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말씀 2. 2

말씀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52
조회
881
내가 생명의 관계를 하고 생명의 존재로 살고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고 자라난다는 것은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것, 신성하다고 하는 의미를 사람들은 어느 시간에 있거나 어느 공간에 가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강대상에 함부로 올라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구약에 있는 말씀에 보면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그 곳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과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에덴동산, 예루살렘으로 간다든지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두고 그 시간이 되면 거룩하고 그 공간에 들어가면 거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동쪽에 가서 귀인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동쪽이라고 하는 공간으로 가서 어떤 존재를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어느 시간에 있든지 어느 곳에 가든지 내가 복의 존재입니다. 내가 주체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어떤 목사님한테 얘기하니까 그 목사님이 완벽한 교회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가는 순간 그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천국에 들어갔다면 그 공간은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지옥이 됩니다.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열흘 지나고 일 년 지나고 영원히 똑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면 더 이상 천국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이 뷔페식당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 하루 실컷 먹고 그 다음 날 또 실컷 먹고 그것을 영원히 먹는다면 그 곳이 지옥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 갔는데 학생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 보니까 정말 천국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먹어 보니까 그 다음에는 먹을 게 없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있는 음식은 똑같은데 먹을 게 없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그 음식을 먹으라고 한다면 정말 지옥 같을 것입니다.

우린 다 원수랑 살고 있는데 그 사람과 처음부터 원수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좋아서 만나고 내가 좋아서 결혼했던 그 사람의 어떤 면이 이제는 원수처럼 느끼게 하는 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영원히 산다면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그 천국에 갔다면 아마도 한 달은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그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 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으로 가야지만 천국을 경험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삽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는 내가 지옥에 가도 그 곳이 천국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유대교의 아버지이고 기독교의 아버지이고 이슬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아브라함이 어디를 가든 그 곳이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축복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으로 가야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는 순간 그 곳이 축복의 장소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지옥에 가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천국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축복 받는다고 착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생명은 어느 시간과 어느 장소에든 구애받지 않고 있습니다. 무당이 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작두를 타서 보여줍니다. 작두를 타면서 자신이 신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와 신이 같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곳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곳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교회만 복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제가 깜짝 놀랐던 것이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이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정신 차리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환경과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성이라고 하면 기도 같은 종교적인 행위로만 생각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독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모르다가 철학책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또는 관계를 통해서 또는 어떤 영적인 경건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신을 만나는 통로가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곳에든지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개념으로부터 떠나야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려면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내 본질이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원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안에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의 신이 있습니다. 그 신은 머리카락이 앞에 있고 뒤는 대머리이고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의 신이 왔을 때 앞에서 빨리 잡지 않으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대머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앞에서 잡는 것과 같은데 나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 목적의 관계, 상호의존의 관계는 엄밀히 따지면 스승과 제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늘 가르쳐야된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는 매일 받으려고 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의존의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의존의 관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 할 수 있는 관계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독립해야 합니다. 독립해서 상호의존 하는 관계로 자라나야 진짜 관계가 됩니다.

기독교도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신이라고 하는 존재와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매일 신에 종속되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신으로 대우하는 데 까지 높이셨습니다. 그래서 상호의존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의존하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절대의존 하는 관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에는 동등한 상호의존으로 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하고 같이 동등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낮추시고 사람은 높이셨습니다.

관계의 단계가 있습니다. 최고의 단계는 부부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내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네 살 차이인데 결혼 전에는 오빠라고 부르면서 온통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어있었고 얼마나 부드럽게 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맞먹고 대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부부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난 것입니다. 상호의존의 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늘 깨어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늘 경험하고 관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가 얘기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돌이 얘기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돌들이 일어나서 외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무가 신음하고 세상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전세계약을 잘 못해서 천사백만 원 때문에 일주일 내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데 같이 가신 전도사님이 갑자기 뒤통수를 누가 세게 치면서 천 사백만 원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머릿속에 돈 생각이 가득하고 진짜 중요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진짜 중요한 것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제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에게 말을 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어느 곳에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있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데 그냥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 계시다는 표현을 제가 좋아합니다.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귀신입니다. 옛날에 어머니께서 떡을 하셔서 장독대에도 화장실에도 다 갖다 두라고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저는 투덜거리면서 귀신들이 다 같이 모여서 먹으면 안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의 특징이 자기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귀신이 물에서 나오면 힘을 못 씁니다. 장독귀신은 장독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에만 있다고 한다면 교회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은 이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성에 빠지는 순간 자기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어느 곳에든지 어떤 시간에든지 떠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도 떠다닙니다. 문제는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95.9에 맞추면 라디오 소리가 들리듯이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떠다니는 말씀을 내가 잡는 것입니다. 전문용어로 ‘아멘’ 이라고 합니다. 아멘은 히브리어인데 I agree with you.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종교의 아멘은 단순히 동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했더니 ‘아멘’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일지언정 그 말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도리 멋있냐고 물었을 때 ‘아멘’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원래 내가 그 말에 목숨 걸고 생명 걸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아멘’ 목숨 걸겠다고 하는 순간 그것이 신앙이 됩니다. 그러면 이 신앙이 내 체질을 바꿉니다. 체질이 바뀌면 내 삶이 생활화가 됩니다. 그리고 생활화 된 것이 생명이 됩니다. 목숨 걸기 시작하니까 다른 체질이 되면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10시 30분 전에 한 사람만 빼고 다 왔는데 저는 그것이 말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10시 20분까지 오라는 글을 보지 않았으면 10시 30분 다 돼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시 20분까지 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서 서둘러서 20분까지 맞춰서 왔습니다. 제가 그 말을 신앙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의 습관, 체질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 생활이 됩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그 말에 대해 아멘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격언에 아멘을 해버렸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의 구조가 바뀝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뇌과학으로 가는데 반복이 뇌도 바꾼다고 합니다. 신앙으로 받아서 체질이 바뀌는 순간에 내가 쓰던 머리가 아니라 다른 머리를 쓰기 시작하니까 다른 머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것이 체질이 되고 생활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