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생명관계 1

생명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8
조회
2332
사람마다 태생과 인생과 영생이라고 하는 생이 있습니다. 생명이 생명다워져서 다른 생명과 연결하는 과정이 어떠해야할까요? 사실은 존재가 다이고 관계가 다이고 공동체가 다입니다. 존재가 있어야 관계도 하고 공동체도 이루고 살아갑니다. 존재가 관계가 없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 100%인 것이기 때문에 존재이면서 관계이면서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 자체가 갈등입니다. 왜냐하면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구유가 깨끗해지려면 외양간에 소가 없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생명이 있는 한 구유는 늘 더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관계는 갈등이고 그 갈등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어떻게 그것을 공유하고 극복하고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근원으로 가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뭄이 있고 홍수가 나면 나무는 살려고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살려고 생명력을 가지고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근본적인 생명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물과 빛이라고 하는 생명의 근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두 번째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늘 온전과 완전을 추구합니다. 온전함이라는 것은 자기의 수준의 최대치입니다. 완전함은 모든 것의 절대기준입니다. 내 수준만큼을 못 하면 오류가 되고 수준을 뛰어넘어서 하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한계가 없는 것이 완전입니다. fullness가 온전이고 Perfection이 완전입니다. 오류는 자기 분량만큼 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한계는 분량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전과 완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늘 생명을 낳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창세기로 얘기하면 육적인 생명이고 마태복음으로 얘기하면 영적인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육적인 자녀든 영적인 자녀든 생명을 낳으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생명은 근원에 관심이 있는 존재이고 늘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귀와 눈과 입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열리는 것도 귀이고 가장 늦게 닫히는 것도 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땅의 소리를 듣고 삽니다. 땅의 소리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정의 욕구, 신뢰의 욕구,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비교하고 경쟁하는 마음과 만나면 욕망이 됩니다. 이미 마음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병명은 의사들이 서로 합의해서 만든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것을 의사들이 모여서 병이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다 돌아다니는 환자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사람은 두, 세 가지 정도의 정신병적 증상을 가지고 있고 서너 가지 정도의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병원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도 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에 보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들리는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에코 들어간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도 있고 진리의 소리도 있습니다. 그것을 빼고도 우리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노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비교하고 경쟁하는 소리를 듣고 삽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것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불신은 소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늘의 소리는 존재의 소리고 절대의 소리입니다. 존재가치, 절대가치를 말하는 소리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라는 것이 존재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이 나에게 주신 복이야 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과학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과학의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만나서 물이 된다고 과학의 언어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물도 똑같은 물이 아닙니다. 육각수도 있고 결정이 찌그러진 물도 있습니다. 실험자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서 물의 결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실험을 해봤습니다. 똑같은 밥 두 덩이에 한 쪽에는 밉다는 말을 계속 하고 한 쪽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했더니 밉다는 말을 들은 밥에는 흉측한 곰팡이가 피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밥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곰팡이가 피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닌 것입니다. 과학의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믿음입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덟 번의 강의 동안 계속 했던 얘기가 결국에는 나도 모르지만 복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믿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믿음이 선물믿음입니다. 선물은 주면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다.’ 하고 받는 것입니다. 받고서 어떻게 갚아야 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give & take 나쁜 사랑입니다. 그냥 마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이 결국에는 존재이고 절대라고 하는 기준의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셨는데 이제부터는 제사 안 지낸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는 조상님들 다 굶으시겠다고 믿음의 말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거 미신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말은 또 다른 믿음의 말로 이겨야 합니다. 제가 하늘에 가면 뷔페가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뷔페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해봤기 때문에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 이후로 제사를 그만 뒀습니다.

내 무슨 소리를 듣고 사는지에 따라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에 따라서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 불신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귀가 열려야 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은 말을 들어도 들을 귀가 없을 때는 들리지 않다가 귀가 열리면 들립니다.

성경에서 제일 악한 동물이 있는데 귀머거리 독사입니다. 뱀은 원래 귀가 없고 피부로 느끼는 동물입니다. 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귀머거리 독사입니다. 내가 들어야 하는데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소유냐 존재냐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삽니다. 그런데 존재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합니다. 땅의 소리에 귀가 먹어야 하고 하늘의 소리에 귀가 열려야 합니다. 땅의 소리는 천둥과 같은 소리이고 번개와 같은 소리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 말만 하고 사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하늘의 소리는 미세하고 힘이 없는 소리입니다.

눈은 보는 것인데 사람들이 상황을 보고 사건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상황과 사건과 사람을 보니까 늘 불안합니다. 사람의 감정이 1초에도 일곱 번이나 여덟 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좋았다 싫었다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어떤 때는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붙어 다니다가도 나중에는 원수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신뢰하고 사건을 신뢰하고 상황을 신뢰해도 또 바뀝니다. 신뢰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가치, 절대가치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운전을 하는데 몸을 핸들에 바짝 붙이고 앉아서 급하게 핸들을 꺾으며 불안하게 운전을 하기에 100미터나 200미터 앞을 보고 운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전이 여유로워졌습니다. 인생 70년이나 80년을 산다고 하는데 70년 80년의 큰 로드맵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지금 여기서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은 사는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더 다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죽고 나서 100년 뒤에나 뜰 것 같습니다. 적어도 100년 뒤에도 가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기 욕심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었어.’ 라는 얘기를 들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뒈졌다고 하는 사람과 죽었다고 하는 사람과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뒈진 사람은 잘 간 것이고 죽은 사람은 평범하게 살았다면 돌아가신 분은 뭔가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적어도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해야 잘 살다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었다고 남들이 시원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이 조금 더 본질적인 것, 근본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보지 않는 이상 계속 우리의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은 말을 하는데 우리는 매일 땅의 말을 하고 삽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말 안에 죽음의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요.’ 라고 하는 말조차도 죽이는 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고운 말을 써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운 말도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나이스하고 좋은 말만 하는데 잘 들어보면 다 욕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다 하나님인데 다 자기자랑인 사람이 있습니다. 말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운 말만 하셨을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로 치면 ‘개OOO’ 라는 욕입니다. 욕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살리는 말입니다. 하늘의 말, 생명의 말,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살리는 말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를 살리려는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세 가지 말을 하면 사람이 살아난다고 하는 외국의 어느 무리들이 있습니다. 씨크릿도 우주와 사람이 합일이 되면 사람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사실 말이 세계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93%는 표정이나 소리나 몸짓이고 나머지 7%만 소리라고 합니다. 착한 말 고운 말 쓰면 된다는 것이 착각입니다. 아기가 엄마라는 소리를 만 번은 들어야 입으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소리를 들어야지 그 소리를 내서 의미를 전달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열심히 들어야지만 실제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