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생명의 말 1

생명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7
조회
855
종교를 인문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고 했을 때에 생명관계, 생명의 말, 생명공동체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생명의 말입니다.

생명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관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랑도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이 있는 것처럼 생명도 생명의 관계와 생명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연’이라고 하는 물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피의 관계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피의 관계, 혈연, 학연, 지연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관계하고 살지를 생각합니다. 그냥 일반적인 사람은 관계를 하다가 불편하면 그냥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식은 웬수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부모 자식의 관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관계에 숨겨진 진리 중에 하나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우기면 끝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악하니까 부모가 자식을 이기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완전히 역리의 시대입니다. 역리가 순리로 바뀌면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부모는 늘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관계, 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가뭄과 홍수가 나면 둘 다 마실 물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나무는 살려고 마르지 않은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어느 산에 갔더니 나무가 드러누워 있는데 햇빛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빛을 받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은 그 자체가 변형이 되고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를 찾듯이 영혼이 갈급하게 되면 본질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질을 찾아가는데 있어서도 1차원, 2차원, 3차원을 잘 알아야 합니다. 3차에 있으면 시험이 왔을 때 1차인 본질을 향해 더 깊이 내립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밑에서 흐르고 있는 물을 마셔야 가뭄에도 홍수에도 자라날 수 있습니다. 피라는 것도 3차의 피, 2차의 피, 1차의 피가 있습니다. 피도 똑같은 피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의 차원에서 보면 가족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인가? 이것도 혈연입니다. 선거철에는 새누리당에 계신 아버지가 민주노동당에 있는 딸을 위해서 노동당을 지지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 한국입니다. 원래 당은 정체성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결사체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가치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 당입니다. 그런데 당원이 자신의 당하고 완벽하게 다른 딸이 속한 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형님이 저랑 스물네 살이 차이가 나시는데 형님도 새누리당이십니다. 그런데 충청도에 정OO씨라고 민주당 국회의원에게 후원금을 내셨습니다. 가족, 친척은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도 똑같은 피가 아닙니다. 피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를 영, 혼, 육으로 나누는데 매일 육적인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은 육의 피입니다. 조금 나은 것이 혼입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가치는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피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류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이 저한테 제 눈이 촉촉하지 않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목사 하기 힘듭니다. 저하고 희망동네 국장하고 성향이 비슷한데 그 집사님한테 ‘저하고 목사님은 인간애는 약한데 인류애는 강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더 큰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촉촉하게 해주지 않는다거나 선물을 안 준다거나 하는 걸 가지고는 힘들어하지 않는데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화가 납니다. 사람마다 성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를 할 때 피의 관계를 하는 것인데 피라는 것이 희생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관계는 없습니다. 생명관계의 가장 좋은 모델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원래 조직의 관계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면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깁니다. 그런데 생명관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깁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는 모든 스케줄을 아이를 중심으로 짭니다. 이것이 생명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까요? 그 이유는 생명 때문입니다. 생명이 생명다워질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이 관계의 시작입니다. 피의 관계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의 관계는 엄마와 아빠가 정욕이 넘쳐서 서로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혼의 관계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생명을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의 관계는 뭔지 모르지만 어떤 신이 나에게 주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생물학적인 아이와 사회적인 관계 속의 아이와 하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은 다른 것입니다. 절대관계 속에서 나에게 피의 관계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제 딸이 어릴 때였는데 한 번은 제가 추운 겨울에 너무 화가 나서 ‘나가’ 라고 했습니다. 애가 신발도 안 신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1초 만에 ‘들어와’ 라고 했습니다. 내가 화가 나서 쟤를 끊어버려야겠다고 하는 순간에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단도 잘 되라고 치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인데 생명이 다치게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이를 징계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때리라고 했다고 또 패면 안 됩니다. 미국에서 굉장히 보수적인 신학교인 탈봇을 다녔는데 조직신학 교수님이 아이를 때리는데 잘 안 보이는 엉덩이를 때리셨습니다. 제가 아는 1.5세 목사님은 아이를 때리고 나서 멍을 풀어줍니다. 사실은 매도 절대 때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생명다워질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매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말라 저렇게 하지 말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율법인 것입니다. 또 다른 기준인 것입니다.

절대관계는 관계를 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생명관계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팔자인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면 그 관계는 생명관계가 아닙니다.

관계 안에서도 3차, 2차, 1차 관계가 있습니다. 1차 관계는 가족입니다. 2차는 지역이나 사회적 관계입니다. 3차는 나와 상관없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차 관계는 잘 못하면서 매일 아프리카사람들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프리카 가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하고 1차 관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앉아서 아프리카 사람들 걱정합니다. 관계 안에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다 생명관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찍는다면 주인공하고 얘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