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1. 1
말씀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50
조회
2373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삶의 본질을 잘 모르니까 그냥 종교적인 언어로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관점으로만 보는데 그 안에서의 메카니즘, 중요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로마서를 공부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화 <메트릭스>를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절대자가 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로마서의 말씀에 나오는 과정과 같습니다. 감독이 흰두교와 기독교를 섞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얘기하는데 제가 청년들하고 로마서성경공부를 할 때 메트릭스를 꼭 보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born again,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한 원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결국 영의 문제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영의 문제를 일반적인 단어로 얘기하면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마음이 원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입니다.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과 그냥 자포자기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인정하고 살면서도 거기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미운오리새끼가 원래 백조였습니다. 미운오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체성은 환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백조는 원래 본질입니다. 자기의 모습은 백조인데 환경으로 인해 계속 오리라는 인식을 하게 되어서 오리처럼 살아야 된다고 착각하고 산 것입니다. 그 안에 다른 오리도 있는데 오리는 백조로 살 수 없습니다. 미운오리새끼만 백조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DNA가 백조인데 환경이 오리의 환경이니까 오리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오리와 백조는 덩치가 다릅니다. 백조가 자기 덩치가 다른 오리들 보다 크니까 매일 다이어트 해야 된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그리고 뒤뚱뒤뚱도 하지 않고 제대로 걸으니까 뒤뚱뒤뚱 걸으려고 연습하고 삽니다. 재미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얘기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연습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매여서 그렇게 살아야지만 자기의 존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백조로 살아야 하고 원복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복이라는 자기의 본질로 살아야지 자꾸 환경과 학습되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인식 속에서 그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연습하고 사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사는 것이 원래 쉬운 것입니다. 연습하고 사는 것이 진짜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삽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삽니다. 원래부터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사람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안 지을 사람인데 종교성에 빠지면 십계명의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두 가지 율법에 잡혀서 해야 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 이 싸움 때문에 죽을 맛이고, 결정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본래적으로 근원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습대로 살면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오리들은 죽었다 깨도 백조가 될 수 없습니다. 오리지날, 오리가 OO을 해도 날 수 없습니다. 이틀 동안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오는 바람에 노숙자처럼 있다가 3일 째 되는 날 아들하고 찜질방에 갔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니까 땀이 난다고 더워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아야지만 지금 곰인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아빠도 곰이냐고 아빠도 사람이니까 자기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재미있게 놀다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곰이 100일 동안 마늘을 먹어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상징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를 닦고 수련을 하고 뭔가 하면 오리가 백조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그냥 원래 백조입니다. 누구는 오리고 누구는 백조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복을 깨달은 사람은 그냥 원래 백조입니다. 원복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그냥 오리입니다. 원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념이라고 한다면 백조냐 오리냐 라고 했을 때 나는 백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모습은 백조처럼 살지 못하는 환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알았습니다. 첫 번째는 날아가는 백조의 모습을 보면서 ‘와 나도 저렇게 날아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원형을 봤습니다. 원형을 보고 나서 두 번째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습니다. 정체성입니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가 바라고 자기가 원했던 그 얼굴하고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미움 받을 용기> 보다 더 중요한 책이 <미운 오리 새끼>입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순간에 ‘아 내가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모습이 내 모습이었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날아갑니다. 원복이 원형을 본 것이고 그 원복 안에서 물에 비친 자기의 정체성을 보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이 거울을 보고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입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이 대단한 직면입니다. 누군가를 어떤 문제를 직면한다는 것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서 있다는 것이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본 사람만이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쓰다듬고 아무리 지워도 안 되는 점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울이라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고 싶지 않고 셀카 찍어서 뽀샵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가끔 물어보고 싶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물어보고 내 이름이 답으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곡된 거울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제 딸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는데 사진을 보면 죄다 뽀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 딸이 저를 닮아서 피부가 가무잡잡합니다. 제 딸을 미국에서 낳았는데 미국에서는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때 아빠가 같이 있습니다. 저 보고 탯줄을 자르라고 하면서 여자애들은 배꼽이 예뻐야 하니까 짧게 자르라고 했습니다. 막 나왔을 때 정말 흑인아기가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sns에 올리는 사진을 보면 다 허였습니다. 왜곡하는 것입니다.
거울은 철저하게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거울을 봐야 합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중요한 포인트가 거울을 보라는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레오는 컴퓨터 속에서 살고 있는 건전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나중에 현실을 깨닫고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선택해야하는 순간에 행복하지만 건전지로 사는 삶으로 살 것인지 불행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가 관념적이고 사람들에게 틀을 주고 그 안에서 아편처럼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종교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외롭고 힘들지만 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영적인 세계를 알면 알수록 외롭고 그렇지만 진짜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종교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짓 종교들은 자꾸 현실을 왜곡시키면서 외면하게 하고 그 안에서 뭔가 잘못 된 거짓된 기쁨으로 살게 만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살아있는 나무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는 가뭄이나 홍수의 때에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반드시 생명의 근원인 무엇인가를 찾아서 뿌리를 깊이 내리든지 뭔가 찾을 수밖에 없고 구할 수밖에 없고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나무가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자라고 있어서 왜 그런지 물어봤습니다. 그 나무는 빛을 받으려고 그렇게 드러누운 것입니다. 밀림의 나무들이 곧게 쭉쭉 자라나는 이유도 햇빛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빛과 물이라고 하는 생명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원래 백조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고 질문을 추구하고 산다는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원복을 받은 존재이고 동시에 그 속에서 다른 삶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뭄과 홍수는 나의 한계상황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자기 인생에서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경험해야지만 진짜 생명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백억 벌었으면 좋았을걸.’ ‘서울대학교 갔으면 좋았을 걸.’하고 죽는 사람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라고 근원의 말을 하고 삽니다. 근본적인 말, 백조의 말을 하고 삽니다. 미온오리 새끼가 오리처럼 연습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뒤뚱뒤뚱 하지 않고 삽니다. 왜냐하면 자기 체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또 나는 왜 뒤뚱뒤뚱 하지 못할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뒤뚱뒤뚱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 백조처럼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복입니다.
원복은 내가 오리인데 연습하고 노력하고 100일 기도를 하고 3천 배를 해서 백조가 돼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교인들한테 노력하지 말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힘 빼라고 합니다. 무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자연스러워집니다. 목사님들끼리 얘기하다가 어떤 목사님은 교인한테 전화가 오면 목소리를 깔고 ‘할렐루야’하고 전화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는 목소리를 깔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근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가짜인 것입니다.
진짜 가짜와 가짜 진짜 둘 다 문제입니다. 충성스러운 나라의 간신과 간신 나라의 충신이 있다면 누가 더 나쁜 놈일까요?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원복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계속 한계상황으로 오고 그것이 죽음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어야지만 진짜를 추구하고 근본을 추구하고 내 몸의 체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죽음의 자리, 한계의 자리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이유가 그 사람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한테 뭔가 기대했는데 다르게 반응하니까 계속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한계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일까?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만으로도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병만 나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낫고 나면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공부 좀 하면 어느 대학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진짜 존재로 인정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로 인정해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그것을 놓지 못하고 죽음의 자리로 가지 못할까요? 40년 동안 살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고 경험 속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짜이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사는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할까? 라고 생각해 보면 죽음의 자리 속에서 다시 이해되고 뿌리 깊은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때 흙속의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력이 어떻게 오는지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결국 영의 문제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영의 문제를 일반적인 단어로 얘기하면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마음이 원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입니다.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과 그냥 자포자기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인정하고 살면서도 거기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미운오리새끼가 원래 백조였습니다. 미운오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체성은 환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백조는 원래 본질입니다. 자기의 모습은 백조인데 환경으로 인해 계속 오리라는 인식을 하게 되어서 오리처럼 살아야 된다고 착각하고 산 것입니다. 그 안에 다른 오리도 있는데 오리는 백조로 살 수 없습니다. 미운오리새끼만 백조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DNA가 백조인데 환경이 오리의 환경이니까 오리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오리와 백조는 덩치가 다릅니다. 백조가 자기 덩치가 다른 오리들 보다 크니까 매일 다이어트 해야 된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그리고 뒤뚱뒤뚱도 하지 않고 제대로 걸으니까 뒤뚱뒤뚱 걸으려고 연습하고 삽니다. 재미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얘기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연습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매여서 그렇게 살아야지만 자기의 존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백조로 살아야 하고 원복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복이라는 자기의 본질로 살아야지 자꾸 환경과 학습되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인식 속에서 그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연습하고 사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사는 것이 원래 쉬운 것입니다. 연습하고 사는 것이 진짜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삽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삽니다. 원래부터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사람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안 지을 사람인데 종교성에 빠지면 십계명의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두 가지 율법에 잡혀서 해야 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 이 싸움 때문에 죽을 맛이고, 결정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본래적으로 근원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습대로 살면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오리들은 죽었다 깨도 백조가 될 수 없습니다. 오리지날, 오리가 OO을 해도 날 수 없습니다. 이틀 동안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오는 바람에 노숙자처럼 있다가 3일 째 되는 날 아들하고 찜질방에 갔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니까 땀이 난다고 더워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아야지만 지금 곰인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아빠도 곰이냐고 아빠도 사람이니까 자기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재미있게 놀다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곰이 100일 동안 마늘을 먹어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상징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를 닦고 수련을 하고 뭔가 하면 오리가 백조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그냥 원래 백조입니다. 누구는 오리고 누구는 백조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복을 깨달은 사람은 그냥 원래 백조입니다. 원복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그냥 오리입니다. 원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념이라고 한다면 백조냐 오리냐 라고 했을 때 나는 백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모습은 백조처럼 살지 못하는 환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알았습니다. 첫 번째는 날아가는 백조의 모습을 보면서 ‘와 나도 저렇게 날아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원형을 봤습니다. 원형을 보고 나서 두 번째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습니다. 정체성입니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가 바라고 자기가 원했던 그 얼굴하고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미움 받을 용기> 보다 더 중요한 책이 <미운 오리 새끼>입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순간에 ‘아 내가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모습이 내 모습이었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날아갑니다. 원복이 원형을 본 것이고 그 원복 안에서 물에 비친 자기의 정체성을 보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이 거울을 보고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입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이 대단한 직면입니다. 누군가를 어떤 문제를 직면한다는 것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서 있다는 것이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본 사람만이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쓰다듬고 아무리 지워도 안 되는 점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울이라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고 싶지 않고 셀카 찍어서 뽀샵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가끔 물어보고 싶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물어보고 내 이름이 답으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곡된 거울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제 딸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는데 사진을 보면 죄다 뽀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 딸이 저를 닮아서 피부가 가무잡잡합니다. 제 딸을 미국에서 낳았는데 미국에서는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때 아빠가 같이 있습니다. 저 보고 탯줄을 자르라고 하면서 여자애들은 배꼽이 예뻐야 하니까 짧게 자르라고 했습니다. 막 나왔을 때 정말 흑인아기가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sns에 올리는 사진을 보면 다 허였습니다. 왜곡하는 것입니다.
거울은 철저하게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거울을 봐야 합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중요한 포인트가 거울을 보라는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레오는 컴퓨터 속에서 살고 있는 건전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나중에 현실을 깨닫고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선택해야하는 순간에 행복하지만 건전지로 사는 삶으로 살 것인지 불행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가 관념적이고 사람들에게 틀을 주고 그 안에서 아편처럼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종교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외롭고 힘들지만 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영적인 세계를 알면 알수록 외롭고 그렇지만 진짜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종교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짓 종교들은 자꾸 현실을 왜곡시키면서 외면하게 하고 그 안에서 뭔가 잘못 된 거짓된 기쁨으로 살게 만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살아있는 나무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는 가뭄이나 홍수의 때에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반드시 생명의 근원인 무엇인가를 찾아서 뿌리를 깊이 내리든지 뭔가 찾을 수밖에 없고 구할 수밖에 없고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나무가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자라고 있어서 왜 그런지 물어봤습니다. 그 나무는 빛을 받으려고 그렇게 드러누운 것입니다. 밀림의 나무들이 곧게 쭉쭉 자라나는 이유도 햇빛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빛과 물이라고 하는 생명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원래 백조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고 질문을 추구하고 산다는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원복을 받은 존재이고 동시에 그 속에서 다른 삶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뭄과 홍수는 나의 한계상황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자기 인생에서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경험해야지만 진짜 생명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백억 벌었으면 좋았을걸.’ ‘서울대학교 갔으면 좋았을 걸.’하고 죽는 사람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라고 근원의 말을 하고 삽니다. 근본적인 말, 백조의 말을 하고 삽니다. 미온오리 새끼가 오리처럼 연습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뒤뚱뒤뚱 하지 않고 삽니다. 왜냐하면 자기 체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또 나는 왜 뒤뚱뒤뚱 하지 못할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뒤뚱뒤뚱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 백조처럼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복입니다.
원복은 내가 오리인데 연습하고 노력하고 100일 기도를 하고 3천 배를 해서 백조가 돼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교인들한테 노력하지 말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힘 빼라고 합니다. 무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자연스러워집니다. 목사님들끼리 얘기하다가 어떤 목사님은 교인한테 전화가 오면 목소리를 깔고 ‘할렐루야’하고 전화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는 목소리를 깔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근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가짜인 것입니다.
진짜 가짜와 가짜 진짜 둘 다 문제입니다. 충성스러운 나라의 간신과 간신 나라의 충신이 있다면 누가 더 나쁜 놈일까요?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원복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계속 한계상황으로 오고 그것이 죽음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어야지만 진짜를 추구하고 근본을 추구하고 내 몸의 체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죽음의 자리, 한계의 자리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이유가 그 사람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한테 뭔가 기대했는데 다르게 반응하니까 계속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한계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일까?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만으로도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병만 나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낫고 나면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공부 좀 하면 어느 대학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진짜 존재로 인정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로 인정해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그것을 놓지 못하고 죽음의 자리로 가지 못할까요? 40년 동안 살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고 경험 속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짜이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사는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할까? 라고 생각해 보면 죽음의 자리 속에서 다시 이해되고 뿌리 깊은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때 흙속의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력이 어떻게 오는지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