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 2. 사람이 아니라 (시편 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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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역사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신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을 해서 도를 닦든지 무엇을 깨닫든지 그 사람의 존재가 업그레이드되는 그래서 신이 되는 존재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운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 것, 우리가 상승하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것으로 가는 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유대인들은 늘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고 자기와 함께 더불어서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거룩이라고 하는 말씀은 늘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역사 속에서는 두 가지의 메시야가 있었습니다. 고난의 메시야와 영광의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고난의 메시야가 있고 사람이 하나님이 되시는 영광의 메시야가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또 하나님으로 오신 하나님 이 두 가지의 개념 또는 두 가지의 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유대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이 두 가지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메시야관은 역사 속에서 환상을 보고 꿈을 꾸었던 선지자들이 먼 곳에서 봤기 때문에 고난의 메시야와 영광의 메시야가 동시에 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멀리서 산봉우리를 볼 때 앞산과 뒷산이 동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이 역사라고 하는 시간을 바라볼 때 선지자들이 고난의 메시야와 영광의 메시야가 거의 동시에 오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고난의 메시야가 오면 바로 그는 영광의 메시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메시야를 봤을 때에 그들이 늘 꿈꿨던 것은 로마의 해방이었고 또는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그 영광의 메시야, 바로 그가 왕으로 오셔서 통치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 친구는 2천 년이 되고나서 보았을 때 두 가지의 관점으로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고난의 메시야가 따로 오고 영광의 메시야가 따로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고난의 메시야와 영광의 메시야가 다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고난의 메시야가 다시 영광의 메시야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갭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지금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고난의 메시야는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오신 하나님, 영광의 메시야는 공의와 두려움과 권위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 가운데 구원자로 오신 그 분이 고난의 메시야든 영광의 메시야든 늘 그것에 대해서 다르게 보고 있는 관점이 있다고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에 그 고난의 메시야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또 다른 영광의 메시야가 자신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전 세계에 군림하는 왕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여전히 고난의 메시야가 우리한테 있다는 것이고 고난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박종선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사람들한테 목사님의 형님이야기를 쭉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저도 들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궁금해 하니까 그 분들이 형님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박종선 목사님은 제 친구의 형님이신데 그 분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안 계신 삶을 사시다가 고생 끝에 두 형제가 목사가 된 그런 집안입니다. 삼형제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박종선 목사님의 형님이 집안을 위해서 목수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형님이 서른 살 정도 됐을 때에 결혼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형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울고 있는데 돌아가신 지 삼일 후에 다시 깨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뒤에 다시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형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다들 사람들이 형님얘기를 듣고 나서 화가나가지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막 뭐라고 했는데 제가 그 이야기를 쭉 들으면서 든 생각이 예수님은 어쩌면 성경에 쓰여 있는 이야기처럼 남의 이야기, 어떻게 보면 그냥 2천 년 전에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박종선 목사님의 형님의 이야기로 들으니까 생생하게 그 삶이 느껴지고 또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순간 마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억울한 삶을 살다가 갔을까? 정말 비참한 인생이다 저런 인생도 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분의 인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없이 공감했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억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도 영광을 누리지 못했던 인생을 사셨던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보면 복을 받지 못한 인생처럼 살았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한테 그분의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삶이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22편 1절에 보면 아주 유명한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에 네 번째 말씀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도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지고 가는 그 순간 속에서 주님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지만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던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예수님에게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리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모습, 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 가장 외로운 모습,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벼랑 끝에 서 있는 죽음 앞에 서 있는 그 위기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그 생명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주님은 멋있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어리석은 죽음, 이해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는 그 죽음 가운데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6절)’

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 뭘까? 생각해봤을 때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벌레입니다.’ 라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콘 버전으로 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벌레와 같은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인생,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인생으로 사셨던 분이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나 뚜렷하게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아는 지식, 인생을 아는 지식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거의 1년 동안을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해되지 않는 죽음 앞에 있으면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각자의 입장이 다 다릅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의 인생은 주님이 사셨던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몇 가지의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절)’

주님은 그 고난 가운데 상처 입은 치유자처럼 모든 상처 받은 사람들과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자로 오시기 위해서 스스로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메시야가 언제 오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랍비가 엘리야선지자에게 와서 메시야가 언제 오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선지자가 이미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 메시야가 성문 밖에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문 밖은 아파하고 슬퍼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소위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메시야인지 알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 곳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입어서 다 붕대로 감고 있는데 한 사람 자기 붕대를 풀어서 다른 사람을 싸매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메시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은 붕대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싸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파하고 슬퍼하고 절망가운데 있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히 5:8)’

두 번째는 주님이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가셔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 수 있을 만큼의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걸어가라고 하신 그 길을 순종함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얘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늘 어떤 것에 대해서 핑계하고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절)’

세 번째는 돕는 자로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인간의 가장 밑바닥, 종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위로자가 되셨고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의 본이 되셨고 그리고 약한 자를 돕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아, 아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하는 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교회 안에서 가끔 청소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청소 안 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배에 빠지거나 예배에 늦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우스갯소리로 우리 교인들은 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벌레이고 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 표현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지만 그것조차도 늘 잊어버리고 살 수밖에 없는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짐승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 짐승의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사람들의 평가, 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가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믿는 척하고 살아야 되는 너무나 가증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람들에 대해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왜 슬퍼합니까? 그것은 어쩌면 무엇인가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 저 사람 아는데 저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해? 실망이야.’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아니 내 자신도 내가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선악과의 나무로 정죄하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Knowing과 non-Knowing’

첫 번째 내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신앙은 알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다 모여서 삶의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이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했을 텐데.’ ‘나 같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또 나를 보면 나도 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서 내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 사람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돼.’ 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제가 목사로써 우리 지체들을 생각하면 때로는 다 자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에 다 안 듭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제가 마음에 안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 있는 우리들 속에서 서로 믿음으로 받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서로를 보면서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이 아니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 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한 번도 자기 인생 속에서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산 적이 없습니다. 자기 것을 추구하고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 속에서 그는 승리자라고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될 진정한 구원자라고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믿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을 쫓아다닙니다. 성공의 비결을 배우고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공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어쩌면 실패자의 모습이었고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벌레 보다 더 못한 인생을 사셨던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해되고 설명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지만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원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앞길, 1초 뒤에 하루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사람은 변화무쌍한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제 몸이 구로동에 익숙한 몸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알러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해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저도 나이가 드니까 알러지가 생겨서 이번에 효과 좋은 약을 두 가지 알았습니다. 지루텍은 코를 똟어 주고 용각산은 목이 뚫리게 해 주는 약인데 정말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나이가 드니까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시간이 지나니까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지 못하는 시간, non-Knowing의 시간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영원한 시간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에 서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자리에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계이름도 모르면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장조인지 단조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그 속에서도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소망이 아니라 로마서로 얘기하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보이는 것으로 믿고 가는 것, 그것이 소망입니다. 내가 지금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 속에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 알지 못하지만 이해되지 않지만 설명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자리가 영원한 시간으로 살아가는 그 공간, 그 자리로 주셨다고 하는 믿음, 그것이 부정 가운데서 가장 긍정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결혼은 정말 도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를 어떻게 알고 내가 정말 평생을 같이 살겠다고 결심을 할까? 그 신비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이 나오듯이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자기의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는 주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자신의 사명도 알고 계셨던 그 분이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알고 계셨던 그 분이
아니 하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자기의 삶의 울부짖음을 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내가 사람으로 살고자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그런 결정을 하고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 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야지만
주님이 나를 나 되게 하셔야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주님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지만 그 모름 가운데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희미하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나에게 주신 사람, 나에게 주신 시간,
나에게 주신 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그렇게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다 알고 다 설명이 돼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그저 묵묵하게 지켜내겠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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