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2. 1
말씀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52
조회
2266
원리가 결국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이고 그 마음이라는 것이 자기가 뜻하는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오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생명체, 또 다른 주체가 들어와서 계속 머무를 수 있는 것이 건강한 삶,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결국에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성품이 변하고 관계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본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본질로 가지 못할까요? 그것은 절망의 시간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상황은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 자체가 절망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을 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난지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난지도는 먼지투성이이고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조금 나은 쓰레기를 차지했다고 해서 좋아하고 조금 못한 쓰레기를 차지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왜 살아야 되는지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야합니다.
성경에 보면 100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 중에 1마리를 잃어버려서 목자가 99마리를 들에 두고 1마리를 찾아갑니다. 목사님들도 그런 목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99:1이면 조직의 원리로 보면 하나를 잘라버려야 맞습니다. 99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쫓아서 갑니다. 거기에는 계산이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를 향한 목자의 마음만 있습니다. 김OO성도님이 저에게 잃어버린 한 가지가 삶의 목적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9가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에 99가지를 붙잡고 있느라고 한 가지 목적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한테도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종교인으로 또는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을 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관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하면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데 이것은 관계를 수단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재로 관계하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오늘 아침에 우리 집도 엄마가 아침에 밥을 해 주고 아빠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엄마도 돈을 벌고 아빠도 돈을 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매일 성경공부 하러 다니고 돈 조금 받는 걸로 어떻게 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안 되는 것이라고 얘기해줬습니다. 엄마 아빠가 돈을 받고 너희들을 키운다고 생각하면 돈을 줄 수 있겠느냐고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안 받고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근심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생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생존의 관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생존을 생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생존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는 생명관계로 가야 되는 것이고 생명관계가 있는 그대로, 존재로, 목적관계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는 상대가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팔자관계입니다. 팔자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공동체에서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적용점이 그 공동체를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는 갈 곳이 없는 은혜입니다.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관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수도를 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이 수도원장입니다. 수도원장의 권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년 정도 수도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성장을 못하니까 정주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정주수도원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내 입맛을 바꿉니다. 그 자체가 선택할 수 없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인데 내 삶의 뒤를 돌아보면 기본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제 아내를 선택할 때도 나도 모르게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라디오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청년들이 듣는 방송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을 초대해서 사모님을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고 물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나오셔서 기도해서 만났다는 분도 있고 다양한 대답들을 하셨는데 저는 예뻐서 만났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고 만나시지 않았느냐고 하기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뭔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본질대로 자기의 체질대로 그렇게 선택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겸손하게 내가 어떤 관계를 추구하고 어떤 본질을 추구하고 사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 때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미팅을 했는데 수도여고 학생 다섯 명과 미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예쁜 여학생이 저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당시에 결혼을 안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깝습니다. 가끔 뭐하고 사나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보지 않은 길,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든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살았다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사는데 사실은 선택한 길은 생명이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죽음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본질 자체가 나도 모르게 생명관계를 하고 있고 나도 모르게 목적관계를 하고 살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아닌 것처럼,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은 없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체질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자체가 생명이고 본질입니다. 생명이 가지고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근원에 대한 관심과 추적과 생명의 근원과 연결하려고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살아있는 것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든지 빛을 더 받기 위해서 엎드리든지 생명의 근원과 계속 연결하려고 하는 요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도 않고 옆으로 눕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하려고 하는 근본이 있습니다. 자라나기 위한 요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성장과 성숙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포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성숙해지다 보면 죽고 또 다른 세포가 나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죽지 않는 한 계속 성장과 성숙의 관계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되어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생명을 만듭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이 말씀이 생명력을 얘기하고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낳게 되어있다는 것이고 신약으로 넘어가면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고 있고 생명의 공동체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내가 생명의 근원과 연결시키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동시에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결국에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성품이 변하고 관계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본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본질로 가지 못할까요? 그것은 절망의 시간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상황은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 자체가 절망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을 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난지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난지도는 먼지투성이이고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조금 나은 쓰레기를 차지했다고 해서 좋아하고 조금 못한 쓰레기를 차지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왜 살아야 되는지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야합니다.
성경에 보면 100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 중에 1마리를 잃어버려서 목자가 99마리를 들에 두고 1마리를 찾아갑니다. 목사님들도 그런 목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99:1이면 조직의 원리로 보면 하나를 잘라버려야 맞습니다. 99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쫓아서 갑니다. 거기에는 계산이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를 향한 목자의 마음만 있습니다. 김OO성도님이 저에게 잃어버린 한 가지가 삶의 목적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9가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에 99가지를 붙잡고 있느라고 한 가지 목적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한테도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종교인으로 또는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을 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관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하면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데 이것은 관계를 수단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재로 관계하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오늘 아침에 우리 집도 엄마가 아침에 밥을 해 주고 아빠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엄마도 돈을 벌고 아빠도 돈을 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매일 성경공부 하러 다니고 돈 조금 받는 걸로 어떻게 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안 되는 것이라고 얘기해줬습니다. 엄마 아빠가 돈을 받고 너희들을 키운다고 생각하면 돈을 줄 수 있겠느냐고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안 받고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근심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생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생존의 관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생존을 생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생존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는 생명관계로 가야 되는 것이고 생명관계가 있는 그대로, 존재로, 목적관계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는 상대가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팔자관계입니다. 팔자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공동체에서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적용점이 그 공동체를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는 갈 곳이 없는 은혜입니다.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관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수도를 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이 수도원장입니다. 수도원장의 권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년 정도 수도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성장을 못하니까 정주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정주수도원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내 입맛을 바꿉니다. 그 자체가 선택할 수 없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인데 내 삶의 뒤를 돌아보면 기본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제 아내를 선택할 때도 나도 모르게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라디오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청년들이 듣는 방송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을 초대해서 사모님을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고 물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나오셔서 기도해서 만났다는 분도 있고 다양한 대답들을 하셨는데 저는 예뻐서 만났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고 만나시지 않았느냐고 하기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뭔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본질대로 자기의 체질대로 그렇게 선택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겸손하게 내가 어떤 관계를 추구하고 어떤 본질을 추구하고 사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 때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미팅을 했는데 수도여고 학생 다섯 명과 미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예쁜 여학생이 저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당시에 결혼을 안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깝습니다. 가끔 뭐하고 사나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보지 않은 길,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든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살았다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사는데 사실은 선택한 길은 생명이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죽음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본질 자체가 나도 모르게 생명관계를 하고 있고 나도 모르게 목적관계를 하고 살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아닌 것처럼,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은 없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체질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자체가 생명이고 본질입니다. 생명이 가지고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근원에 대한 관심과 추적과 생명의 근원과 연결하려고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살아있는 것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든지 빛을 더 받기 위해서 엎드리든지 생명의 근원과 계속 연결하려고 하는 요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도 않고 옆으로 눕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하려고 하는 근본이 있습니다. 자라나기 위한 요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성장과 성숙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포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성숙해지다 보면 죽고 또 다른 세포가 나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죽지 않는 한 계속 성장과 성숙의 관계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되어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생명을 만듭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이 말씀이 생명력을 얘기하고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낳게 되어있다는 것이고 신약으로 넘어가면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를 하고 있고 생명의 공동체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내가 생명의 근원과 연결시키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동시에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