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성경공부 -둘째날

요한복음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6 23:02
조회
3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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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꽃 경전

어떻게 보면 인문학의 끝이 경전입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인문학을 이해해야 하는데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 인문학을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인문학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꼭 예수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예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불러줘서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 공부, cannon을 text로 읽는다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상징과 신비와 역설을 빼버리면 그것은 그냥 책이지 경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공부

제가 동국대전이라고 하는 천도교 경전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최제우가 종이에 글을 써서 그 종이를 태워서 재를 물에 타고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성경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받을 때는 정말 ‘아멘’으로 받았는데 다른 경전을 보니까 이상한 얘기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안에 상징이 있는 것이고 신비가 있는 것이고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실재인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 자체가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석하기가 힘든 것이고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고 더구나 다른 것으로 갑자기 튕겨져 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안에 실재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라고 얘기하시고 성령님은 사랑의 섬김으로 온다면 사랑과 관계와 섬김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우리가 생각했던 보이지 않는 어떤 상징이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가 우리한테 느껴질 때 사랑과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를 진짜 믿으면 성품이 바뀌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은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이런 일이 왜 벌어질까를 생각해 보니까 말씀을 실재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하는 정보를 쌓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information이 아니라 formation이라고 하는 자기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지식을 받은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은 엄밀히 따지면 information이 아니라 formation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바꾸는 것이고 그 인격을 바꾸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삶으로 가는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당연하지 않은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80년을 성경공부를 하고 80년을 예수를 믿었는데 안 바뀝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니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바뀌는 것을 보면 가끔 바뀌니까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순리가 역리가 되고 역리가 순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물 위를 걸어가는데 한 사람이 빠져 죽었다면 기적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빠져 죽는데 어떤 사람이 물 위를 걸어간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을 주신 것이 아니고 사실은 자연을 주신 것입니다. 기적이 반복되면 자연이 되는 것이고 자연의 법칙을 깨면 기적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삽니다. 사실은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자꾸 자연의 법칙을 깨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늘 역리와 순리를 바꿔서 살다보니까 말씀을 듣고서 실재의 삶으로 살지 못하니까 날마다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 자연스러운 것이냐 하면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이라고 하는 사랑의 속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

성품이 변화되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표현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데 베푸는 사랑,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생명의 씨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생명은 생명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산에 올라갔더니 나무들이 다 누워있었습니다. 물어봤더니 햇빛을 받으려고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프라카 밀림에 가면 나무들이 위로 솟구쳐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나무에 비해 쳐지면 그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면 나무는 마실 물이 없어서 죽게 됩니다. 이 나무가 살아있는 나무라면 마르지 않은 물을 찾을 때 까지 뿌리를 더 깊이 내립니다. 마르지 않은 물을 찾는다는 것은 생명은 생명의 근원에 계속 connection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나무가 죽은 나무라면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말은 생명의 근원을 찾아서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생명은 살려면 반드시 생명의 근원과 connection이 되고자 하는 열망 또는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목마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목마름이 또는 진리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생명이 있다는 근거입니다.

두 번째 생명은 반드시 생명 안에서 자라납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자라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불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이것 밖에 안 돼지? 나는 왜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무너져 있지? 라고 하는 거룩한 불만을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자라날 수 있는 힘이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의 존재는 늘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포도 반드시 성장의 완전까지 가야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 아니라 죽는 세포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세포는 반드시 세포의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며 가고 거기서 죽으면 다시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고 그래서 또 온전과 완전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온전과 완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세 번째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랑 닮은 사람을 원하는 이유는 이것이 생명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영적인 자녀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숨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전수를 잘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며느리도 모른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에 대한 비밀을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알리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낳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는 이 원리를 통해서 사랑은 생명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문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 1장 1절을 가지고 생명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갈망이 있는 것이고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말씀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면 생명을 낳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만나면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말씀과 나라고 하는 존재가 만나면 당연하게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만나면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생명이 나옵니다. 모든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와의 결합으로 생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하는 이유, 산업혁명 이후에 돈이 최고인데 돈 되지 않는 예술과 종교가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맑스는 종교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반드시 최고의 완전한 사회가 되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1세기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종교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1세기가 되니까 종교가 더 많아졌습니다. 사이비도 더 많습니다. 점집은 너무 잘됩니다. 사실은 관념적인 것부터 시작한 것인데 관념에서 유물론으로 가서 관념과 유물론이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실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제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한 유물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올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종교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미국에 있는 젊은 애들이 교회는 안 가는데 인디안들의 의식을 똑같이 집에서 파티로 하는데 영적입니다. 우리 동네에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도서관이 있는데 거기에 운동권이었던 어떤 분이 와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분이 도서관에서 뭔가 좋은 기운이 흐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종교도 없고 아무것도 안 믿는 사람인데 기를 얘기합니다. 굉장히 영적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샤머니즘 적인 것을 찾든지 아니면 아예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무지 많고 이슬람교가 의외로 굉장히 강력하게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싸우고 있는 형태인데 기독교 자체가 이미 영적인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이슬람이 오히려 더 영적입니다. 심층적 종교와 표층적 종교 안에서 표층적 종교는 자꾸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표층적 종교는 심층적 종교의 공급을 받아서 교리도 변하고 신학도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급을 안 받으니까 자꾸 굳어집니다. 굳어지니까 그 틀 안에서 자꾸 죽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생명력 자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cannon이 기준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종교의 핵심 중에 하나가 말씀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경전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경은 열려있습니다. 불경을 공부하기 힘든 이유가 아직도 쓰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딱 66권을 주고 이게 성경이야 라고 막아 놓았습니다. 더 본질적으로 가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최초의 문화사역자였다고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문화인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말이라고 하는 문화를 사용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모든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수다쟁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또 실재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고 또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믿음의 선진이 여러 신을 섬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떤 한 신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렇게 얘기하는데 이 신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말하는 신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여호와’ 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냥 말하는 신으로서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심층적 종교를 경험한 것인데 이것을 불경으로 표현할 것인지 기독교로 표현할 것인지 이슬람으로 표현할 것인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색깔이 있습니다. 그 종교적 색깔 속에서 특별히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고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경이 사실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건이고 말씀이 실재고 말씀이 예수고 말씀이 하나님이고 말씀이 성령님입니다. 소위 말씀종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 중에 하나가 말씀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 말씀입니다. 헬라어로는 로고스인데 로고스의 개념은 헬라적인 문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스타워즈와 타이타닉 이야기가 구조와 인물의 갈등이 거의 비슷한데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보고 또 환호하느냐 하면 이야기가 주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막장 드라마를 목숨 걸고 보는 이유도 이야기의 힘 때문입니다. 이 narrative라는 구조가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사고의 체계와 자기 인생의 구조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변했다는 말은 말이 변했다는 것인데 말이 변했다는 것은 자기의 삶의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이 표현 자체가 사실은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늘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narrative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narrative가 있는데 이 narrative들이 함께 합쳐지는 과정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것 자체를 계속 문자적이고 지식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경험해야 된다는 것을 성경공부, 말씀공부라고 하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공부하는데 우리 인생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적용을 하면 성경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거 안하면 다 의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