 책이 있던데 조금 바꿔서 주제를 정해봤습니다. 사람이 정말 쉽지 않은 존재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은 독특하다고 말하고 정말 사람이 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자기는 평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나이가 들어가는 이 인생이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거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상황의 변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가 목사님들께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 중에 하나는 사람을 절대로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은 신뢰할 존재가 아니고 사랑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 말씀을 인생의 연륜 속에서 결론지은 말씀들이니까 묵묵히 듣기는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신뢰하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늘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려고 하지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오해가 있고 수많은 곡해가 있고 또 동시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고 똑같은 문제도 정말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삼자대면을 몇 번 해봤는데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 실감했습니다.
모던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하는 세계였다면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각자 느끼고 각자 생각하고 또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쁘면 기분 나쁜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지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세계입니다. 며칠 전에는 기도를 열심히 하시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애쓰시는 너무나 신실하신 목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런데 이분이 목사님들끼리 싸우는 가운데에서 저와 상대편이 된 것입니다. 회의를 하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게 됐는데 제가 나중에 왜 그러셨느냐고 여쭈었더니 목사님 말씀이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것 같은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기도하고 예배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정말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웠는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가르쳐주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르쳐 준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기도 누군가에게 잘 배웠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좋은데 내가 아는 친척 중에 예수 믿는 누구 때문에 교회에 안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이 너무 싫어서 교회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사람의 사랑은 늘 부수적인 것이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요한 1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는 또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 가운데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믿음, 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도 있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정말로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주제설교를 통해서 함께 경험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릅니다. 또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경험이 또 다릅니다. 상황이 다르든 경험이 다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점이 다르든 어쩌면 그 기준이 다른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또는 가지고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Text가 있고 Context가 있고 Pretext가 있습니다. Text는 글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얘기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Text가 다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성공이 자기 삶의 기준이 되고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기준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성품을 닦는 것이 삶의 기준입니다.
Text, 진리가 진리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Context라고 하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Context를 맥락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이야기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 하는 것이 Context입니다.
뿐만 아니라 Pretext라고 하는 내가 이미 경험했던 기억, 아니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 상황을 해석을 하고 그 Text를 또 확증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Text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Context, 사건, 상황이 어떤 것이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내가 그것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그 반응이 또 다른 Pretext, 기억이나 습관이나 체질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이 세 가지 상황 속에서 계속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가지를 묻고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삶의 기준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하고 내 눈을 다시 뜨게 하고 오늘도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있으십니까? 단순하게 비전이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지구라는 별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서울이라는 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Text,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Text가 말씀이고 말씀이 진리라고 얘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한테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겪는 상황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는데 Text라고 하는 내 인생의 기준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바뀝니다. 교육은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내 습관을 또 다른 체질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21동안 훈련을 해야지만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체질을 바꾸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도 있고 멘토를 만날 수도 있고 코치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내 인생의 Text, 기준이 바뀔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섬김을 통해서 Text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의 변하지 않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Text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과 사건과 사람 속에서 Context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수많은 오해와 수많은 곡해와 수많은 실수를 하며 살아갑니다. Context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축구를 하는데 축구를 하다가 눈앞에 있는 쇠기둥에 부딪칠 것 같아서 피하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상황은 그것이 제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우스웠을 것입니다.
심리테스트용 그림 중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귀부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할머니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해가 내가 보는 상황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Context, 이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변화와 성장과 성숙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억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진리가 상황 속에서 일치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진리다워지려면 진리와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살아야지만 진정한 성장과 진정한 변화와 진정한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Text와 Context와 Pretext라는 것을 시편 144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3절)’
사람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를 생각하고 계실까? 구약의 모든 말씀이 가지고 있는 질문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은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저자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내가 Text를 정한다고 할지라도 또 내가 이것이 있다, 없다 라고 꾸준하게 얘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Text,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듯이 지금 저자가 말합니다. 자신이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 인생을 돌아보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맞다고 생각하고 나의 욕구, 나의 필요 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쁨,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살았는데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계실까? 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든 똑같이 보고 계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Text가 바뀝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Text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거꾸로 사람에게 하나님이라는 Text는 늘 변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이해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안에서 느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내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이 진리가 있기를, 이 Text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미련하고 바로 설 수 없는 인생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4절)’
사람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공허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연구했는데 그것이 헛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도서 말씀처럼 헛되고 헛된 내 인생 가운데서도 또 실체가 없는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는 그림자처럼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의미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미 없어.’ 가 아니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헛것인 것 같은 인생 속에서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알고 있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Text가 하나님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1절)’
세상의 논리는 노력하면 된다고 얘기합니다. 소위 능동의 삶으로 살아가라고 얘기합니다. 오죽하면 교회 안에서도 적극적인 사고가 판을 칩니다. 하면 된다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능동이 아니면 수동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은 우리가 가진 Context가 피동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능동도 아니고 수동의 삶도 아닌 피동의 삶이 있습니다. 제가 제 손으로 컵을 집으면 능동입니다. 그리고 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컵을 집어 올리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손을 들어 컵을 집어 올리게 하시는 것, 이것이 피동의 삶입니다.
내 인생에서 내가 결정하고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인생의 헛것과 인생의 그림자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그것을 움직이고 있다면 이것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Text를 전제하고 있는 삶은 늘 하나님 앞에서 피동의 삶으로 피동의 Context를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잡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하나님이 내 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손을 들게 하시고 손가락을 들게 하셔서 싸우게 하시는데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게 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오고 사건이 오고 또 사람이 오는데 그 속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피동의 삶으로 살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데 여전히 우리는 능동으로 무엇인가 하려고하고 내가 무엇인가 판단해서 하나님이 하실 때 까지 기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 속에 미움도 있습니다. 전도서 말씀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피동의 삶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간증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해서 성공했다면 두루 다니며 자랑할 것이고 또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성공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마다 Context를 바라보고 있는 눈이 피동의 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때 까지 인내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모욕과 수치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생각과 내 기준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실 때 까지 기다리다가 하나님이 내 손을 잡아 들으시면 그 때 드는 것입니다. 그 때 힘을 빼야 합니다. 그 때 힘을 주고 있으면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고 무너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절)’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무찌르시는 일들이 벌어지고 인생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하나님 앞에 진정한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내 삶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Pretext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삶으로 살아내면 하나님이 진정한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의 욕구가 있고 나의 필요가 있고 나의 느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Text를 가지고 내 인생을 맡기는 피동의 삶을 살아가는 Context를 가지고 하나님이 마지막에 나를 승리자로 삼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기억을 통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고 하는 이 믿음 안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복되도다.(15절)’
자신의 욕구, 자신의 필요, 자신의 느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Text로 하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욕구가 내 느낌이 내 필요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욕구와 필요가 무엇일까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거룩한 욕구와 거룩한 필요와 거룩한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름길을 비책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욕구는 일상의 욕구 속에서 하나님을 Text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비밀의 말씀을 내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밀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Text로 삼아서 내 일상의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욕구와 거룩한 필요와 거룩한 느낌을 갖도록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삶입니다.
십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하나님과 더불어 한 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좋은 말만 늘 공적인 말만 하고 살아갈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십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생명의 떡을 맛보고 내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도 똑같이 경험하고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바다에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지어 사용이 불가하여 ‘십고’로 적었습니다.^^
<결단의 기도>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우리 인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이고
나의 삶의 전체이고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이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지는 이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2014.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