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 (로마서 13:8-10, 시편 51:1-19)

로마서 13장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절)’ 라고 하는 말씀처럼 남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정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사랑의 논의가 있고 정의가 있습니다. 요한 1서에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맞지만 사랑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에는 여러 가지의 색깔과 모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 자체가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미를 세 가지로 얘기하면 첫 번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는 적극적 의미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사랑의 정의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소극적 의미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 율법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 또는 율법을 따라가야 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나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 전체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로마서 말씀 전체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절)’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로마서 전체를 보면서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있는 기능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 우리가 무엇인가 하고 있는 이 자체가 다 죄라고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가지고 있는 교만이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5장 20절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인해서 율법 자체는 그렇지 않지만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죄인의 마음이 아니라 의인의 마음을 가지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범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신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내가 알고는 있지만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은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사도바울은 인간의 악함을 얘기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얘기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곤고함을 얘기합니다.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있지만 내 육신으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나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죄를 더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죄를 깨끗하게 하러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범죄가 더하는 오히려 그런 척하고 또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더 세련되게 더 멋있게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내 모습이 율법 속에서 죄를 더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마침이라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떤 종교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로마서 13장 오늘 이 말씀까지 오면서 사도바울은 시작도 그리스도요 과정도 그리스도요 마지막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사랑의 빚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랑의 빚은 시편 51편의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율법의 완성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고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은 오늘 사도바울이 정의했듯이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생각과 자기  감정과 자기 의지가 다인 것처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울어도 나를 위해서 웁니다. 슬퍼도 절망해도 기뻐도 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자폐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생명, 한 생명을 위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런 고난 가운데 빠져서 살 수밖에 없는지, 내가 왜 이렇게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신나는지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 가운데 빠져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연습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철저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를 떠나서 남을 사랑하는 것, 아니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렇게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최고의 왕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다윗의 왕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다윗의 별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꿈꾸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스캔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파렴치한 사람이었고 자기의 권력을 가지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한 부패한 관리였습니다. 아마도 청문회를 했다면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사울왕과 같은 말로를 걷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자로 그 일생을 마쳤습니다. 오늘 시편 51편의 고백 가운데서 자신의 것을 고백하고 있는 이 마음속에 그 비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죄 가운데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의 죄의 모양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과(transgression)이고 하나는 죄악(iniquity)이고 하나는 죄(sin)입니다. 죄과는 하나님이 만드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때 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경계를 뛰어 넘고 살아갑니다. 또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곡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일 수도 있고 오지일 수도 있고, 망지일 수도 있습니다. 모르든, 잘 못 이해하든, 잊어버리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기준 속에서 그것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죄인데 죄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늘 자기는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섰고 하나님의 기준을 왜곡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 늘 빗나간 인생을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죄에서 태어난 ‘나’입니다. 죄의 통치가 사망의 법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또 다른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나’입니다. 죄의 유산을 가지고 또 다른 생명을 낳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죄입니다. 죄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다윗이 고백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우슬초는 출애굽의 사건에서 마지막 장자의 죽음의 사건 앞에서 죽음을 벗어난 방법입니다. 우슬초로 문지방에 피를 바른 집안은 장자의 죽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악과 죄과와 죄라고 하는 이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우슬초에 바른 피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오늘 다윗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피 바른 우슬초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한 심령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절)’ 

상한 심령, 저는 그것을 사랑의 빚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자기사고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을 알고 있는 사람,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 인생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가 있어야 된다고 고백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나를 떠나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여전히 내가 무엇인가 보고 있고, 내가 무엇인가 듣고 있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여전히 나 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가 죽을 때 너도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너무나 많은 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죽었다고 그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기독교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부를 보려고 한다면 열심히 보고 열심히 듣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앞만 보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다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것이 실제인 것처럼 아파하고 슬퍼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또 다른 공간,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통치가 있다고 얘기하고 계시는데 이곳에서 무엇인가 마음을 빼앗기고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 안에서 그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사랑의 빚이라고 하는 율법의 완성을 이루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죄인의 모습으로 서 있어야지만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다윗은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세 가지를 고백합니다. 

첫 번째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내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의 영은 나의 비참함을 보는 것입니다. 정직한 영이 내게 오면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나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이 정직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죽는 것, 자기부인으로 시작하지 않는 십자가는 다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또 다른 천국을 바라볼 때 마다 자기애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다 가짜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자기의 죽음이 없는 신앙, 자기의 죽음이 없는 종교,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탐욕이고 욕망을 채우려는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정직한 영이 우리 가운데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성령이 주시는 몸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마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 다른 영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육체로 부어 주셔서 우리의 몸이 주님의 것으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를 살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는 자기부인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의 눈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입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만지심,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오늘 우리 가운데 세 가지를 하라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눈으로 하고 말로 하고 서로 만지는 것을 통해서 하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도구를 주셨습니다. 눈으로 말로 또 만지시는 것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눈과 입과 모든 것들은 다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무엇인가 보는데 다 문제점만 봅니다. 사람의 눈이 얼마나 사악하냐하면 의인조차도 죄인으로 몰아서 죽이는 것이 사람의 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입니다. 네 눈이 죄를 범하면 그 눈을 빼고라도 하나님 앞에 가라는 것입니다. 눈을 뺀다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내 관점을 떠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떠나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하나님의 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겉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겉사람을 바라볼 때 마다 너무나 화가 나고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힘이 듭니다. 얼굴만 봐도 싫은 사람 있습니다. 내가 볼 때 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합니다. 무엇인가 할 때 마다 배신과 배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보지 않으면 우리가 그 영혼을 보지 않으면 아니 아버지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옳아도 의인이라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죽이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요즘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바로 열 받아서 싸울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고 내 스스로 기다리고 인내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내 말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술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입술인데 어떤 때는 징계의 말을 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축복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말은 인내하는 말이고 기다려주는 말이고 참고 견디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술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 됨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진리의 말을 한다는 것, 하나님의 입술로 하나님의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참고 견디고 기다려주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지셔서 다시 무릎을 일으키시는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안아주고 또 만져주는 것을 통해서 회복과 치유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질 때 마다 내가 관계할 때 마다 사망의 관계가 되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만지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입술과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사랑하라’ 는 것을 또 다른 율법으로 듣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 때문에 사랑하는 척하지 말고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것 때문에 아예 미워하고 아예 악을 행하고 살지 말고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 앞에 내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부터는 우리에게 하라는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또 다른 율법으로 들으면 그것이 사망의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내가 죄인으로 주님 앞에 머물러 있다면 성령이 내게 오셔서 성령의 눈과 성령의 입으로 성령의 손과 발로 우리를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게끔 만드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 죽었다 깨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 기적이 주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내어 놓고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에 나를 내어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가 여전히 죄과와 죄악과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면 
우리는 주님 앞에 사랑하는 자로 
사랑을 베푸는 자로 
섬기는 자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갈지자로 가고 있는 
허공에 주먹질 하고 살아가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정확하게 분명하게 그 푯대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상한 심령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내가 무엇을 할까? 
그 염려하는 마음이 주님을 만나는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으로 회복되어서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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