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1-8 2
요한계시록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5
조회
2642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주기 말씀을 쓴 것이 목적입니다. 종들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일곱 교회가 나오고 일곱 교회를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면서 22장 맨 마지막에 가면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 이라고 말씀하는데 모든 자가 종들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서신서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주체가 있어서 드러내어주는 것입니다. 계시의 성격상 보여준 것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여준 것만 보게 되는 이 현상이 종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종들을 마지막에는 모든 자들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그 모든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은 숨겨진 암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적어도 1세기 2세기에 있었던 믿음의 공동체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만한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해할만한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또는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약이라는 성경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사람들이 왜 어려워할까를 생각해보면 히브리서랑 똑같은 어떤 면이 있어서입니다. 구약의 이야기를 계속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모르면 사실은 히브리서가 이해가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도 사실은 구약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인용구가 518가지나 들어있습니다. 짧은 성경 안에 구약의 인용구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다는 것은 구약책이라는 얘기입니다. 구약을 이해해야지만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구약성경만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매일 성경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아서 우리 보다 더 많이 했을지도 모릅니다. 인문학적으로 얘기하면 1세기 사람들이 우리 보다 더 미개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더 세상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고 구약성경 자체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동체들이 그것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13세만 되면 항상 머리에 말씀을 기억하겠다고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도 구전으로 이어져서 그것을 글로 썼고 원본도 없습니다. 어떤 진보적인 목사님은 저에게 원본도 없는 성경책을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원본을 찾아가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본으로 성경을 만들었느냐에 따라서 버전이 다 다릅니다. 사본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말씀인데 도대체 그 자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면 결국에는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 교회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되고 읽을 만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읽을 수 있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고 들을만하고 지킬만한 것들을 줘야지 지키지 못할 것을 주고서 못 지켰다고 하신다면 이상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암호처럼 썼다면 간첩활동을 해보지 않고는 암호를 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계시록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원래 성경은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공부 하러 오신 분들한테 성공공부가 필요 없다고 하는 얘기가 이상한 얘기인데 옛날에는 구약성경을 그냥 읽었습니다. 직관으로 그냥 읽고 아멘하고 그냥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헬라적인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냥 말씀 보고 ‘아멘’하고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헬라적인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분석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이해한 것을 적용합니다. 원래 동양 무술은 1장 2장 이렇게 차례대로 배우지 않습니다. 빨래하고 물 긷고 하다가 한 수 가르쳐 주고 또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고 어느 순간 또 한 수 더 가르쳐 주고 그러다가 하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직관적인 방식의 교육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은 주일에 설교를 하지 않고 말씀을 읽고 어떻게 지켰는지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다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오셔서 이단인 줄 알고 나가버리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히브리적인 성경공부방식입니다.
공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칸막이 있는 책상에서 혼자 공부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도서관은 시끄럽습니다. 둘이 토론 하는 무리들이 여기 저기 있어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공부는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공부, 암기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암기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 이런 식의 공부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이름과 이삭을 낳았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자꾸 궁금해 하고 그게 맞았다 틀렸다 따지고 빈칸 채우기 하거나 동그라미 하는 방식의 공부를 합니다. 저랑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성경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저희 교회 청년이 인도네시아에 가게 됐는데 그 곳 교회에서 목사도 아닌 사람이 성경공부를 하고 빈 칸 채우는 성경공부를 한다고 이상한 것 같다고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그렇게들 한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생명공부를 해야 하는데 생명공부를 하려면 제일 좋은 엄마는 가정학과나 식품영양학과를 나온 엄마가 아니고 사랑이 많은 엄마입니다.
성경은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가 되고 이해된 말씀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오셨는데 정말 좋은 어머니셨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머리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지주의자처럼 어떤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생명지식도 진리지식이 아니라 선악과의 지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보니까 죽이려고 하고 정죄합니다. 예수가 없고 영적전쟁만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까 다 죽일 놈들입니다. 영적세계에서는 센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더 센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 열 두 시간씩 기도하는 사람도 아는데 세 시간 기도는 정말 새 발의 피입니다. 열 두 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붕붕 날아다닙니다. 세계전쟁을 다 참여합니다. 신비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입신을 밥 먹듯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 금요일 마다 가서 입신을 하는데 너무 좋다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도 안 듣고 들어가자마자 쓰러집니다. 그 세계가 그냥 너무 좋은 것입니다. 결국 왜 쓰러지느냐고 중요한 것입니다.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입니다. 쓰러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를 용서하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경건주의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주의가 없고 신비주의만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기 위에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람입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하라고 그랬다고 말하면 된다고 그래야 사람들이 쫓아온다고 했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하면 누가 쫓아오느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계시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주체가 있어서 드러내어주는 것입니다. 계시의 성격상 보여준 것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여준 것만 보게 되는 이 현상이 종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종들을 마지막에는 모든 자들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그 모든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은 숨겨진 암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적어도 1세기 2세기에 있었던 믿음의 공동체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만한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해할만한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또는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약이라는 성경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사람들이 왜 어려워할까를 생각해보면 히브리서랑 똑같은 어떤 면이 있어서입니다. 구약의 이야기를 계속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모르면 사실은 히브리서가 이해가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도 사실은 구약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인용구가 518가지나 들어있습니다. 짧은 성경 안에 구약의 인용구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다는 것은 구약책이라는 얘기입니다. 구약을 이해해야지만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구약성경만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매일 성경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아서 우리 보다 더 많이 했을지도 모릅니다. 인문학적으로 얘기하면 1세기 사람들이 우리 보다 더 미개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더 세상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고 구약성경 자체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동체들이 그것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13세만 되면 항상 머리에 말씀을 기억하겠다고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도 구전으로 이어져서 그것을 글로 썼고 원본도 없습니다. 어떤 진보적인 목사님은 저에게 원본도 없는 성경책을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원본을 찾아가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본으로 성경을 만들었느냐에 따라서 버전이 다 다릅니다. 사본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말씀인데 도대체 그 자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면 결국에는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 교회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되고 읽을 만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읽을 수 있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고 들을만하고 지킬만한 것들을 줘야지 지키지 못할 것을 주고서 못 지켰다고 하신다면 이상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암호처럼 썼다면 간첩활동을 해보지 않고는 암호를 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계시록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원래 성경은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공부 하러 오신 분들한테 성공공부가 필요 없다고 하는 얘기가 이상한 얘기인데 옛날에는 구약성경을 그냥 읽었습니다. 직관으로 그냥 읽고 아멘하고 그냥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헬라적인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냥 말씀 보고 ‘아멘’하고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헬라적인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분석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이해한 것을 적용합니다. 원래 동양 무술은 1장 2장 이렇게 차례대로 배우지 않습니다. 빨래하고 물 긷고 하다가 한 수 가르쳐 주고 또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고 어느 순간 또 한 수 더 가르쳐 주고 그러다가 하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직관적인 방식의 교육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은 주일에 설교를 하지 않고 말씀을 읽고 어떻게 지켰는지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다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오셔서 이단인 줄 알고 나가버리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히브리적인 성경공부방식입니다.
공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칸막이 있는 책상에서 혼자 공부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도서관은 시끄럽습니다. 둘이 토론 하는 무리들이 여기 저기 있어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공부는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공부, 암기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암기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 이런 식의 공부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이름과 이삭을 낳았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자꾸 궁금해 하고 그게 맞았다 틀렸다 따지고 빈칸 채우기 하거나 동그라미 하는 방식의 공부를 합니다. 저랑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성경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저희 교회 청년이 인도네시아에 가게 됐는데 그 곳 교회에서 목사도 아닌 사람이 성경공부를 하고 빈 칸 채우는 성경공부를 한다고 이상한 것 같다고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그렇게들 한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생명공부를 해야 하는데 생명공부를 하려면 제일 좋은 엄마는 가정학과나 식품영양학과를 나온 엄마가 아니고 사랑이 많은 엄마입니다.
성경은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가 되고 이해된 말씀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오셨는데 정말 좋은 어머니셨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머리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지주의자처럼 어떤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생명지식도 진리지식이 아니라 선악과의 지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보니까 죽이려고 하고 정죄합니다. 예수가 없고 영적전쟁만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까 다 죽일 놈들입니다. 영적세계에서는 센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더 센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 열 두 시간씩 기도하는 사람도 아는데 세 시간 기도는 정말 새 발의 피입니다. 열 두 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붕붕 날아다닙니다. 세계전쟁을 다 참여합니다. 신비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입신을 밥 먹듯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 금요일 마다 가서 입신을 하는데 너무 좋다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도 안 듣고 들어가자마자 쓰러집니다. 그 세계가 그냥 너무 좋은 것입니다. 결국 왜 쓰러지느냐고 중요한 것입니다.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입니다. 쓰러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를 용서하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경건주의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주의가 없고 신비주의만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기 위에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람입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하라고 그랬다고 말하면 된다고 그래야 사람들이 쫓아온다고 했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하면 누가 쫓아오느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