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생명의 말 2

생명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8
조회
1045
제 아내가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러 다니는데 사람이라는 존재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고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가 매일 하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그래서 문제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들으면 돼지 꼭 그렇게 얘기한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얘기는 잘 안 듣습니다.

생명관계하려면 피의 관계를 해야 하고 피의 관계는 절대관계입니다. 절대관계는 누가 뭐라고 해도 깨지지 않고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제가 잘 하는 얘기가 있는데 갈 곳 없는 은혜가 있고 끊을 수 없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고 결국에는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관계를 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한 사람은 서울에 한 사람은 부산에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면 부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울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가든 부산을 포기하고 서울로 오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공유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내가 가끔 화내는 이유가 가족의 이야기를 밖에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때입니다. 내일 우리 가족 어디 간다고 하는 얘기를 제 아내가 모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둘이 얘기할 시간도 없이 제가 결정한 것입니다.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가능하면 공유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관계는 물질을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 딸이 매월 1일만 되면 용돈을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가끔 현금이 없어서 좀 기다리라고 하면 얼마나 집요하게 달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돈 받아내는 직업 하면 잘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문서를 쓴 것도 아니고 맡겨둔 것도 아닌데 아주 당당하게 요구하는 이유가 생명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빠 돈은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공유하는 것에 사람들이 인색합니다. 그러면 생명관계 못 하는 것입니다.

give & take 가 굉장히 인간적인 관계방식입니다. 저희 교회에 3:1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사람이 세 번 밥을 사줬으면 한 번은 사 줘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서 자기는 1:1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관계는 할 수 있고 조직의 관계는 할 수 있지만 생명관계는 할 수 없습니다. 생명관계는 일흔 번씩 일곱 번, 490번 밥을 사는 것입니다. 밥 산 것을 잊어버리라는 얘기입니다. 처음에 교회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서로 물질을 공유했습니다.

맑스가 공산주의 초기에 기독교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공동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맑스가 유대인이었는데 기독교신자였습니다. 초기 맑스의 인간이해를 들여다보면 기독교적인 이해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꿈 꿨던 이상적인 사회가 초기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서로 물질을 내어주는 사회였습니다. 저희 교회 사람들에게도 물질을 공유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돈도 꿔 주라고 합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집에 친정엄마가 오신다고 옆집에 가서 연탄도 빌려오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도 빌려와서 챙겨 넣습니다. 생명관계니까 기꺼이 내어줍니다. 예를 들어 덕선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면 온 동네가 난리가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누가 죽어도 없어져도 정부가 나서서 조사를 행할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이웃들도 모르는 사회입니다. 만약에 마을공동체가 살아있다면 아이 하나가 갑자기 없어졌을 때 바로 알고 찾아 나설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피의 관계, 시간의 관계, 물질의 관계를 해야 합니다. 피, 시간, 물질이 다 나의 생명입니다. 물질은 내 생명을 투자해야지만 생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내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이 피가 있는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생명관계 하려면 생명을 줘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관계를 원한다고 말은 하는데 이익을 따지고 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 쓰려고 하고 뭔가 획득하려고 하려고 하면 생명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의외로 귀신처럼 압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귀신처럼 압니다. 말이라는 것이 소리는 7%이고 나머지 93%는 비언어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비언어적인 것이 몸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앵무새는 몸으로 울었다는 말입니다. 관계는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이라고 하면 7%의 내용으로 생각하려고만 합니다. 물로 내용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몸짓과 표정으로 하는 83%의 표현들이 더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보면 다 압니다.

생명의 말이 착한 말, 고운 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요즘은 또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된다고도 합니다. 긍정적인 말이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이는지 모릅니다. 독일학자가 쓴 <피로사회>라는 책에 보면 현대인들이 너무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쳐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100km로 달리는데 딴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졸면 안 되니까 박카스를 먹고 마운틴 듀를 먹습니다. 그리고 또 약을 먹습니다. 그리고 컨디션을 먹고 술을 먹습니다. 현대사회는 사람이 마음대로 지치지도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피로합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라는 것도 긍정적인 말, 좋은 말, 고운 말만 쏟아지고 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약이 우울증 약이라고 합니다. 우울한 게 싫기 때문입니다. 우울하면 안 된다고 사회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예 우울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옛날에는 우울하면 그 마음을 그냥 내 것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우울하면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달리는 속도가 늦어지니까 못 마땅합니다. 그래서 약을 먹고 우울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우울하면 그냥 우울해야 합니다.

이번에 중학생 딸을 죽인 목사가 정통교단의 목사이고 유학도 갔다 왔고 40대 후반인데 딱 저입니다. 가끔 저도 우울합니다.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 부정하면 안 됩니다. <피로사회>라고 하는 책에서 보면 현대인의 피로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성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도 긍정의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정의 말이 살리는 말이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의 말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의사들이 약을 짓는데 독초를 쓰기도 합니다. 원래 독을 먹이면 안 되는 것인데 때에 따라서 먹입니다. 그 독이 사람에게 이롭게 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해로운 것인데 그 병에는 독이 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말을 해야지 고운 말,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좋은 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착한 어린이가 아니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착한 어린이셨다면 죽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은 왕따 짓을 너무 강하게 하셔서 모든 기득권자들에게 잡혀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삐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열 받아서 욕도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우리나라로 치면 개OO라는 욕과 같은 뜻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저주 같은 말이었습니다. 착한 그리스도인은 나쁜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팔뚝에 ‘착하게 살자.’ 라고 문신을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도 3차원적인 말, 2차원적인 말, 1차원적인 말이 있습니다. 육신의 말을 하면 안 되고 가치의 말을 하는 것도 지나서 좀 더 근본적인 말, 생명의 말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을 하려면 제발 좀 잘 들어야 합니다. 내 육신에서 오는 소리 가치의 소리가 아니라 정말 내 밑바닥에서 도대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거의 결론처럼 말씀드리면 ‘Tell me the truth myself.'입니다. 나에게 진리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격언이든 속담이든 인류가 압축해서 농축해서 가지고 있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같은 말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고난 가운데 빠졌을 때 그 말이 힘이 됩니다. 말이 길이 되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전제는 원복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그 존재가 원복을 받았다는 정체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의 존재와 원복을 받았다는 정체성을 갖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마음의 문제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self를 둘러싼 ego가 있다면 ego를 뚫고 지나서 self를 찾는 것은 결국 마음의 정함인데 마음을 정하려면 밖에서 말씀이 들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들어와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면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말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습니다. 내 안에 하나의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수많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나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나와 대화할 때 원복을 정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기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리가 아니고 백조입니다. 오리가 마늘을 100일이 먹는다고 백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은 그냥 백조이지 오리가 도를 닦아서 백조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냥 백조인 것입니다. 백조가 날아가는 자기의 원형을 보고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습니다. 원형과 자기 모습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원형은 여러 가지 원형들이 있는데 그것을 내가 정한 것입니다.

오리를 연습하고 사는 것이 사람들의 습성이었는데 연습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 닦고 살면 안 됩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야지만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야.’ 라고 보통은 생각을 하는데 기도 안 해도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기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꾸 기본을 내가 만들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가 급하십니다. 내가 급한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도 됩니다. 내가 뛰어내리면 아버지가 급하십니다. 내 팔자가 만약에 2050년까지 살기로 정해져 있는데 내일 망해서 먹을 것도 없고 갈 데도 없다면 나머지 해 동안 누군가가 먹이실 것입니다. 2050년까지는 떠먹여서라도 살립니다. 내일 갈 사람이라면 50년까지 보험을 들고 집을 산들 그 때까지 살 수 없습니다. 정해진 대로 내일 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고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으로 그것을 그대로 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문제인데 그 마음에 말씀이 와야 합니다. ‘너 백조야.’ 라고 하는 말씀을 잡아야 합니다. ‘어 가네?, 나 오리네?’ 하면 평생 오리처럼 오리 짓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복을 받기로 되어있다고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원복은 나도 받고 남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정하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정했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제일 중요한 믿음이 선물믿음입니다. 뜬금없이 누가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면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다.’ 하며 받으면 됩니다. 그 선물 내 것입니다. 선물의 믿음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밑도 끝도 없이 믿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데 호적도 없습니다. 제 아들이 저한테 호적을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라고 우깁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내가 그것을 잡아버렸다면 잡은 것을 가지고 똑같이 말을 할 때도 이런 차원에서 말을 합니다.

생명의 말은 원복의 말입니다. 원복을 original blessing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 있는 그대로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늪이 아니고 다 덤입니다. 내가 덤으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도 덤이라고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칠판에 점 하나를 찍고서 뭐가 보이느냐고 물으니까 다들 점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하얀 부분이 더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기 시작하면 계속 점만 보이는 것인데 원판은 원복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도 그런 사람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공부 못 해도 상관없고 그냥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원복이라는 것을 원형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 점과 흠과 주름 잡힌 것을 보면 안 됩니다. 원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저희 교회 주일학교 아이한테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빠가 공부도 못 한다고 타박을 하니까 목사님이 자기한테 분명히 얘기했다고 하나님이 만든 걸작품이라고 하셨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따지고 살아야 합니다.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살리는 말은 어떤 때는 정신 차리라고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욕도 할 수 있고 어떤 때는 밉다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가 있다고 합니다. 목욕탕집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전도서 말씀인데 ~~할 때, ~~할 때, 때, 때, 때를 이야기합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있을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말은 ‘사랑해,’ 라는 말만 있는 줄 압니다. 밉다는 말이 살리는 말일 때가 있습니다. 살리는 말이 쉽지 않습니다. 생명은 변화무쌍합니다. 똑같은 말인데 의미가 다릅니다.

제가 강의록이 없습니다. 생명의 말을 주제로 강의를 할 때 다른 곳에 가서는 다른 말을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설교는 52주 똑같은 설교내용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릅니다.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해도 할 때 마다 다릅니다. 적용이 다릅니다. 내가 만난 사건이 다르고 내가 만난 사람이 다르고 내가 만난 상황이 다릅니다. 상황이 다른 그 속에서 살리는 말이 뭘까 생각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언제는 전쟁을 하라고 하고 이제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언제는 가족이 원수라고 하고 또 언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것을 또 다른 기준처럼 생각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다보니까 힘든 것입니다. 살리는 말은 근본의 말, 원형의 말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코드가 다 다른데 어떤 사람은 인정하고 신뢰해 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접촉, 터치해 주는 것입니다. 악수하고 허그하는 것 자체가 살리는 몸의 언어입니다. 세 번째는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옆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선물을 해 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봉사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느끼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물은 별로이고 함께 있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어디에 가고 싶어 할 때 같이 가주면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네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신뢰, 존중, 사랑, 이해입니다. 사람의 관계 안에서 이 네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네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원래 순서가 신뢰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해부터 하려고 합니다. 처음 만나서 관계하려고 하는 사람이 이해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이해는 최소한 관계한 지 3년은 지나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부터 하려고하니까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신뢰입니다. 사람들은 신뢰를 가장 마지막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사랑하고 존중하면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원복을 받은 사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신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100% 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하고 시작한 관계가 거의 대부분 배신과 배반의 역사입니다. 한 번 배신당한 사람은 그런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만 봐도 의심을 합니다. 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이 안경 쓰고 잘 생긴 사람이라면 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신뢰는 배신과 배반을 각오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입니다. 그러다가 신뢰가 깨지면 점수가 깎입니다. 점수를 1,2로 시작해서 10, 20 지나 100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100으로 주고 깎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삼국지’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96년에 미국에 갔는데 가기 전에 유행했던 게임입니다. 그 게임은 옆 나라와 동맹을 하고 연합해서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기도 하는데 신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약속을 처음부터 100으로 주고 게임을 시작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점수가 깎입니다. 30에서 다시 100으로 올라가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신뢰는 한 번 잃으면 다시 회복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100을 주고 시작합니다. 굉장히 성경적인 게임입니다.

그리고 존중은 태도입니다. 관계할 때 존중의 태도를 버리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존중하기 힘듭니다. 사이좋게 싸우라는 말이 싸울 때 존중하며 싸우라는 것입니다. 존중이 깨지는 순간에 관계가 깨집니다. 신뢰, 존중, 사랑, 이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신뢰는 상대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존중은 태도입니다.

사랑은 자기만의 언어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섬김을 하는 것입니다. 눈빛만 봐서는 모릅니다. 실제로 사랑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이해는 0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될 리가 없습니다. 제 아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부엌에 밥을 하러 들어갔는데 한 시간이 돼도 안 나오기에 가봤더니 울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누워 있고 누구는 밥을 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도대체 서로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자는 당연히 밥을 하는 게 아니가? 생각하는 것이고 제 아내는 한 번도 밥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남자는 이겨먹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여학교만 다녔습니다. 남자는 경쟁 상대이지 여자가 남자를 돕는 배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경쟁자가 드러누워 있고 자신이 밥을 해야 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멘붕이 온 것입니다. 결혼하고서 3년 정도 됐을 때 저는 제 아내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제 아내는 10년 만에 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해는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폭력대화> 서 주장하는 것이 I message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폭로하는 것에 대해서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할 때도 지나가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화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삼자대면 해봐야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똑같은 말도 다 자기중심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너는 존중하지 않아.’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네가 나에게 존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불편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군자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드러내줘야 합니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해야지 그것을 객관화해서 화를 표현하면 안 됩니다. 네가 인류학적으로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아느냐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감정입니다.

두 번째는 반드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나를 좀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라고 얘기했을 때 다시 되묻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어떤 면이 내가 너를 존중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들은 얘기를 가지고 소설을 씁니다. 저는 그것을 전문용어로 생쇼라고 합니다. 생쇼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서 Live show로 바꿨습니다. 어떤 말을 듣고 자기가 막 소설을 쓰고 결론도 내립니다. ‘쟤는 나를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라고 결론내립니다.

A라는 사람이 정직하게 A를 말해야 하는데 대부분이 A를 말하지 않습니다. 솔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로에서 뺨을 맞았으면 종로랑 싸워야 하는데 한강에다가 화풀이를 합니다. 화풀이 하는 B를 말합니다. 한강은 B를 듣는 순간 쟤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소설을 쓰면서 C로 듣습니다. C로 듣고 나서 다시 A한테 D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A는 또 E로 듣습니다. 다 외계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다 소설을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Live show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재가 없는 것을 자꾸 실재인 것처럼 소설을 쓰고 사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통과해서 듣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통과하는 과정이 굉장히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듣기 시작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상처를 가지고 듣고 해석합니다. ‘집사님 예쁘시네요?’라고 했는데 ‘지난번에는 안 예뻤단 말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고 보자고 생각합니다. 덕담도 악담으로 듣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벼르고 있습니다. 관계를 깊이 들어가 보면 어마어마한 일들이 많습니다. 소설 쓰지 말고 이해가 될 때 까지 질문해야 합니다.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나는 조금 이해가 안 돼. 나를 좀 이해시켜 줄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들었는데 맞는 거야?’ 라고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1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사람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치지 않을까?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배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안 됩니다. 먼저 하면 지는 것입니다. 먼저 사과하면 지는 것입니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자가 먼저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2016.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