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라 (로마서 13:1-7, 창세기 34:1-31)

로마서 13장 1절부터 7절에 있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 세상을 보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3장은 굉장히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씀이었고 또 권력자들은 이 말씀을 이용하고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예정과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과 같은 그런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위로부터 오는 권세,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혼돈과 흑암과 공허를 하나님의 질서로 바꾸신 사건은 권위로부터 오는 질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는 거역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권위를 거부하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권위와 권위자는 조금 다른데 권위 속에 있는 권위자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권위자는 세상에 있든 교회에 있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불순종한다면 사역자들이 가지고 있는 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불순종은 우리가 지켜야 될 의무 내가 반드시 지켜야 될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3장 1절부터 7절에 있는 말씀은 하늘로부터 온 권위에는 복종과 순종의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종은 태도이고 순종은 행위입니다. 반드시 복종의 태도를 가지고 순종의 행위의 원리로 살아가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사회적 책임 또는 민족에 대한 책임 또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 세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관 또는 사회를 바라보는 권위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현실은 로마의 황제입니다. 로마의 황제로부터 만들어진 로마의 제도가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와 로마의 제도로부터 나오는 모든 정신적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시는 모든 권위자는 바로 하나님의 사역자이기 때문에 복종의 태도와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도 로마의 황제와 제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복종과 순종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의 황제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황제에게 재판의 절차를 통해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정당한 권리와 정당한 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로마 황제의 박해와 핍박과 순교자의 피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권위는 인정하고 복종했지만 황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정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역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것을 채우려고 하는 황제의 논리와 황제의 통치에는 불순종했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든 권위자에 대해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고 한다면 아마도 사도바울 그 자신도 로마의 황제에게 속박되어서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사람으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노예제도 또는 지금 말씀하고 있는 국세나 관세의 의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노예제도 폐지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국세나 관세에 대해서 그 의무를 다 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빌레몬서 내용처럼 노예를 영적인 아들로 삼고 있는 것이 사도바울입니다. 로마교회를 향해서 국세나 관세의 의무를 다하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더해서 연보로 예루살렘교회를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그 권위에 대해서는 내가 복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두 가지의 갈림길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권위와 권위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세상이든 교회이든 상관없이 복종과 순종이 하나님이 주시는 태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권위자인 부모는 생명을 섬기는 것이고 자녀에게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이 복종과 순종입니다. 또 우리가 교회의 지도자, 세상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고 믿음이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로 권위를 휘두르고 있는 폭군에 대해서는 복종의 태도는 버리지 않지만 순종하지 않고 참된 양심을 가지고 선을 행하고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디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을 행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창세기 34장에 가서 뜬금없이 야곱의 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디나의 사건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아주 귀한 딸인데 그 딸이 세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을 당합니다. 

‘디나가 그 땅에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절)’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고 알고 싶어서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겜의 아들이 디나를 강간합니다. 성폭력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보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은 야곱의 아들들, 시므온과 레위가 보복을 합니다. 살인과 폭력으로 비화되고 사건은 확대됩니다. 디나라는 한 여인의 죽음의 사건이 세겜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죽음으로 발전하고 확대되었습니다. 

‘너희 때문에 나는 이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즈인들에게 상종할 수 없는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30절)’ 

악취를 내게 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이 말씀은 ‘너희 때문에 나는 이 지방에 산느 가나안 사람과 브리즈인들에게 상종할 수 없는 추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고백이었습니다. 성폭력사건이 살인과 폭력의 사건으로 발전했던 이 사건은 그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고 그들은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던 그 부분에 대해서 야곱이 오히려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추한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4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세겜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1절까지 말씀을 다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폭력의 사건이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고 하는 단순한 사건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성경의 기자는 굉장히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겜의 진정성에 대해 계속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강간에 대해서 그 폭력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또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세겜은 이스라엘의 딸과 통혼합니다. 예물을 가지고 정식으로 혼인요청을 하고 또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라고 하는 유대인들만 가지고 있었던 종교의식을 합니다. 결혼하기 위해 물질적인 대가를 지불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것까지도 바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들이 할례의 방식을 통해서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있는 그 살인의 현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세 존재의 침묵이 있습니다. 하나는 디나의 침묵입니다. 디나는 세겜과 같이 있을 때도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을 때도 디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야곱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아니라 아들이 돌아올 때 까지 침묵하고 또 아들이 행한 것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너희가 나를 상종할 수 없는 추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자조적인 고백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34장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묻지도 않습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묻고 하나님의 것을 이야기했던 그들인데 하나님 앞에 침묵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디나와 야곱과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에서 그들은 더 큰 폭력으로 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을 13절 27절 31절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이가 더럽혀졌기 때문에 폭력과 살인이 정당하다고 계속 얘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추한 인간의 폭력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세상을 향해서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늘 옳았다고 얘기합니다. 가끔 목회자들이 모여서 천주교나 불교나 어떤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복지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고 하는 얘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늘 욕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1%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고 99%는 어려운 자리에게 어렵게 목회를 하고 있고 또 자기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이가 더렵혀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형제들에게 정의를 말하는 것이 공의를 세우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한 폭력 보다 더 큰 폭력을 가지고 종교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처럼 더 큰 폭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비난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또 다시 폭력의 주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죄하고 외면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더 핍박하고 더 큰 폭력으로 죽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솔직히 제가 창세기 기자라면 34장은 성경에서 빼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추한 인간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는 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성경에 넣었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정당성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로움조차도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보면 세겜 사람들이 훨씬 더 예의바르고 사건 이후의 그들의 삶은 야곱의 아들들보다도 더 존중하고 더 복종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 때문에 더 예의가 없고 더 비굴하고 더 폭력적이고 더 자기의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고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데도 외곬수의 사랑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좁은 관점으로 자기 것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내가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큰 보복을 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에서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종의 태도를 가지고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악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권위자를 무조건 존경하고 무조건 따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종의 태도는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존중하고 좀 더 권위를 인정하고 좀 더 사랑하는 것에 애쓰고 있는 모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더 폭력적인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와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민족과 이 시대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들끼리 모여서 공부를 하는데 맨날 세상이 얼마나 악한 지를 쭉 얘기하다가 마지막 결론으로 늘 하는 얘기가 이민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민 가면 그 나라도 똑같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외지에서 8년을 살아봤는데 여기에서 조금 못 사는 게 낫지 그곳은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복종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늘 거역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도 세상의 구조 세상의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이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또 지금 현재 속에서 아니 이제는 영원까지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가정에 대해서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교회와 내 일터와 내 민족에 대해서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세상과 다르게 세상 보다 더 큰 사랑으로 세상의 방법과 수단을 넘어서 생명의 법으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아들들처럼 가장 거룩한 할례의 요구를 가장 폭력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가 예배하는 것 말씀을 듣는 것 그 자체가 오늘 나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명을 생명의 법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기위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아니 앞으로의 10년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혹독한 고난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너무나 예의바르고 더 존중하고 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될지 모릅니다. 우리도 성질이 있고 우리도 열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세상 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세상의 방법과 수단을 뛰어넘어서 살아야 될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침묵하고 분노하고 어떤 때는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지혜를 가지고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세상의 말과 세상의 사람들보다도 못한 그런 삶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공동체는 모여서 수다 떨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친목단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세상의 원칙과 세상의 가치를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더 큰 폭력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여인의 죽음이 또 다시 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죽음의 역사를 끊어버리고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서도 선을 행하고 서로에게 복종의 태도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얘기합니다. 
누이 디나를 더럽혔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우리가 행동하고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아버지를 수치로 아버지를 추한 인간으로 
대우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지 않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권위자들을 향해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세상의 가치 속에 
하나님의 가치가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 안에서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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