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공동체 1
생명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6
조회
2610
생명의 공동체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를 만드는 이유는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게는 편을 만드는 것이고 그 편을 통해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생명관계를 통해 생명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생명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이유는 돼지의 관심은 먹는 것인데 진주는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주를 주면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돼지는 진주를 먹을 것으로 보지 못할까요? 돼지는 진주를 팔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삽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입니다. 돼지는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진주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존재, 관계, 공동체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존재성을 가지는 이유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진짜 진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물은 존재의 가치를 줘도 그것이 뭔지를 모릅니다.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것도 매일 어떤 것을 해야 돈이 되는지 돈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진주의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팔아서 더 많은 것을 먹을 수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주입니다. 돼지들은 코앞에 있는 문제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그 문제 속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먹을 수 있는 것이냐 먹을 수 없는 것이냐의 차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존재가 관계를 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사람이 원래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이 사람의 의지가 되고 그것이 감정이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다 감정으로 받습니다. 그 감정이 또 다른 지식의 이해가 되고 어떤 뜻을 세우게 됩니다. 감정, 지식, 의지로 가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면 사람이 감정에 따라서 지식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스크린이 되는 것입니다. 99%의 좋은 얘기도 내가 어떤 나쁜 감정 때문에 그 감정으로 인해서 악의 1%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봅니다. 그것이 감정의 스크린이 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100% 선한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100% 선한 분도 사람들이 감정으로 받으니까 악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원래는 감정을 배제하고 지식으로 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지식으로만 듣지 못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정에 속한 사람의 지식이 어떤 순간에 자기가 받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감정으로 그것을 듣기 시작합니다.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의지입니다. 의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되어서 그 지식으로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는데 나라고 하는 존재, 두 세 사람의 관계 또는 어떤 공동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의지를 발동하는 것입니다.
의지라는 것을 정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정함으로 오지 않으면 결단코 그 안에서 쌓이지를 않고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삶은 무엇을 부어도, 가장 좋은 것을 줘도 가장 악하게 쓸 수 있습니다. 또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함을 종교의 언어로 얘기하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존재든, 관계든, 공동체든 마음의 문제인데 그 마음의 문제가 정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을 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좋은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생명지식을 우리는 훈련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감정으로 받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다 좋아 보이고 기분이 나쁘면 다 안 좋아 보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배가 부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배가 부르면 감정이 편안해지니까 무슨 얘기를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고 힘들면 감정이 상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좋은 얘기도 귀찮고 싫습니다. 사람이 이 감정으로 인해서 진짜 지식을 못 듣습니다.
지식을 듣겠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내가 뜻을 정하고 나서 원복의 존재라고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정함이라든지 존재라든지 관계라는 것도 사실은 말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말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말을 듣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필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생명지식이 되고 그래서 그것이 기쁘고 고맙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의지를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 감정으로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관계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인데 이 관계는 친밀감으로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핵심가치, 방향, 목적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친밀감으로 가는 관계의 단계들이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으로 가는 관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눈빛만 봐도 아는 관계로 가야 되는 것인데 20년을 살아도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없이 관계 안에서의 갈등도 있어야 되고 또 그것에 대한 계기도 있어야 하고 서로가 그런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관계의 단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종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후사라고 하는 자녀 중에서도 장자의 관계가 있습니다. 내 모든 유업을 이어 받을 사람, 내 뜻을 이어 받을 사람이 장자입니다. 이것 보다 더 높은 단계가 친구의 관계입니다. 동역자의 관계, 동등한 관계,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일대 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친밀감의 단계로 하나하나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까지는 일의 관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까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 친구는 오래된 친구일수록 대등한 일대 일의 관계인데 친구 보다 더 높은 차원이 부부의 관계입니다. 자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부어줄 수밖에 없는 관계인데 부부의 관계는 말 그대로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종의 관계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계속 받는 은혜의 관계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존재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종한테 주면 줄수록 종은 너무나 감사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팔리운 종이라고 있는데 옛날에 종을 돈 주고 살 때 천만 원짜리 종이 있고 백만 원짜리 종이 있었습니다. 종도 돈을 주고 샀습니다. 백만 원짜리 종하고 천만 원짜리 종은 충성도가 다를 것입니다. 천만 원짜리 종은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법에 의하면 7X7=49, 49년이 지난 다음에 50년 희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자유인이었다가 돈이 없어서 종살이 했던 사람들이 7년 째 되는 해에 해방시키는 것도 있고 50년 째 되는 희년에 해방시키기도 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자기 주인이 너무 좋아서 자발적으로, 자원함으로 스스로 주인 밑에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귀에 귀걸이를 해줬습니다. 귀걸이를 하는 이유는 자발적인 종이라는 표시입니다. 그 종이 귀 뚫린 종입니다. 사실은 은혜의 종은 500만 원 1000만 원 주인이 나에게 이익을 주니까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자발적인 종은 주인하고 굉장히 밀접한 관계성이 있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원하는 종입니다.
세 번째는 이 종 안에서도 길리운 종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 집에서 태어났고 주인집 아들하고 같이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거의 친구입니다. 친구이면서 동시에 주인의 모든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길리운 종은 주인하고 거의 똑같은데 신분이 다릅니다.
현대에도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에 취직한다고 할 때 연봉을 얼마만큼 받을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사실 연봉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의 충성도가 반드시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만족도의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선을 넘어가면 돈의 액수가 일하는 열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아내도 회사에서 일할 때 서로 연봉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봉은 비밀입니다. 연봉만 보고 일을 하는 사람은 그 회사의 가치가 마음에 들어서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하고 또 다른 것입니다. 창업주와 같이 어렵게 시작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원들이 주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하고 개인이 운명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이런 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 보다 더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자녀의 관계입니다. 자녀는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생명입니다. 종하고 자녀의 차이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주인이 종한테 ‘너 쉬어.’ 하면 종은 쉬지 못하고 자녀는 너무나 편안하게 쉽니다. 관계라는 것 자체가 종하고 자녀가 되는 경계선이 굉장히 큰데 내가 낳았느냐 아니면 바깥에서 데리고 왔느냐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낳으려면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종은 일하는 관계이지만 자녀는 일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녀는 매일 요구합니다. 자녀는 매일 자기 소원을 얘기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자녀는 매일 하는 얘기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있고 불경에도 있는 얘기인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재산을 달라고 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재산 받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해먹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또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잔치를 베풀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우해 줍니다.
공동체에서 아버지와 같이 나를 끝까지 품어줄 사람이 있어야하는 것이 생명관계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좀 크면 부모 가슴이 못 박히는 얘기를 하는데 ‘엄마, 아빠가 해 준 것이 뭐가 있어?’입니다. 세 살 이전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더구나 인간이 동물 중에 부모의 보호를 받는 기간이 가장 깁니다.
우리나라에만 소년, 소녀 가장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엄청난 아동학대입니다. 미국에서는 열세 살 이전에 집에 혼자 두면 부모는 경찰에 잡혀갑니다. 그리고 소년, 소녀가 가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반드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후견인을 두든지 어떤 시설에 위탁을 하든지 반드시 어른이 그 가정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소년, 소녀 가장은 전체 사회가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내가 자녀로 있어야할 시간이 있습니다. 의존하다가 독립이 된 후 상호의존하게 됩니다. 의존의 시간을 겪고 나서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이 돼야 상호의존으로 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상호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관계를 하려면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생명의 원리를 쫓아가듯이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관계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내 머리가 누구인지 나의 권위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 권위>라는 책이 있는데 사람의 관계 안에서 영적 권위라고 하는 권위가 없어지니까 공동체가 다 깨집니다. 미국 사람들이 굉장히 동등한 것처럼 보입니다. 굉장히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데 공동체 안에서 어떤 권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등하다고 하면 맞먹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공동체 없습니다.
공동체가 생명의 메카니즘으로 움직여야하는 것인데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의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의존의 관계, 독립의 관계, 상호 의존의 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설날에 절을 했는데 부모가 세뱃돈을 주면 자녀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돈을 드리면 후사입니다. 내가 그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부모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이 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내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데 후사는 아버지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후사,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자에게는 유산을 두 배를 줍니다. 장자권은 두 배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민법으로 얘기하면 자식한테 다 1:1로 재산을 나눠줍니다. 옛날에는 장자에게 두 배를 줬는데 아버지의 유업을 그대로 이어받으라고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어 받을 자녀가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 들어갔을 때도 똑같습니다. 관계를 맺을 때 내가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내 멘토로 세우고 멘토가 가지고 있는 뜻과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도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높낮이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부모를 떠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아버지가 한 남자로 보입니다. 어느 순간 엄마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도 남자였구나. 엄마도 여자였구나.’ 부모의 쓸쓸함과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부모가 다 이해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이유가 부모가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권위자가 나의 멘토가 동등하게 여겨지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동업자가 있고 동역자가 있는데 동업자는 5:5, 7:3 계산하는 이익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동역자는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5:5냐 7:3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함께 갈 수 있는 친구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갚진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친구 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단일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사람은 모양도 다르고 기질도 언어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서 생명을 같이 만들어냅니다. 부부는 생명을 만들어가는 관계입니다. 생명을 함께 만들 수 있는 동역자의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밀감에서 가장 높은 차원입니다. 육신의 부부와 영적인 부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드림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원래 농구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전에는 미국이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애들이 프로선수들이니까 자기 몸을 아끼느라 올림픽에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미국팀이 계속 우승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미국에서 드림팀을 만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선수 다섯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 해에 올림픽에서 미국이 우승했습니다. 다른 팀은 게임이 안 됐습니다. 전에는 한 명이나 두 명만 잘 하는 선수였는데 다섯 명이 들어가서 완벽하게 한 팀이 되니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팀이 된 것입니다. 미국에 살 때 제가 레이커스팀 팬이었는데 농구의 드림팀처럼 단일을 이루어서 함께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함께 하는 드림팀입니다.
처음에는 공동체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관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한테 제발 설거지 하지 말고 헌금 하지 말고 교회 와서 일할 생각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사람들 만나서 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3년 동안 키우셨는데 함께 밥 먹고, 놀고, 얘기하고, 가끔 훈련도 하셨습니다. 3년 되니까 일만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관계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밥을 하셔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부의 관계까지 더 깊어져서 중간에 조금씩 일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관계를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함께 뭘 할까? 생명을 낳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원래 생명은 더딥니다. ‘빠름’이 산업혁명이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물건을 빨리 정확하게 만들어내야지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농사짓는 문화에서는 빠르지 않았습니다. 빠르면 생명이 다 죽습니다. 저는 농사짓기 정말 힘든 사람인데 왜냐하면 선인장도 말려서 죽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뭘 만지면 다 부서지는 마이너스의 손입니다. 그런데 농부의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느립니다. 농부는 원래 부지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농부를 하려면 더디고 느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물을 주고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자꾸 만지면 죽습니다.
멕시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고 합니다. 주인한테 매일 그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이 멕시칸을 종업원으로 두셨는데 잠꼬대를 ‘빨리빨리’ 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생명은 빠른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갑자기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됐다면 그 공동체는 아픈 것입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성공했다고 하고 부흥이라고 얘기하는데 생명들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암에 걸린 것입니다. 생명의 조직은 그렇게 빨리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관계하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은 잘 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는 핵심가치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핵심가치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이 아닌 것, 능력을 보여주려고 하고 필요를 채워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에 보면 사단이 와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40일 굶은 사람한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필요를 채워줘야 하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기적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또 자기한테 절을 하면 모든 권세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능력이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를 만드는 이유는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게는 편을 만드는 것이고 그 편을 통해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생명관계를 통해 생명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생명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이유는 돼지의 관심은 먹는 것인데 진주는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주를 주면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돼지는 진주를 먹을 것으로 보지 못할까요? 돼지는 진주를 팔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삽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입니다. 돼지는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진주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존재, 관계, 공동체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존재성을 가지는 이유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진짜 진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물은 존재의 가치를 줘도 그것이 뭔지를 모릅니다.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것도 매일 어떤 것을 해야 돈이 되는지 돈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진주의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팔아서 더 많은 것을 먹을 수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주입니다. 돼지들은 코앞에 있는 문제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그 문제 속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먹을 수 있는 것이냐 먹을 수 없는 것이냐의 차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존재가 관계를 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사람이 원래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이 사람의 의지가 되고 그것이 감정이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다 감정으로 받습니다. 그 감정이 또 다른 지식의 이해가 되고 어떤 뜻을 세우게 됩니다. 감정, 지식, 의지로 가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면 사람이 감정에 따라서 지식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스크린이 되는 것입니다. 99%의 좋은 얘기도 내가 어떤 나쁜 감정 때문에 그 감정으로 인해서 악의 1%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봅니다. 그것이 감정의 스크린이 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100% 선한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100% 선한 분도 사람들이 감정으로 받으니까 악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원래는 감정을 배제하고 지식으로 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지식으로만 듣지 못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정에 속한 사람의 지식이 어떤 순간에 자기가 받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감정으로 그것을 듣기 시작합니다.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의지입니다. 의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되어서 그 지식으로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는데 나라고 하는 존재, 두 세 사람의 관계 또는 어떤 공동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의지를 발동하는 것입니다.
의지라는 것을 정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정함으로 오지 않으면 결단코 그 안에서 쌓이지를 않고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삶은 무엇을 부어도, 가장 좋은 것을 줘도 가장 악하게 쓸 수 있습니다. 또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함을 종교의 언어로 얘기하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존재든, 관계든, 공동체든 마음의 문제인데 그 마음의 문제가 정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을 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좋은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생명지식을 우리는 훈련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감정으로 받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다 좋아 보이고 기분이 나쁘면 다 안 좋아 보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배가 부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배가 부르면 감정이 편안해지니까 무슨 얘기를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고 힘들면 감정이 상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좋은 얘기도 귀찮고 싫습니다. 사람이 이 감정으로 인해서 진짜 지식을 못 듣습니다.
지식을 듣겠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내가 뜻을 정하고 나서 원복의 존재라고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정함이라든지 존재라든지 관계라는 것도 사실은 말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말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말을 듣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필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생명지식이 되고 그래서 그것이 기쁘고 고맙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의지를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 감정으로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관계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인데 이 관계는 친밀감으로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핵심가치, 방향, 목적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친밀감으로 가는 관계의 단계들이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으로 가는 관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눈빛만 봐도 아는 관계로 가야 되는 것인데 20년을 살아도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없이 관계 안에서의 갈등도 있어야 되고 또 그것에 대한 계기도 있어야 하고 서로가 그런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관계의 단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종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후사라고 하는 자녀 중에서도 장자의 관계가 있습니다. 내 모든 유업을 이어 받을 사람, 내 뜻을 이어 받을 사람이 장자입니다. 이것 보다 더 높은 단계가 친구의 관계입니다. 동역자의 관계, 동등한 관계,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일대 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친밀감의 단계로 하나하나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까지는 일의 관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까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 친구는 오래된 친구일수록 대등한 일대 일의 관계인데 친구 보다 더 높은 차원이 부부의 관계입니다. 자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부어줄 수밖에 없는 관계인데 부부의 관계는 말 그대로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종의 관계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계속 받는 은혜의 관계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존재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종한테 주면 줄수록 종은 너무나 감사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팔리운 종이라고 있는데 옛날에 종을 돈 주고 살 때 천만 원짜리 종이 있고 백만 원짜리 종이 있었습니다. 종도 돈을 주고 샀습니다. 백만 원짜리 종하고 천만 원짜리 종은 충성도가 다를 것입니다. 천만 원짜리 종은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법에 의하면 7X7=49, 49년이 지난 다음에 50년 희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자유인이었다가 돈이 없어서 종살이 했던 사람들이 7년 째 되는 해에 해방시키는 것도 있고 50년 째 되는 희년에 해방시키기도 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자기 주인이 너무 좋아서 자발적으로, 자원함으로 스스로 주인 밑에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귀에 귀걸이를 해줬습니다. 귀걸이를 하는 이유는 자발적인 종이라는 표시입니다. 그 종이 귀 뚫린 종입니다. 사실은 은혜의 종은 500만 원 1000만 원 주인이 나에게 이익을 주니까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자발적인 종은 주인하고 굉장히 밀접한 관계성이 있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원하는 종입니다.
세 번째는 이 종 안에서도 길리운 종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 집에서 태어났고 주인집 아들하고 같이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거의 친구입니다. 친구이면서 동시에 주인의 모든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길리운 종은 주인하고 거의 똑같은데 신분이 다릅니다.
현대에도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에 취직한다고 할 때 연봉을 얼마만큼 받을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사실 연봉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의 충성도가 반드시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만족도의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선을 넘어가면 돈의 액수가 일하는 열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아내도 회사에서 일할 때 서로 연봉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봉은 비밀입니다. 연봉만 보고 일을 하는 사람은 그 회사의 가치가 마음에 들어서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하고 또 다른 것입니다. 창업주와 같이 어렵게 시작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원들이 주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하고 개인이 운명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이런 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 보다 더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자녀의 관계입니다. 자녀는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생명입니다. 종하고 자녀의 차이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주인이 종한테 ‘너 쉬어.’ 하면 종은 쉬지 못하고 자녀는 너무나 편안하게 쉽니다. 관계라는 것 자체가 종하고 자녀가 되는 경계선이 굉장히 큰데 내가 낳았느냐 아니면 바깥에서 데리고 왔느냐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낳으려면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종은 일하는 관계이지만 자녀는 일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녀는 매일 요구합니다. 자녀는 매일 자기 소원을 얘기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자녀는 매일 하는 얘기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있고 불경에도 있는 얘기인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재산을 달라고 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재산 받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해먹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또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잔치를 베풀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우해 줍니다.
공동체에서 아버지와 같이 나를 끝까지 품어줄 사람이 있어야하는 것이 생명관계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좀 크면 부모 가슴이 못 박히는 얘기를 하는데 ‘엄마, 아빠가 해 준 것이 뭐가 있어?’입니다. 세 살 이전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더구나 인간이 동물 중에 부모의 보호를 받는 기간이 가장 깁니다.
우리나라에만 소년, 소녀 가장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엄청난 아동학대입니다. 미국에서는 열세 살 이전에 집에 혼자 두면 부모는 경찰에 잡혀갑니다. 그리고 소년, 소녀가 가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반드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후견인을 두든지 어떤 시설에 위탁을 하든지 반드시 어른이 그 가정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소년, 소녀 가장은 전체 사회가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내가 자녀로 있어야할 시간이 있습니다. 의존하다가 독립이 된 후 상호의존하게 됩니다. 의존의 시간을 겪고 나서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이 돼야 상호의존으로 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상호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관계를 하려면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생명의 원리를 쫓아가듯이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관계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내 머리가 누구인지 나의 권위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 권위>라는 책이 있는데 사람의 관계 안에서 영적 권위라고 하는 권위가 없어지니까 공동체가 다 깨집니다. 미국 사람들이 굉장히 동등한 것처럼 보입니다. 굉장히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데 공동체 안에서 어떤 권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등하다고 하면 맞먹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공동체 없습니다.
공동체가 생명의 메카니즘으로 움직여야하는 것인데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의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의존의 관계, 독립의 관계, 상호 의존의 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설날에 절을 했는데 부모가 세뱃돈을 주면 자녀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돈을 드리면 후사입니다. 내가 그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부모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이 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내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데 후사는 아버지가 원하는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후사,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자에게는 유산을 두 배를 줍니다. 장자권은 두 배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민법으로 얘기하면 자식한테 다 1:1로 재산을 나눠줍니다. 옛날에는 장자에게 두 배를 줬는데 아버지의 유업을 그대로 이어받으라고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어 받을 자녀가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 들어갔을 때도 똑같습니다. 관계를 맺을 때 내가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내 멘토로 세우고 멘토가 가지고 있는 뜻과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도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높낮이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부모를 떠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아버지가 한 남자로 보입니다. 어느 순간 엄마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도 남자였구나. 엄마도 여자였구나.’ 부모의 쓸쓸함과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부모가 다 이해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이유가 부모가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권위자가 나의 멘토가 동등하게 여겨지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동업자가 있고 동역자가 있는데 동업자는 5:5, 7:3 계산하는 이익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동역자는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5:5냐 7:3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함께 갈 수 있는 친구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갚진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친구 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단일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사람은 모양도 다르고 기질도 언어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서 생명을 같이 만들어냅니다. 부부는 생명을 만들어가는 관계입니다. 생명을 함께 만들 수 있는 동역자의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밀감에서 가장 높은 차원입니다. 육신의 부부와 영적인 부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드림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원래 농구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전에는 미국이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애들이 프로선수들이니까 자기 몸을 아끼느라 올림픽에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미국팀이 계속 우승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미국에서 드림팀을 만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선수 다섯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 해에 올림픽에서 미국이 우승했습니다. 다른 팀은 게임이 안 됐습니다. 전에는 한 명이나 두 명만 잘 하는 선수였는데 다섯 명이 들어가서 완벽하게 한 팀이 되니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팀이 된 것입니다. 미국에 살 때 제가 레이커스팀 팬이었는데 농구의 드림팀처럼 단일을 이루어서 함께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함께 하는 드림팀입니다.
처음에는 공동체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관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한테 제발 설거지 하지 말고 헌금 하지 말고 교회 와서 일할 생각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사람들 만나서 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3년 동안 키우셨는데 함께 밥 먹고, 놀고, 얘기하고, 가끔 훈련도 하셨습니다. 3년 되니까 일만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관계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밥을 하셔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부의 관계까지 더 깊어져서 중간에 조금씩 일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관계를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함께 뭘 할까? 생명을 낳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원래 생명은 더딥니다. ‘빠름’이 산업혁명이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물건을 빨리 정확하게 만들어내야지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농사짓는 문화에서는 빠르지 않았습니다. 빠르면 생명이 다 죽습니다. 저는 농사짓기 정말 힘든 사람인데 왜냐하면 선인장도 말려서 죽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뭘 만지면 다 부서지는 마이너스의 손입니다. 그런데 농부의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느립니다. 농부는 원래 부지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농부를 하려면 더디고 느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물을 주고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자꾸 만지면 죽습니다.
멕시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고 합니다. 주인한테 매일 그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이 멕시칸을 종업원으로 두셨는데 잠꼬대를 ‘빨리빨리’ 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생명은 빠른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갑자기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됐다면 그 공동체는 아픈 것입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성공했다고 하고 부흥이라고 얘기하는데 생명들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암에 걸린 것입니다. 생명의 조직은 그렇게 빨리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관계하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은 잘 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는 핵심가치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핵심가치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이 아닌 것, 능력을 보여주려고 하고 필요를 채워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에 보면 사단이 와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40일 굶은 사람한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필요를 채워줘야 하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기적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또 자기한테 절을 하면 모든 권세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능력이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