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1
조회
2159
우리가 원복을 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존재로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본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본질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내용이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동시에 사람이라는 존재는 선한 것을 가지고 있고 선한 것을 추구하고 살 수 있는 존재이고 그렇지만 다림줄이라고 하는 양 쪽의 각각 다른 기준 때문에 다르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부터는 어떻게 하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다르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죄가 또 다른 핵심일 수 있습니다. 원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지만 원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질(self)과 그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ego가 있습니다. 그 밖에 가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인격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보이는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양은 모양일 뿐이고 그 모양 속에 ego가 있습니다. 사건이나 사람이나 상황을 만나는 ‘나’, 그것을 대하는 ‘나’가 있는 것입니다.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별것도 아닌 문제인데 반응이 크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 큰 문제인데 침착하게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자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반응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극이 왔을 때 반응할 수 있는 ‘나(self)’가 있다면 self 까지 들어오는데 장애물이 너무 많습니다. 인격적인 장애일 수도 있고 ego를 통과하다보니까 문제가 문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서 볼 수도 있습니다. 반응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시에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 가서 화풀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강이 힘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화풀이를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합니다. 남편하고 싸워서 화가 나면 아이한테 퍼붓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해봤는데 그러기가 쉽습니다. 상대방에게 약간의 압박도 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서 최초로 제 아내가 무섭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싸울 때 대부분 나이스하게 싸우지 않고 적의 심장에 꽂을 비수를 찾습니다. 비수가 뭘까를 생각해보니까 엄마들한테는 아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고 있는 애를 뺏으면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애는 제 것이라고 생각해서 빼앗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더 무서운 얼굴로 애를 다시 뺏으면서 니가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이 사람이 진짜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표정이 진짜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미안해.’ 했습니다. 여자는 약한데 엄마는 강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관계 속에서 내가 자극을 받고 반응을 하는 것도 다르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매일 속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 속에서 내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휘재가 진행했던 프로 중에 ‘그래 결심했어.’ 하고 양 쪽의 삶을 다 살아보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ego나 패르소나가 뭘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도 모르게 배운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신뢰할 만한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신뢰할 때는 신뢰의 마음을 별로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체질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서 배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중권씨가 MBN에서 하는 포럼을 하는 것을 시청했습니다. 진중권씨가 하는 얘기가 우리나라 전체를 꿰뚫으면서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문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 아내가 영어를 전공했는데 미국에서 영어석사를 했습니다. 학사를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석사를 하는데 대부분이 영어교사들입니다. 제 아내는 대학원을 바로 들어가고 저는 영어가 안 돼서 2년 동안 영어코스를 했습니다. 제 담당 영어교수가 제가 글을 쓰거나 하면 제 아내에게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문법적지식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미국 애들은 그냥 언어로 사용은 하지만 설명해 낼 수가 없는데 우리는 문법으로 영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문법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최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있지만 우리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국가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주의입니다. 다 용서가 돼도 일본은 용서가 안 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목사가 안 되겠다고 하면서 매일 술 마시고 놀고 하니까 친한 친구 중에 하나가 경희대 성악과를 갔는데 C.C.C.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회개하도록 하고 자기랑 결혼해서 일본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단 회개하라는 말부터 싫었습니다. 그리고 왜 일본에 가야하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하루만 C.C.C.집회에 같이 가서 사람들하고 얘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니까 거절을 못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을 확 받게 했습니다. 그들이 대학교 때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자꾸 저한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제가 하나님이 왜 없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계속 다른 간사들을 데리고 와서 제 논리를 꺾으려고 하다가 울그락 불그락해졌습니다. 새벽 4시에 그 곳을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근거를 댈 만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신학교에 간 사람들은 매일 성경책만 보고 있는 줄 압니다. 전혀 아닙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성경을 안 보는 학교 중에 하나입니다. 철학을 공부합니다. 옛날에는 철학과 신학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17세기 계몽주의 이후로부터는 철학이 신학을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신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신학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매일 철학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한창 유행했던 철학 중에 하나가 과정철학이었습니다. 과정철학이란 존재가 없고 존재는 늘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규범화된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도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존철학,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안 봤습니다.
미국에서 1.5세 목사님들과 같이 개척을 했는데 그 분들은 성경 얘기를 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통일신학을 전공했는데 통일문제를 얘기하면 누구보다도 얘기를 잘 할 수 있는데 저희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저에게 통일문제에 대해 물어보지 않습니다. 도대체 내가 목사인데 목사가 성경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에 가서 6년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성경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만 있었으면 지금도 운동권 목사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살 때부터 10년 동안의 삶의 원칙이 술을 먹지 않는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먹어도 목숨을 걸고 먹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술을 안 마시니까 저를 알던 옛날 친구들은 변절자라고 배신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경제우선주의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통해서 정보화로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의식은 전근대적입니다. 의식이 자라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치를 하는 통치자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를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것이 전근대적 방법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진중권씨의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가 됐습니다. 산업화의 핵심이 자기 몸이 산업화에 맞는 기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매스게임입니다. 북한과 남한이 똑같이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북한은 정보화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남한은 넘어갔는데 문제는 의식은 전근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식 안에 경제우선주의와 서열주의가 있다고 합니다. 서열을 따지다 보니까 동역이 안 됩니다. 늘 상명하복에 충실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군대문화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책에서는 진중권씨의 주장에 하나를 덧붙이는데 가족이기주의입니다. 혈연, 학연, 지연에 충실한 것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연’은 내가 결정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 문화적 문법이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 때 반드시 공약으로 출현을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 우리 지역에 최고의 학교를 만들겠다. 이런 공약들을 내세웁니다.
<스타워즈 7>을 보면서 너무 불편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자가 남자를 이겨먹는 것이 불편했고 두 번째는 백인 여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점이 불편했다고 했습니다. 흑인 남자를 어떻게 살아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파이더맨> 1인지 2인지 그 영화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여주인공을 왜 구해줘야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기가 정말 힘듭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이 오는 순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욕망이 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욕망으로 바뀌면 욕망은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 보다도 더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욕망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고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고 있어야 된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인데 자존심을 세웁니다. 공주와 공주병의 차이가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왕자와 왕자병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도사 때 제가 ‘잘 생긴 전도사님 봐야지?’라고 하면 아이들이 싫은척 하면서도 좋아하고 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말발이 센 아이가 돌아다니면서 우리교회 전도사님은 왕자병에 걸렸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서 ‘내가 너 한테만 얘기하는데 내가 원래 왕자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왕자암이 걸렸다고 돌아다니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왕자와 왕자병의 차이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왕자병은 다른 애가 왕자가 되면 안 됩니다. 자기만 왕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왕자는 다른 나라 왕자도 인정합니다. 공주는 다른 나라의 공주도 공주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주병은 나만 공주여야 합니다. 자존심도 그런 것입니다. 자존을 인정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의 자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존감은 내가 자존감을 갖듯이 다른 사람도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욕구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멀쩡한 사람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10년 동안 있다가 나온 분을 만났는데 누가 봐도 그 분은 정말 똑똑한 분인데 왜 10년 동안 그곳에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교주가 1번 2번 3번 4번 교인마다 암묵적으로 순서를 정해놓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맨 앞에 있는 방석만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넘버 1이 되려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왜 중요하지? 하고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넘버1의 방석 하나 밖에 안 보였는데 객관적으로 보니까 넘버1이 왜 중요한지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도 보면서 인정해 주면 괜찮은 것인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욕망으로 바뀌어서 저 사람을 이겨먹어야 되고 저 사람 보다 조금 더 낫고 괜찮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ego 라고 하는 것 자체는 본질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면도 쓰지 않고 맨얼굴을 보여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면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가면이 자신을 드러내주는 가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거나 경쟁하려고 하고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가면이라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자존심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것들이 계속 역동 안에서 fact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fact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 남자라는 고정관점이 있고 백인, 흑인이라는 고정관념도 나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남자와 여자라는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와’라고 했습니다. B.C 2500년 전에 남자와 여자라는 말은 엄청난 동등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투표를 하기 시작한 것이 100년이 채 안됐습니다.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노예폐지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감옥에 갔는데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 주인이 빌레몬인데 그에게 돈을 훔치고 도망친 노예를 위해서 자기가 돈을 갚아주겠다고 하고 그를 빌레몬의 동역자로 세우라고 합니다. 노예를 동역자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도 A.D100년도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예를 동역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뛰어넘는 사고를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다 물질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 self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내가 본질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사고, 유물론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는 다 영적인 것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맑스가 사람이라는 존재가 물질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사고가 변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귀신을 본 제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밥 굶지 않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굶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약해지면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영적으로도 약해집니다. 요즘 최첨단의 심리과학에서는 뇌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뇌에 자극을 주면 어떤 기억은 없어질 수도 있고 어떤 것은 기억이 날 수도 있고 또 안 하던 행동을 하게도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고를 당해서 우울증이 심해지다 보니까 뇌의 일부분이 바뀌었다고도 합니다. 뇌가 바뀌니까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이 우울증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우울감은 사람들에게 원래 다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에도 갱년기 증상에 대해서 나왔지만 몸이 바뀌니까 사람의 심리도 바뀌고 생각도 바뀝니다. 전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제로 풀고 그것을 다르게 본 것이 맑스였고 유물론적세계관에 대해서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사고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주의는 개인주의로 가야 합니다. 개인이 살아야 국가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장 활발하게 창조성을 가지고 있어야 국가도 창조성이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우선주의가 아니라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서열주의가 아니라 네트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기주의가 아니라 좀 더 높은 차원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어야 이기주의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다.
선입견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왜곡된 사고를 없애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잘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배워서 더 나쁜 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선입견과 자존심과 물질적 사고를 벗어나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노력할 때 마다 내 위에 점점 짐이 많아집니다. 내 삶의 무게로 오는 것입니다. 짐이 많아질수록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다 차력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무게를 버티라는 것입니다. 100장까지는 버티다가 101장이 올려놓는 순간 못 버티겠다고 벌떡 일어납니다. 인생 피해서 살 수 없습니다.
제가 40에 둘째를 낳았는데 30대에 낳은 아이와 40대에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차이가 납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도 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애랑 같이 자고 같이 눈을 뜨면 가장 편할 텐데 아이가 잘 때 내가 놀고 아이가 놀 때 내가 졸리면 정말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빠의 마음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우리에게 계속 옵니다.
미국에 살던 사람들이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시’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관계를 하는 순간에 죽을 것 같으니까 아예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하나는 관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이들 교육 때문입니다. 피하려고,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관계입니다. 30년을 벽을 보고 수련을 하고서 나오다가 문지방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려고 하니까 욕이 나와서 다시 30년 수련에 들어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인생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100장이 올라오고 200장이 올라와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죽어야지만 삶의 무게가 오지 않습니다. 땅 속에 쳐 박혀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오고 상황이 오고 사람이 와도 죽으면 끝입니다. 내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살려고 하는 순간에 살겠다고 뛰쳐나옵니다.
어제 만난 한 가난한 교회 사모님이 25만 원짜리 목도리를 세일하고 세일해서 싸게 샀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잊어버리고 나서 내 죄 때문인지 조상의 죄 때문인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목도리 없어도 사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다른 기쁨이 있었다고 합니다. 잃어버림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리지 않으면 은혜를 모릅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존감을 가져야지 생각하고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는 계속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쌓이고 쌓여서 갑자기 폭발합니다.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에 또 후회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됩니다.
죽는다는 것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87년에 난지도에 취재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밀리고 밀려서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쓰레기더미에 올라가서 쓰레기를 주워서 먹고 삽니다. 그곳에도 구역이 있는데 압구정쓰레기, 구로동쓰레기 구역이 있습니다. 압구정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다른 곳과는 다릅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구역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갔더니 고기를 주워서 구워 먹습니다. 저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압구정쓰레기와 구로동쓰레기를 두고 서로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면서 기뻐하는데 결국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매일 세수하고 매일 손 씻고 그래도 쓰레기더미에 있는 것입니다. 씻어도 안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영업비밀인데 우리가 난지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인생 다 슬픈 것입니다. 매일 샤워해도 더럽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뭐가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은 똑같이 난지도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았지만 분명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 곳에서 사는 이유,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다른 뜻과 다른 의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가는 인생이 아니라 뭔가 의미가 있는 인생이고 다 영적인 가치가 있어서 난지도에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찾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먼지가 묻었느냐 삶의 무게가 있느냐 또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굳이 애쓰며 사는 것은 죽었다 깨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난지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일 슬퍼합니다. 또 종교로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매일 눈 감고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죽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권리를 포기하고, 짐승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또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계속 자신을 속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지 그 안에서 진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어두움에 가기 싫어합니다. 어둠이 내가 짐승이라는 것, 권리가 없다는 것, ego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야지 있게 됩니다. 어느 순간 선입견이 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선입견을 잡는 순간 그것이 희망이고 소망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이 A라면 A에게 5천만 원이 있었습니다. B는 10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달에 십일조를 천만 원 하는 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친합니다. A가 저한테 와서 B에게 빌려도 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제가 그 문제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냥 망하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5천만 원을 갚아야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A한테 가서 망하셔야 된다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진짜 절망하고 갔습니다. B한테는 절대 돈 빌려주지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A하고 저는 원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3년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 때는 제 얘기가 죽었다 깨도 이해가 안 됐는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분은 돈을 너무 쉽게 벌었고 돈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겠다고 얘기했는데 실제로는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그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것이고 방법 면에서도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것이라는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물질관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어야지 진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육신의 죽음 앞에서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다 시한부인생입니다. 만약에 한 달 밖에 못 산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매일 여기에 관심이 있어서 자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살았고 여전히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고 있고 소유가 달라지면 인생이 변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돈 벌어서 30평짜리 아파트를 샀는데 다음 날 죽습니다. 내가 진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무게가 아니라 인생의 책임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입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내가 반응하지 않고 생명에만 반응하고 사는 것입니다. 진짜 인생의 끝에 가야 합니다. 40인생 지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원래 40이 넘어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드시 통과해 봐야지만 종교에 의미가 생깁니다. 40이 넘었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피터팬 증후군이 있든지 아니면 인생을 외면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죽음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혔을 때 제 인생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스무 살 때 까지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갔더니 영어가 안 되니까 유치원생도 안 됩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사회였습니다. 거기다 돈도 없고 학교도 안 됐습니다. 제 인생 죽음의 시간 속에서 제가 다시 깨달아진 것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제가 말씀을 전하면 우리나라가 발칵 뒤집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하면 몇 천 명 몇 만 명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인도 골라서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지도 않고 유명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 한 번 또 죽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유명하지 않아도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너무 재미있게 즐겁게 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세상 그냥 난지도구나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원죄가 우리인생 난지도라는 것입니다.
2016. 1. 21
그런 의미에서 원죄가 또 다른 핵심일 수 있습니다. 원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지만 원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질(self)과 그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ego가 있습니다. 그 밖에 가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인격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보이는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양은 모양일 뿐이고 그 모양 속에 ego가 있습니다. 사건이나 사람이나 상황을 만나는 ‘나’, 그것을 대하는 ‘나’가 있는 것입니다.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별것도 아닌 문제인데 반응이 크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 큰 문제인데 침착하게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자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반응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극이 왔을 때 반응할 수 있는 ‘나(self)’가 있다면 self 까지 들어오는데 장애물이 너무 많습니다. 인격적인 장애일 수도 있고 ego를 통과하다보니까 문제가 문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서 볼 수도 있습니다. 반응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시에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 가서 화풀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강이 힘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화풀이를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합니다. 남편하고 싸워서 화가 나면 아이한테 퍼붓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해봤는데 그러기가 쉽습니다. 상대방에게 약간의 압박도 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서 최초로 제 아내가 무섭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싸울 때 대부분 나이스하게 싸우지 않고 적의 심장에 꽂을 비수를 찾습니다. 비수가 뭘까를 생각해보니까 엄마들한테는 아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고 있는 애를 뺏으면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애는 제 것이라고 생각해서 빼앗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더 무서운 얼굴로 애를 다시 뺏으면서 니가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이 사람이 진짜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표정이 진짜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미안해.’ 했습니다. 여자는 약한데 엄마는 강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관계 속에서 내가 자극을 받고 반응을 하는 것도 다르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매일 속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 속에서 내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휘재가 진행했던 프로 중에 ‘그래 결심했어.’ 하고 양 쪽의 삶을 다 살아보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ego나 패르소나가 뭘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도 모르게 배운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신뢰할 만한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신뢰할 때는 신뢰의 마음을 별로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체질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서 배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중권씨가 MBN에서 하는 포럼을 하는 것을 시청했습니다. 진중권씨가 하는 얘기가 우리나라 전체를 꿰뚫으면서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문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 아내가 영어를 전공했는데 미국에서 영어석사를 했습니다. 학사를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석사를 하는데 대부분이 영어교사들입니다. 제 아내는 대학원을 바로 들어가고 저는 영어가 안 돼서 2년 동안 영어코스를 했습니다. 제 담당 영어교수가 제가 글을 쓰거나 하면 제 아내에게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문법적지식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미국 애들은 그냥 언어로 사용은 하지만 설명해 낼 수가 없는데 우리는 문법으로 영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문법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최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있지만 우리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국가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주의입니다. 다 용서가 돼도 일본은 용서가 안 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목사가 안 되겠다고 하면서 매일 술 마시고 놀고 하니까 친한 친구 중에 하나가 경희대 성악과를 갔는데 C.C.C.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회개하도록 하고 자기랑 결혼해서 일본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단 회개하라는 말부터 싫었습니다. 그리고 왜 일본에 가야하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하루만 C.C.C.집회에 같이 가서 사람들하고 얘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니까 거절을 못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을 확 받게 했습니다. 그들이 대학교 때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자꾸 저한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제가 하나님이 왜 없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계속 다른 간사들을 데리고 와서 제 논리를 꺾으려고 하다가 울그락 불그락해졌습니다. 새벽 4시에 그 곳을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근거를 댈 만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신학교에 간 사람들은 매일 성경책만 보고 있는 줄 압니다. 전혀 아닙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성경을 안 보는 학교 중에 하나입니다. 철학을 공부합니다. 옛날에는 철학과 신학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17세기 계몽주의 이후로부터는 철학이 신학을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신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신학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매일 철학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한창 유행했던 철학 중에 하나가 과정철학이었습니다. 과정철학이란 존재가 없고 존재는 늘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규범화된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도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존철학,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안 봤습니다.
미국에서 1.5세 목사님들과 같이 개척을 했는데 그 분들은 성경 얘기를 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통일신학을 전공했는데 통일문제를 얘기하면 누구보다도 얘기를 잘 할 수 있는데 저희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저에게 통일문제에 대해 물어보지 않습니다. 도대체 내가 목사인데 목사가 성경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에 가서 6년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성경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만 있었으면 지금도 운동권 목사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살 때부터 10년 동안의 삶의 원칙이 술을 먹지 않는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먹어도 목숨을 걸고 먹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술을 안 마시니까 저를 알던 옛날 친구들은 변절자라고 배신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경제우선주의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통해서 정보화로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의식은 전근대적입니다. 의식이 자라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치를 하는 통치자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를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것이 전근대적 방법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진중권씨의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가 됐습니다. 산업화의 핵심이 자기 몸이 산업화에 맞는 기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매스게임입니다. 북한과 남한이 똑같이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북한은 정보화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남한은 넘어갔는데 문제는 의식은 전근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식 안에 경제우선주의와 서열주의가 있다고 합니다. 서열을 따지다 보니까 동역이 안 됩니다. 늘 상명하복에 충실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군대문화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책에서는 진중권씨의 주장에 하나를 덧붙이는데 가족이기주의입니다. 혈연, 학연, 지연에 충실한 것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연’은 내가 결정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 문화적 문법이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 때 반드시 공약으로 출현을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 우리 지역에 최고의 학교를 만들겠다. 이런 공약들을 내세웁니다.
<스타워즈 7>을 보면서 너무 불편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자가 남자를 이겨먹는 것이 불편했고 두 번째는 백인 여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점이 불편했다고 했습니다. 흑인 남자를 어떻게 살아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파이더맨> 1인지 2인지 그 영화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여주인공을 왜 구해줘야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기가 정말 힘듭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이 오는 순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욕망이 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욕망으로 바뀌면 욕망은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 보다도 더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욕망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고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고 있어야 된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인데 자존심을 세웁니다. 공주와 공주병의 차이가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왕자와 왕자병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도사 때 제가 ‘잘 생긴 전도사님 봐야지?’라고 하면 아이들이 싫은척 하면서도 좋아하고 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말발이 센 아이가 돌아다니면서 우리교회 전도사님은 왕자병에 걸렸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서 ‘내가 너 한테만 얘기하는데 내가 원래 왕자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왕자암이 걸렸다고 돌아다니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왕자와 왕자병의 차이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왕자병은 다른 애가 왕자가 되면 안 됩니다. 자기만 왕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왕자는 다른 나라 왕자도 인정합니다. 공주는 다른 나라의 공주도 공주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주병은 나만 공주여야 합니다. 자존심도 그런 것입니다. 자존을 인정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의 자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존감은 내가 자존감을 갖듯이 다른 사람도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욕구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멀쩡한 사람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10년 동안 있다가 나온 분을 만났는데 누가 봐도 그 분은 정말 똑똑한 분인데 왜 10년 동안 그곳에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교주가 1번 2번 3번 4번 교인마다 암묵적으로 순서를 정해놓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맨 앞에 있는 방석만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넘버 1이 되려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왜 중요하지? 하고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넘버1의 방석 하나 밖에 안 보였는데 객관적으로 보니까 넘버1이 왜 중요한지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도 보면서 인정해 주면 괜찮은 것인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욕망으로 바뀌어서 저 사람을 이겨먹어야 되고 저 사람 보다 조금 더 낫고 괜찮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ego 라고 하는 것 자체는 본질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면도 쓰지 않고 맨얼굴을 보여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면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가면이 자신을 드러내주는 가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거나 경쟁하려고 하고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가면이라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자존심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것들이 계속 역동 안에서 fact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fact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 남자라는 고정관점이 있고 백인, 흑인이라는 고정관념도 나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남자와 여자라는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와’라고 했습니다. B.C 2500년 전에 남자와 여자라는 말은 엄청난 동등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투표를 하기 시작한 것이 100년이 채 안됐습니다.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노예폐지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감옥에 갔는데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 주인이 빌레몬인데 그에게 돈을 훔치고 도망친 노예를 위해서 자기가 돈을 갚아주겠다고 하고 그를 빌레몬의 동역자로 세우라고 합니다. 노예를 동역자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도 A.D100년도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예를 동역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뛰어넘는 사고를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다 물질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 self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내가 본질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사고, 유물론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는 다 영적인 것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맑스가 사람이라는 존재가 물질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사고가 변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귀신을 본 제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밥 굶지 않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굶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약해지면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영적으로도 약해집니다. 요즘 최첨단의 심리과학에서는 뇌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뇌에 자극을 주면 어떤 기억은 없어질 수도 있고 어떤 것은 기억이 날 수도 있고 또 안 하던 행동을 하게도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고를 당해서 우울증이 심해지다 보니까 뇌의 일부분이 바뀌었다고도 합니다. 뇌가 바뀌니까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이 우울증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우울감은 사람들에게 원래 다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에도 갱년기 증상에 대해서 나왔지만 몸이 바뀌니까 사람의 심리도 바뀌고 생각도 바뀝니다. 전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제로 풀고 그것을 다르게 본 것이 맑스였고 유물론적세계관에 대해서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사고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주의는 개인주의로 가야 합니다. 개인이 살아야 국가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장 활발하게 창조성을 가지고 있어야 국가도 창조성이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우선주의가 아니라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서열주의가 아니라 네트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기주의가 아니라 좀 더 높은 차원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어야 이기주의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다.
선입견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왜곡된 사고를 없애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잘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배워서 더 나쁜 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선입견과 자존심과 물질적 사고를 벗어나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노력할 때 마다 내 위에 점점 짐이 많아집니다. 내 삶의 무게로 오는 것입니다. 짐이 많아질수록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다 차력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무게를 버티라는 것입니다. 100장까지는 버티다가 101장이 올려놓는 순간 못 버티겠다고 벌떡 일어납니다. 인생 피해서 살 수 없습니다.
제가 40에 둘째를 낳았는데 30대에 낳은 아이와 40대에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차이가 납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도 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애랑 같이 자고 같이 눈을 뜨면 가장 편할 텐데 아이가 잘 때 내가 놀고 아이가 놀 때 내가 졸리면 정말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빠의 마음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우리에게 계속 옵니다.
미국에 살던 사람들이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시’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관계를 하는 순간에 죽을 것 같으니까 아예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하나는 관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이들 교육 때문입니다. 피하려고,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관계입니다. 30년을 벽을 보고 수련을 하고서 나오다가 문지방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려고 하니까 욕이 나와서 다시 30년 수련에 들어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인생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100장이 올라오고 200장이 올라와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죽어야지만 삶의 무게가 오지 않습니다. 땅 속에 쳐 박혀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오고 상황이 오고 사람이 와도 죽으면 끝입니다. 내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살려고 하는 순간에 살겠다고 뛰쳐나옵니다.
어제 만난 한 가난한 교회 사모님이 25만 원짜리 목도리를 세일하고 세일해서 싸게 샀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잊어버리고 나서 내 죄 때문인지 조상의 죄 때문인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목도리 없어도 사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다른 기쁨이 있었다고 합니다. 잃어버림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리지 않으면 은혜를 모릅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존감을 가져야지 생각하고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는 계속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쌓이고 쌓여서 갑자기 폭발합니다.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에 또 후회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됩니다.
죽는다는 것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87년에 난지도에 취재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밀리고 밀려서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쓰레기더미에 올라가서 쓰레기를 주워서 먹고 삽니다. 그곳에도 구역이 있는데 압구정쓰레기, 구로동쓰레기 구역이 있습니다. 압구정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다른 곳과는 다릅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구역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갔더니 고기를 주워서 구워 먹습니다. 저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압구정쓰레기와 구로동쓰레기를 두고 서로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면서 기뻐하는데 결국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매일 세수하고 매일 손 씻고 그래도 쓰레기더미에 있는 것입니다. 씻어도 안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영업비밀인데 우리가 난지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인생 다 슬픈 것입니다. 매일 샤워해도 더럽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뭐가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은 똑같이 난지도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았지만 분명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 곳에서 사는 이유,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다른 뜻과 다른 의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가는 인생이 아니라 뭔가 의미가 있는 인생이고 다 영적인 가치가 있어서 난지도에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찾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먼지가 묻었느냐 삶의 무게가 있느냐 또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굳이 애쓰며 사는 것은 죽었다 깨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난지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일 슬퍼합니다. 또 종교로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매일 눈 감고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죽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권리를 포기하고, 짐승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또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계속 자신을 속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지 그 안에서 진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어두움에 가기 싫어합니다. 어둠이 내가 짐승이라는 것, 권리가 없다는 것, ego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야지 있게 됩니다. 어느 순간 선입견이 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선입견을 잡는 순간 그것이 희망이고 소망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이 A라면 A에게 5천만 원이 있었습니다. B는 10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달에 십일조를 천만 원 하는 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친합니다. A가 저한테 와서 B에게 빌려도 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제가 그 문제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냥 망하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5천만 원을 갚아야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A한테 가서 망하셔야 된다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진짜 절망하고 갔습니다. B한테는 절대 돈 빌려주지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A하고 저는 원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3년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 때는 제 얘기가 죽었다 깨도 이해가 안 됐는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분은 돈을 너무 쉽게 벌었고 돈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겠다고 얘기했는데 실제로는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그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것이고 방법 면에서도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것이라는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물질관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어야지 진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육신의 죽음 앞에서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다 시한부인생입니다. 만약에 한 달 밖에 못 산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매일 여기에 관심이 있어서 자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살았고 여전히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고 있고 소유가 달라지면 인생이 변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돈 벌어서 30평짜리 아파트를 샀는데 다음 날 죽습니다. 내가 진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무게가 아니라 인생의 책임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입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내가 반응하지 않고 생명에만 반응하고 사는 것입니다. 진짜 인생의 끝에 가야 합니다. 40인생 지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원래 40이 넘어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드시 통과해 봐야지만 종교에 의미가 생깁니다. 40이 넘었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피터팬 증후군이 있든지 아니면 인생을 외면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죽음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혔을 때 제 인생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스무 살 때 까지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갔더니 영어가 안 되니까 유치원생도 안 됩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사회였습니다. 거기다 돈도 없고 학교도 안 됐습니다. 제 인생 죽음의 시간 속에서 제가 다시 깨달아진 것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제가 말씀을 전하면 우리나라가 발칵 뒤집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하면 몇 천 명 몇 만 명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인도 골라서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지도 않고 유명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 한 번 또 죽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유명하지 않아도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너무 재미있게 즐겁게 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세상 그냥 난지도구나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원죄가 우리인생 난지도라는 것입니다.
2016.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