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1-8 3
요한계시록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5
조회
2909
저자와 독자와 현대독자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 장로 요한이냐 사도요한이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요한을 추종하던 요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이 썼던 그들이 편집했던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재적 저자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1장부터 22장 까지 끌고 가는 내재적 저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편집이 됐든 누구의 자료를 썼든 무엇을 어떻게 했던 내재적 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쓴 것은 누군가가 읽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독자가 있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시간예술이고 글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예술입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하든 말은 그 때 그 때 의미와 느낌으로 전달되지만 글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예술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한테 읽혀야 하기 때문에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헬라어는 영어식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주어와 목적어가 정확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는 또 굉장히 불투명한 언어입니다.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헷갈리고 모음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일점일획이라고 할 때 점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말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저자는 독자를 보고 글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 그것을 읽는 현대독자입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독자와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갭이 있는데 이것을 문화적 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1세기 2세기 사람들을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와 현대독자 사이에는 문학적 장르가 있습니다. 저자가 글을 쓸 때 글의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시와 역사서와 계시록과 비유와 논설체가 다 다릅니다. 저자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독자에게 얘기하고 있고 독자와 현대독자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계시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르가 글의 형식입니다.
예를 들면 시에서의 나무와 이야기체의 나무는 다릅니다. 뿌리 깊은 나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는 시에서의 나무는 복 있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나무 밑에서 잤더라 할 때와 같이 이야기체에서의 나무는 그냥 나무입니다. 계시록이 가진 문학적 장르에 접근하는 방식이 상징, 신비, 역설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특징이면서 특별히 묵시문학적인 장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장르의 형식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이것을 이야기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술의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에 해가 비치는 것 같더라.’
이것을 이야기체로 읽으면 괴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문학적 장르를 알고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날아가는 어떤 물체를 헬리콥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것을 실재 이야기처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학적 장르를 배제한 채 그냥 이야기체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비이고 역설입니다. 며칠 전에 들은 얘기인데 아주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천국에 가면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회 가도 여자, 식당에 가도 여자니까 천국에도 여자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세상입니다. 아무튼 천국에 가면 금이 있고 보석이 있다고 성경에서 말하는데 진짜일까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이라고 하는 문학적 장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재 언어가 아니고 상징의 언어입니다. 실재가 아닌 상징의 언어가 518가지의 구약의 언어입니다. 이 상징은 실재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고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되었고 이제는 그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져간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도미티안이라고 하는 황제가 있을 때 쓴 것인데 황제가 신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이제는 로마황제 신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라고 하는 신을 믿을 것이냐 갈림길에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 환란과 고난이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계속 깨져가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들이 그들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오신 메시야입니다. 우리는 본 사람들입니다. 상징과 신비와 역설의 요한계시록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을 하고 봤던 메시야가 오늘 우리들의 실재 속에서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적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다 과거의 약속입니다. 원래 성경은 모세5경만 있으면 됩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출애굽기만 있으면 됩니다. 원래 출애굽기가 성경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했던 사건이 출애굽사건입니다. 왜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를 쓴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데?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모세5경만 봤습니다.
신약도 복음서만 있으면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이야기만 있으면 됩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예언을 하는데 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과거에 한 것입니다. 구약, 신약의 약이 약속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합의를 잘 하고 합의한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성실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성품이 성실함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가끔 우리를 자르고 싶으실 것입니다. 제 딸, 아들도 자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단 한 번도 ‘네’를 하지 않습니다. 말끝 마다 저를 공격합니다. 아빠부터 잘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자르고 싶은데 약속 때문에 자르지 못하십니다. 그 약속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예언자들입니다.
미래는 다 막아놓으셨습니다. 귀신의 특징, 마귀의 특징이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귀신 같이 안다는 말이 있는데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과거를 잘 안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사람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으로 살게 될 것인지가 좀 보입니다. 내 몸으로 익혀진 정보가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미래의 사건은 모릅니다. 하나님도 인간은 미래의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소망이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없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뭔가 기댈만한 것이 있다면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 믿고 갑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예언과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약의 약속으로 또는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이 공동체를 세울 것이고 공동체에서 네가 풀면 풀릴 것이고 네가 닫으면 닫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열쇠를 주셨고 보혜사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 약속 가운데 있는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 본 것을 다 증언하노라.(2절)’
요한의 증언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구원의 두 가지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하나님이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관계성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일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결국에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 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맞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유자가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노예는 증언을 못 합니다. 완벽하게 독립된 존재로써의 자유자이고 2~3 사람이 증언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흔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못 본 사람은 증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그 뜻이 타락한 천사를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 나름 요한계시록의 키워드가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언자의 원어를 보면 순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읽고서 순교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고 피 흘림을 통해서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길이고 등불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은 방법을 구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가진 사람입니다.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말씀을 찾아야 하는데 말씀을 찾지 않습니다. 나한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내 평생에 길이 되는 말씀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말씀도 있고 관계를 해결해 주는 말씀도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 말씀 찾아야 합니다. 떠다니는 말씀도 있고 쓰인 말씀도 있습니다. T.V에서 오는 말씀도 있고 환경에서 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 말씀을 쓰인 말씀 안에서 확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확인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목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영적 가이드를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가는 것이 맞는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016. 2. 25
그리고 성경의 내재적 저자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1장부터 22장 까지 끌고 가는 내재적 저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편집이 됐든 누구의 자료를 썼든 무엇을 어떻게 했던 내재적 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쓴 것은 누군가가 읽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독자가 있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시간예술이고 글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예술입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하든 말은 그 때 그 때 의미와 느낌으로 전달되지만 글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예술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한테 읽혀야 하기 때문에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헬라어는 영어식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주어와 목적어가 정확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는 또 굉장히 불투명한 언어입니다.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헷갈리고 모음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일점일획이라고 할 때 점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말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저자는 독자를 보고 글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 그것을 읽는 현대독자입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독자와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갭이 있는데 이것을 문화적 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1세기 2세기 사람들을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와 현대독자 사이에는 문학적 장르가 있습니다. 저자가 글을 쓸 때 글의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시와 역사서와 계시록과 비유와 논설체가 다 다릅니다. 저자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독자에게 얘기하고 있고 독자와 현대독자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계시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르가 글의 형식입니다.
예를 들면 시에서의 나무와 이야기체의 나무는 다릅니다. 뿌리 깊은 나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는 시에서의 나무는 복 있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나무 밑에서 잤더라 할 때와 같이 이야기체에서의 나무는 그냥 나무입니다. 계시록이 가진 문학적 장르에 접근하는 방식이 상징, 신비, 역설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특징이면서 특별히 묵시문학적인 장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장르의 형식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이것을 이야기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술의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에 해가 비치는 것 같더라.’
이것을 이야기체로 읽으면 괴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문학적 장르를 알고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날아가는 어떤 물체를 헬리콥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것을 실재 이야기처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학적 장르를 배제한 채 그냥 이야기체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비이고 역설입니다. 며칠 전에 들은 얘기인데 아주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천국에 가면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회 가도 여자, 식당에 가도 여자니까 천국에도 여자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세상입니다. 아무튼 천국에 가면 금이 있고 보석이 있다고 성경에서 말하는데 진짜일까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이라고 하는 문학적 장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재 언어가 아니고 상징의 언어입니다. 실재가 아닌 상징의 언어가 518가지의 구약의 언어입니다. 이 상징은 실재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고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되었고 이제는 그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져간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도미티안이라고 하는 황제가 있을 때 쓴 것인데 황제가 신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이제는 로마황제 신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라고 하는 신을 믿을 것이냐 갈림길에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 환란과 고난이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계속 깨져가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들이 그들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오신 메시야입니다. 우리는 본 사람들입니다. 상징과 신비와 역설의 요한계시록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을 하고 봤던 메시야가 오늘 우리들의 실재 속에서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적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다 과거의 약속입니다. 원래 성경은 모세5경만 있으면 됩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출애굽기만 있으면 됩니다. 원래 출애굽기가 성경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했던 사건이 출애굽사건입니다. 왜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를 쓴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데?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모세5경만 봤습니다.
신약도 복음서만 있으면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이야기만 있으면 됩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예언을 하는데 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과거에 한 것입니다. 구약, 신약의 약이 약속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합의를 잘 하고 합의한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성실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성품이 성실함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가끔 우리를 자르고 싶으실 것입니다. 제 딸, 아들도 자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단 한 번도 ‘네’를 하지 않습니다. 말끝 마다 저를 공격합니다. 아빠부터 잘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자르고 싶은데 약속 때문에 자르지 못하십니다. 그 약속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예언자들입니다.
미래는 다 막아놓으셨습니다. 귀신의 특징, 마귀의 특징이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귀신 같이 안다는 말이 있는데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과거를 잘 안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사람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으로 살게 될 것인지가 좀 보입니다. 내 몸으로 익혀진 정보가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미래의 사건은 모릅니다. 하나님도 인간은 미래의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소망이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없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뭔가 기댈만한 것이 있다면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 믿고 갑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예언과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약의 약속으로 또는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이 공동체를 세울 것이고 공동체에서 네가 풀면 풀릴 것이고 네가 닫으면 닫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열쇠를 주셨고 보혜사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 약속 가운데 있는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 본 것을 다 증언하노라.(2절)’
요한의 증언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구원의 두 가지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하나님이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관계성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일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결국에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 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맞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유자가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노예는 증언을 못 합니다. 완벽하게 독립된 존재로써의 자유자이고 2~3 사람이 증언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흔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못 본 사람은 증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그 뜻이 타락한 천사를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 나름 요한계시록의 키워드가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언자의 원어를 보면 순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읽고서 순교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고 피 흘림을 통해서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길이고 등불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은 방법을 구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가진 사람입니다.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말씀을 찾아야 하는데 말씀을 찾지 않습니다. 나한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내 평생에 길이 되는 말씀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말씀도 있고 관계를 해결해 주는 말씀도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 말씀 찾아야 합니다. 떠다니는 말씀도 있고 쓰인 말씀도 있습니다. T.V에서 오는 말씀도 있고 환경에서 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 말씀을 쓰인 말씀 안에서 확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확인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목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영적 가이드를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가는 것이 맞는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016.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