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요한복음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6 23:06
조회
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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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태초에 있었습니다. 처음 시간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 자체는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들리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있었으니까 말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절 뒷부분을 보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고 하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 보이지 않는 것과 지, 보이는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바라’라고 하는 히브리어인데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make는 있는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고 create는 없는 상태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creative 하다,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조금 의심스러우셔서 ‘빛이 있을까?’ 하셨다면 아마도 빛이 깜박거리지 않았을까?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말씀대로 된다는 믿음이 있으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가 된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는 것에 자신의 것을 올인하고 삽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모든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입니다.
‘말씀’ 하면 좀 고귀하고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말’입니다. 말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데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구약, 신약을 말하는데 약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이 말입니다. 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모든 세상의 태초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보이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데 어떤 관점, 관념, 철학, 가치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제일 실망스러웠던 것이 첨성대였습니다. 동네굴뚝 같은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자시절에 한 모임에서 경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는 역사학자 교수님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절터에 가서 그 유물의 역사적 배경을 듣는데 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첨성대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천문측량기구인지를 그 분의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실인데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듣고 제가 직접 상상하면서 경주를 다시 알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세상은 처음에 관념, 가치,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하루 종일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를 한 번 녹음해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서 내가 나옵니다.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곧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내가 말하고 있는 정체가 곧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 마음의 밀고자입니다. 제발 자신이 말하는 것만 듣지 말고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빛만 보고도 모르냐고 묻는 것인데 저는 모릅니다. 20년 결혼생활을 해도 그 마음을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말을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게 맞아?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모님이 시집을 갔는데 친정에 살 때는 부모님께 ‘식사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두 번은 거절하시다가 세 번째 식사하시라고 하면 그때서야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모님이 결혼해서 시댁에서 똑같이 시어머니께 식사하시라고 세 번을 여쭤본 것입니다. 시어머님은 정말 식사를 안 하시겠다고 거절을 한 것인데 친정문화만 생각하고 세 번을 여쭤보니까 나중에는 화를 내시면서 당신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하셨답니다. 사람들이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이 B는 사람에게 솔직히 a’를 얘기하고 싶은데 b’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B는 c’로 듣고 d’로 얘기합니다. 서로 다른 얘기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가 a를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a’를 얘기 안하고 다 돌려서 말합니다. 돌려서 얘기하니까 다른 얘기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왔다갔다 다른 소리만 하다가 끝이 나고 나중에 ‘저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못해.’ 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동격입니다. 이것을 말씀사건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적인 사고로는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헬라적인 사고는 이것을 분리시켜버렸습니다. 말씀과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을 분리시켜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말하는 것과 사건은 하나입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니까 하나님과 동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나와 동격입니다.
매일 배신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왜 자기는 파트너를 나쁜 사람만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임목사님이 그 분에게 말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분이 만난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었냐고, 좋은 사람을 말해야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셨답니다. 거꾸로 그냥 온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육신이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고깃덩어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그것이 된다는 것이니까 우리가 말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배의 키와 같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큰 배도 키를 조금만 돌리면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한다면 동격인데 동격의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항상 시간적인 개념에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살다가 죽었다면 죽은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은 끝을 본 것입니다. 인생 태어나자마자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살아있다는 것은 영원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원래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갖지 못하고 선, 악이라고 하는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문제에 딱 빠지는 순간에 이 생명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선, 악이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까? 영원한 생명은 두 가지의 관점이 있습니다. 왜 영원한 생명이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존재적으로 생명과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빛에 있어야 하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란 말은 나무가 생명의 근원과 같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죽어있는 나무는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도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빛을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같이 있어야 되는데 선과 악이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영원한 생명은 반드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도 혼 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서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혼자서 행복하게 잘 사시면 됐지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람들 만나서 관계하는 거 귀찮고 힘들 때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30대에 고소득 미혼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자 사는 게 정말 행복한 거라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굳이 결혼을 할까? 를 생각해 보면 존재론적으로 사람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속성 자체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따지기 시작하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쳐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안 되면 계속 자릅니다. 자르고 자르다보니까 나중에는 자기 자신도 자릅니다. 죄책감에 정죄감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에 ‘난 죽어도 싸.’ 하느라 생명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생명은 생명을 압니다. 나무가 열심히 노력해서 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당연히 물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존재, 생명의 존재라면 하나님의 생명의 DNA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 믿으라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믿으라 믿으라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 자신의 의지나 자신이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노력을 해야 된다고 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생명은 그냥 생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내가 믿어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자녀인 것이 그냥 믿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법적으로도 알 수 있고 실제로 같이 살고 있어도 DNA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영접한다는 것이 씨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
준 것과 온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구로 열심히 살려고 해도 안 됩니다. 지키려고 하니까 죽을 맛이고 계속 실패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오셨습니다. 오셨다는 것이 ‘더불어’ 입니다. 이것을 복음서로 얘기하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선과 악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불어 살지 못하고 매일 경쟁하고 싸우고 살다가 주님이 오시고 나니까 나를 채워주는 오심이 있으니까 더 이상 선과 악으로 살지 않게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가 오리한테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까지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까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신 예수가 함께 더불어서 나와 먹고 마시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마음에, 내 몸에……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네 몸에 들어가 너와 더불어서 살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와 더불어 있으니까 예수와 내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이 불교하고도 통하고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진짜 다른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기독교적인 책을 쓴 영지주의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신이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존재론적 결합이 있어야 되는데 존재론적 결합이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않는 이유가 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느냐 하면 자기가 DNA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돼지하고 똑같이 모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데 모르는 것입니다. 관념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말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찌질해, 나 아무것도 못해, 난 한계가 있어.‘ 라고 말합니다. 이단은 자기가 존재론적 변화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대우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장과 과장 대우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이 오셨다고 얘기합니다.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할 사실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주님이 나다나엘과 같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울고 있을 때, 네가 슬퍼할 때, 혼자서 그렇게 떨어져 있을 때, 나 너랑 같이 있었어.’ 그랬더니 49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나다나엘이 고백합니다. 더불어 있음의 소식을 듣고 나니까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불어의 능력이 영원한 생명인 것을 모릅니다. 세례요한은 ‘그 분이 그 분이야.’ 하고 DNA를 말했고 나다나엘을 통해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야.’ 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실재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왔다고 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의 존재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리고 더불어 주님과 함께 있는 자가 태초에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DNA에 영원한 생명의 DNA가 있습니다. 새로운 엄마와 아빠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013. 7. 5
말씀이 태초에 있었습니다. 처음 시간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 자체는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들리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있었으니까 말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절 뒷부분을 보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고 하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 보이지 않는 것과 지, 보이는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바라’라고 하는 히브리어인데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make는 있는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고 create는 없는 상태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creative 하다,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조금 의심스러우셔서 ‘빛이 있을까?’ 하셨다면 아마도 빛이 깜박거리지 않았을까?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말씀대로 된다는 믿음이 있으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가 된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는 것에 자신의 것을 올인하고 삽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모든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입니다.
‘말씀’ 하면 좀 고귀하고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말’입니다. 말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데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구약, 신약을 말하는데 약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이 말입니다. 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모든 세상의 태초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보이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데 어떤 관점, 관념, 철학, 가치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제일 실망스러웠던 것이 첨성대였습니다. 동네굴뚝 같은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자시절에 한 모임에서 경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는 역사학자 교수님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절터에 가서 그 유물의 역사적 배경을 듣는데 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첨성대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천문측량기구인지를 그 분의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실인데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듣고 제가 직접 상상하면서 경주를 다시 알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세상은 처음에 관념, 가치,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하루 종일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를 한 번 녹음해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서 내가 나옵니다.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곧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내가 말하고 있는 정체가 곧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 마음의 밀고자입니다. 제발 자신이 말하는 것만 듣지 말고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빛만 보고도 모르냐고 묻는 것인데 저는 모릅니다. 20년 결혼생활을 해도 그 마음을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말을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게 맞아?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모님이 시집을 갔는데 친정에 살 때는 부모님께 ‘식사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두 번은 거절하시다가 세 번째 식사하시라고 하면 그때서야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모님이 결혼해서 시댁에서 똑같이 시어머니께 식사하시라고 세 번을 여쭤본 것입니다. 시어머님은 정말 식사를 안 하시겠다고 거절을 한 것인데 친정문화만 생각하고 세 번을 여쭤보니까 나중에는 화를 내시면서 당신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하셨답니다. 사람들이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이 B는 사람에게 솔직히 a’를 얘기하고 싶은데 b’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B는 c’로 듣고 d’로 얘기합니다. 서로 다른 얘기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가 a를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a’를 얘기 안하고 다 돌려서 말합니다. 돌려서 얘기하니까 다른 얘기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왔다갔다 다른 소리만 하다가 끝이 나고 나중에 ‘저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못해.’ 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동격입니다. 이것을 말씀사건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적인 사고로는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헬라적인 사고는 이것을 분리시켜버렸습니다. 말씀과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을 분리시켜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말하는 것과 사건은 하나입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니까 하나님과 동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나와 동격입니다.
매일 배신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왜 자기는 파트너를 나쁜 사람만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임목사님이 그 분에게 말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분이 만난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었냐고, 좋은 사람을 말해야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셨답니다. 거꾸로 그냥 온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육신이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고깃덩어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그것이 된다는 것이니까 우리가 말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배의 키와 같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큰 배도 키를 조금만 돌리면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한다면 동격인데 동격의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항상 시간적인 개념에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살다가 죽었다면 죽은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은 끝을 본 것입니다. 인생 태어나자마자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살아있다는 것은 영원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원래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갖지 못하고 선, 악이라고 하는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문제에 딱 빠지는 순간에 이 생명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선, 악이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까? 영원한 생명은 두 가지의 관점이 있습니다. 왜 영원한 생명이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존재적으로 생명과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빛에 있어야 하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란 말은 나무가 생명의 근원과 같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죽어있는 나무는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도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빛을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같이 있어야 되는데 선과 악이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영원한 생명은 반드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도 혼 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서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혼자서 행복하게 잘 사시면 됐지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람들 만나서 관계하는 거 귀찮고 힘들 때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30대에 고소득 미혼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자 사는 게 정말 행복한 거라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굳이 결혼을 할까? 를 생각해 보면 존재론적으로 사람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속성 자체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따지기 시작하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쳐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안 되면 계속 자릅니다. 자르고 자르다보니까 나중에는 자기 자신도 자릅니다. 죄책감에 정죄감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에 ‘난 죽어도 싸.’ 하느라 생명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생명은 생명을 압니다. 나무가 열심히 노력해서 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당연히 물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존재, 생명의 존재라면 하나님의 생명의 DNA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 믿으라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믿으라 믿으라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 자신의 의지나 자신이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노력을 해야 된다고 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생명은 그냥 생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내가 믿어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자녀인 것이 그냥 믿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법적으로도 알 수 있고 실제로 같이 살고 있어도 DNA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영접한다는 것이 씨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
준 것과 온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구로 열심히 살려고 해도 안 됩니다. 지키려고 하니까 죽을 맛이고 계속 실패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오셨습니다. 오셨다는 것이 ‘더불어’ 입니다. 이것을 복음서로 얘기하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선과 악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불어 살지 못하고 매일 경쟁하고 싸우고 살다가 주님이 오시고 나니까 나를 채워주는 오심이 있으니까 더 이상 선과 악으로 살지 않게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가 오리한테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까지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까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신 예수가 함께 더불어서 나와 먹고 마시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마음에, 내 몸에……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네 몸에 들어가 너와 더불어서 살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와 더불어 있으니까 예수와 내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이 불교하고도 통하고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진짜 다른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기독교적인 책을 쓴 영지주의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신이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존재론적 결합이 있어야 되는데 존재론적 결합이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않는 이유가 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느냐 하면 자기가 DNA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돼지하고 똑같이 모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데 모르는 것입니다. 관념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말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찌질해, 나 아무것도 못해, 난 한계가 있어.‘ 라고 말합니다. 이단은 자기가 존재론적 변화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대우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장과 과장 대우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이 오셨다고 얘기합니다.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할 사실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주님이 나다나엘과 같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울고 있을 때, 네가 슬퍼할 때, 혼자서 그렇게 떨어져 있을 때, 나 너랑 같이 있었어.’ 그랬더니 49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나다나엘이 고백합니다. 더불어 있음의 소식을 듣고 나니까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불어의 능력이 영원한 생명인 것을 모릅니다. 세례요한은 ‘그 분이 그 분이야.’ 하고 DNA를 말했고 나다나엘을 통해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야.’ 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실재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왔다고 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의 존재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리고 더불어 주님과 함께 있는 자가 태초에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DNA에 영원한 생명의 DNA가 있습니다. 새로운 엄마와 아빠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013.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