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계시록 O.T 3

요한계시록
작성자
ucajime
작성일
2016-03-29 00:08
조회
1034
말세는 세상의 끝이고 시간적으로 얘기하면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입니다. 말세라고 하는 세상의 끝에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 그것은 순차적이고 순서적인 시간을 얘기합니다. 구약의 시간, 신약의 시간, 교회의 시간, 예수님의 시간, 7년 대환란, 천년 왕국 이런 식의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을 구별하는 것이 세대주의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말세였고 지금도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계속 말세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속은 것입니다. 세상의 끝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말세라고 하는 시간 속에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으니까 말세를 준비해야 된다고 다 팔고 산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말세 신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 될 시간의 개념은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종말론적 시간이라는 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첫째 아들, 첫째 양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account,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신앙이라는 것은 처음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고 마지막도 하나님이 계산하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시간의 개념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 속에 하나의 수직적인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6시간 계셨습니다. 3년과 6시간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는 정말 짧은 시간인데 그 시간이 카이로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시간관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70이나 80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인데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중요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시간 속에서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요? 최인호씨가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는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 속에 또는 지구의 시간 속에서 2천 년이라는 시간은 1초 밖에 안 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초 전에 계셨던 그 분은 나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짧은 그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되려면 종말론적 시간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세론적 시간관인데 내가 오늘 교통사고로 죽는다면 그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말세론적 시간관이라면 종말론적 시간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보는 관점입니다.

두 번째 공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공간이 가나안 땅이었고 또는 예루살렘이었고 나중에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 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거할 곳을 찾는다고 하셨는데 그 거할 곳이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몸이 가나안 땅이고 예루살렘이고 성전이고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공간적인 개념이어서 어디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나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매일 뷔페를 먹어야 한다면 처음에는 천국이지만 나중에는 지옥이 될 것입니다. 사람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좋고 예의도 차리고 하지만 나중에 가까워지면 좀 싫증이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내 몸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로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 시대 그 곳에서 살아내야 할 목적,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면 다 헛되게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갖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똑같이 기다란 숟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 지옥에서는 자기 혼자 먹으려고 애쓰다가 굶어죽고 천국에서는 서로 먹여줘서 잘 산다고 합니다. 떠 주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어떤 강의를 들었는데 혼자서 만 원을 가지고 있는 것과 열 명이서 천 원씩 나눠 갖고 있는 만원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 만원 안에는 열 사람의 관계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돈의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 원의 가치를 넘어서 엄청난 사람의 가치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똑같이 천국에서는 서로 먹여주는데 먹여주는 것이 마음입니다.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교회이고 그 교회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마다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이 있어서 두 가지가 얽혀있는 것입니다.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 종말론적 시간을 날마다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 공간, 교회라는 개념을 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어떤 인식을 하고 이 세상을 살아낼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 교회, 세계의 개념과 하나님의 나라 세계, 교회의 개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역사 교회의 개념이 있습니다.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교회라고 하는 존재, 공동체 안의 개인
개인주의가 살아있어야 독립이 되는 것이고 독립된 개인이 모여서 교회라고 하는 또 다른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 하나님 나라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이 D-day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V-day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D-day와 V-day라고 하는 관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승리의 나라가 올 때까지 세계를 품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전까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관점입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가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끌어 와야지만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서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60년 이후에 하나님 나라, 세계,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교회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를 품고 계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첫 번째 축사 했던 내용이 하나님은 이곳에만 계실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우주에 계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 건물 안에 계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교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세계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 교회는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그냥 단순하게 버려질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품고 가야될 세계입니다. 미시오데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선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면 자기네 문화를 아프리카에 전해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프리카 문화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도 1960년 이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19세기의 신학을 가지고 20세기의 구조 아래 21세기의 사람들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따분하고 교회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들한테 중세를 꿈꾸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영삼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교회 가니까 다 장로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전도사니까 잘릴까 봐 싫어도 아무 소리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대통령도 장로교 통합측이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감리교신자였고 김영삼대통령도 합동측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장로님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해도 기독교의 관점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들이 화가 나서 왜 마음대로 드리느냐고 했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세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회라는 시스템은 원래 또 다른 시스템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일 심방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가정의 신으로 만들어주면 됩니다. 제가 로컬처치를 잘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심방을 잘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제 성향이 촉촉하지 않습니다. 인간애는 부족하고 인류애만 있습니다. 사람들 자주 만나서 아기자기하게 관계하고 우리 교회 나오면 구원 받고 다른 교회 가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면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마케팅을 해도 먹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세계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개념은 세계라고 하는 물질, 구조가 아니라 역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건 예를 들어서 출애굽 사건, 십자가 사건 같은 사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것을 증언하는 공동체이고 그 증언의 공동체가 사건을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개념은 내가 세계에 들어가서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엄밀히 따지면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흩어지는 교회만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개념은 보이는 교회도 보이지 않는 교회도 둘 다 중요합니다. 구

약에서 증언자는 여자는 불가능했습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여자인데 사실 여자는 증인의 자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짜 증인이 될 수 있다고 거꾸로 얘기합니다. 부활의 사건의 증인을 제대로 세우려면 남자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니까 여자를 첫 번째 증인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자유자만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노예도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 말만 듣습니다. 두 번째 가족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짜고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독립적이면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제 3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 중에 오살죄가 있고 고살죄가 있는데 오살죄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죄이고 고살죄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죄입니다. 오살죄는 용서가 되지만 고살죄는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살죄를 지은 사람은 실수로 살인을 했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피성의 제사장이 죽으면 성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신 죽은 것으로 쳐주는 것입니다. 오살죄냐 고살죄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뱀은 고살죄를 지었습니다. 사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에 빠진 존재는 오살죄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증인은 반드시 두 세 사람이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는 보통 증언자가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대 법에서는 증언자가 목격자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뺀 상태에서 목격한 사람이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지금의 증언자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라고 했을 때 결론부터 얘기하면 증언자입니다. 증언자가 신약에서는 순교자와 같은 뜻입니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증언한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증언자가 필요할까요? 지금부터는 제 theory입니다. 왜 하나님께 사람이라는 증언자가 필요하실까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가 있습니다. 중세 까지는 천사론이 방대했는데 중세 이후에 천사론을 다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라든지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강합니다. 중세신학자들이 했던 논쟁 중에 하나가 바늘에 천사 몇 마리가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도 신약에도 천사는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사가 없어졌습니다. 천사가 없어진 이유도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 천사, 사람, 자연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천사였습니다. 코란 안에도 천사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다니엘서에도 천사의 이름이 나오고 마리아에게 왔던 천사도 있고 싸우는 천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 심판의 천사, 천사들이 일 마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사람에게 주고 사람은 자연을 다스리라고 했다는 것이 구약의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도 천사의 이름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증인들 같은 경우는 예수를 여호와가 만든 최고의 신들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만 진짜 신이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예수님은 수준이 낮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했다고 해서 예수의 신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엘로힘, 여호와 이런 것들도 다 천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의 기준은 교주냐 교주가 아니냐 하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고 성경이 아닌 또 다른 성경을 보는 것이 이단이고 그 다음이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고 봅니다. 삼위일체 안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라고 하는 것이 초대교회 때 다 정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왜 천사론이 없어졌을까요?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천사의 자리가 바뀝니다. 우리를 부리는 영으로써의 천사를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사람, 천사, 자연 이것이 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의 삶을 자연, 상황에 눌려서 살고 그 상황을 잡고 있는 영이 있고 그 영이 사람을 짓눌러서 만들어진 신이 존재하는 역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이 천사를 부리는 것이 순리입니다. 천사보다 몇 배 뛰어난 존재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바깥에 있습니다. 천사 보다 더 뛰어나신 예수가 내 안에 있는데 굳이 내가 수호천사를 믿고 수호천사한테 빌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증언이 필요할까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뭔지 모르지만 거역의 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탄 또는 마귀라고 합니다. 사탄은 대적하는 자이고 마귀는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사탄과 마귀는 같은 종자인데 원래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이 대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심판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합니다. 증인은 가장 자유하고 가장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경험한 목격자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은 가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이기는 자가 교회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증언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말만 잘한다고 세상이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용히 삽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꾸 떠들어야 합니다. 증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맞먹을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야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꼬봉이면 증인이 안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수종할 수 있는 피조물이 필요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얘기하는 증언이 뭘까 했을 때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세상을 향해서만 증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증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의 흔적이 내가 보고 들은 것들입니다. 엄마가 자식한테 매일 주니까 일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식도 엄마한테 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방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신 존재입니다.

요나서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존재가 신이라고 보는 그 문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물속에서 나온 사람은 물고기의 위산 때문에 얼굴이 하얘졌다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멸망할 것이라고 힘도 안들이고 딱 한 마디만 했는데 사람들이 돌아섰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니느웨 사람들이 물고기 신을 믿고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사람을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도 우리 안에 탈색되어 있는 것입니다. 증인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몸에 표시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의 표시는 살아낸 흔적입니다. 이마에 인이 찍히고 이런 것들이 상징적인 표식입니다. 사단도 666이라고 찍혀있는 것입니다.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신앙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이 실재입니다. 말하는 것으로 살았고 살아온 흔적들이 있고 그것을 보는 순간 사단은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를 유괴하고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을 랜섬이라고 말하는데 로마서에서는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theory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이라는 은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증언은 사명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사명으로 가는 것이 신약의 핵심이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종말론적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 은혜가 아니고 사명입니다. 사명이 증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어있는 자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자가 되면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자유자여야 합니다. 최초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안 그러면 사단의 전략과 속임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자로 살아가는 이 존재가 죄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죄 속에 있습니다. 죄와 더불어 살아내면서 흔적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이라고 하는 공동체로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말씀하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첫 번째 공동체에 주신 사명이 증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증인을 이야기합니다. 은혜 없이는 사명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터이고 사명은 건물을 짓는 것인데 터가 작으면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더 높이 더 큰 사명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동서남북에 여호와 삼마라는 구역이 있습니다. 동서남북 안에서 수문장이 될 것인지 마당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인지 돌을 나르고 있을 것인지 사람마다 자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서 떠나서 하나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훨씬 좋습니다. 저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아버지를 부르지 하나님 남편을 불러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단계가 남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서로 결혼해서 동등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 분이 내 남편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선물로 받은 믿음, 말씀으로 공급받는 믿음 그리고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믿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이 서바나로 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너희도 똑같이 사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신앙에서 사명의 신앙으로 반드시 가야 진짜라는 것입니다.

2016.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