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랑 (로마서 15:30-33, 이사야 61:1-11)
로마서 15장 30절부터 33절은 사도바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로마서 전체를 끝내는 기도이고 이후의 16장은 로마서의 부록과 같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기도는 사도바울이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제적인 기도의 제목을 로마교회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기도의 제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을 대비해서 자신을 위한 구원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위대한 사역자이고 위대한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교회에 봉사와 성의를 받을 수 있도록 예루살렘교회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헌금,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밖에 있는 유대인이 아니라 안에 있는 크리스찬유대인, 기독교유대인들도 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성의를 잘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로마교회를 통해서 서바나라고 하는 지금의 스페인에 가고자하는 선교여행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결국에는 로마서가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세계,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에 이르기까지 라고 하는 그 믿음의 세계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어지는 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기도라고 하는 것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한 것처럼 말씀과 기도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이 있고 약속이 있다면 약속과 언약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기도의 삶을 살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도는 단지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도 내가 기도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 기도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보이는 세계로 살아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의 마지막 장면을 기도로 마치는 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말씀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다면 내가 이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 가야 되는데 그것이 기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내가 그것에 대해서 듣고 그래서 내가 몸으로 순종하고 몸으로 순종할 때 마다 말씀을 추적하는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씀을 가지고 있고 사랑을 가지고 있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결국 열매가 없는 것은 기도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차원이 다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절대로 정성의 기도가 아닙니다. 40일 금식하면서 하는 기도, 특별한 새벽기도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는 신앙을 종교화시키는 보이는 세계를 내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열심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는 것에 대한 한 방편으로 그런 종교생활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눈 뜨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해야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도 안 되지만 율법 폐기론자도 아닌 것입니다. 기도가 있어야 되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기도의 삶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말씀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말씀이 없는 자는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의 기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두 세 사람이 모여 함께 합심기도를 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은 증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입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맞추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고 내가 그 뜻을 쫓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을 믿고 있다, 내가 믿음이 있다, 내가 신앙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말씀을 추적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편지를 해서 사도바울이 ‘내가 스페인에 가고 싶다, 너희들이 도와줘라, 끝’이 아니라 기도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쫓아가는 삶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주시고 부르심을 주시고 이제는 사명을 주셨다면 내 몸이 힘들고 내 몸이 어렵고 내 감정이 힘들고 상황이 어려운 모든 조건 하에서도 그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기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기도로 마치고 있습니다.
기도교인의 삶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기도라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머물러 있어야 되는 것인데 여호와 이레, 주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것에 대해서 머물러서 기대하며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고 내 마음이 내 몸이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십니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사도바울이 기도를 부탁하는 이유입니다. 왜 기도할 수밖에 없는지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무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책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의무도 있고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사랑의 증거로 인해서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이 명령어 앞에서 또 다시 율법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명령은 최하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요구입니다. 진짜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하면 어떨까? 라고 하는 권유와 권면과 제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원함으로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시, 온전히, 기쁘게라고 하는 마음애서부터 자원함이 살아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 자원함을 가지고 어떤 때는 무례하게 살고 또 어떤 때는 질서가 없는 것처럼 살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자기가 교주인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아파하고 슬퍼하고 또 기다리고 인내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증거로 기도하라.’
30절 말씀을 보면 ‘힘을 같이 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힘을 모아서 같이 싸우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함께 모으는 것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 보면 두 세 사람의 증인,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군요.’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위해 함께 모여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해서 그렇게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결론으로 얘기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로마교회에 갈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한 자와 연약한 자들이 함께 모여 산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울과 로마교회 지체들이 함께 연합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평강의 하나님은 갈등으로 인한 분열이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이셨고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수준의 차이를 넘어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이셨고 또 바울과 로마교회 지체들이 서로 다르고 또 서로 본 적이 없는 지체들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Peace maker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Harmony maker 되어 서로 다름을 가지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one voice maker가 되게 하셨습니다. one voice가 단어 하나를 똑같이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어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언어를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Peace maker, harmony maker, one voice maker라고 하는 이 세 가지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똑같이 그런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1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보니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리셨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1절부터 3절 까지 보면 변화를 주는 자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4절부터 9절은 공동체를 세우는 자들이 됩니다. 10절부터 11절은 날마다 주님 앞에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랑하게 하시는데 어떤 사랑을 하게 하시느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얼굴값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팔자 속에서도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삶의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꿈꾸고 있는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내가 왜 기도할 수밖에 없을까? 로마교회 교인들은 사도바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하나라고 하는 one vioce라고 하는 한 목소리를 쫓아갈 수 있는 이유는 성령의 사랑 때문입니다.
나이가 드니까 이제는 얼굴만 봐도 어떤 사람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가 보입니다. 이발사들은 손님의 머리모양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신발장사는 신고 다니는 신발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바둑을 두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개인적으로 바둑을 함께 둬 보면 상대가 째째한 성격인지 대범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그 삶의 기질이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을 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 1년에 두 번씩 새벽예배 설교를 했는데 두 번 중에 꼭 한 번은 늦잠을 자서 설교를 못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열받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랑을 하게 되니까 새벽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5시에 약속 장소에 나가있습니다. 5분 10만 전화통화를 해도 귀찮고 힘든 사람인데 사랑을 하니까 1시간을 통화를 하고 끊으면서 중요한 얘기는 얼굴 보고 하자고 합니다. OO형제가 사실 여기에 앉아있는 것도 사실 기적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에게 날마다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그 사랑의 기적이라는 것이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사람들이 그럴 거야.’ 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을 초월해서 또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내리셨고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는데 나를 보내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호하고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임하시면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내 마음에 성령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이해할만한 사랑 말고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불륜을 저지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와 내가 원수지간인데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계속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상대와 나를 분리시키고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을 분리시키고 그리고 늘 다르다고 틀리다고 하나가 되면 안 된다고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내가 그들을 찾아가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내 마음에 갈등과 분열이 있지만 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사랑을 통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주는 자, 공동체를 세우는 자, 새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새 노래는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해야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찬양의 가사가 있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맨날 30년 전, 40년 전에 경험했던 하나님 노래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내가 30년 전에 만났던 그 하나님만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내일의 하나님도 영원한 하나님도 늘 30년 전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 우리 앞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해서 새 노래를 부르셔야 합니다.
이사야가 마지막으로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1)’
신부처럼 신랑처럼 내가 너무나 기뻐서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11)’ 하나님을 노래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때 노래를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제가 가끔 교회에 들어오는 입구를 동굴처럼 만들어서 들어오기 어렵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들어올 때는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사는 동안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새 노래, 새 가사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매주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령의 사랑의 신앙이 있습니다.
첫 번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는 기도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peace maker로 harmony maker로 one voice maker로 세워서 나의 몸을 통해서 변화를 만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원래 항거자, 개혁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보면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시대를 살아도 개혁자의 삶으로 살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동체를 세우는 공의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제사장은 공동체를 책임지고 중보해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쟤가 몰라서 그래요, 쟤를 한 번만 봐 주세요.’ 라고 대신 빌어주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늘 심판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일꾼으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다 자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 자르면 안 됩니다. 오늘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게으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입장 속에서 정죄하고 있고 똑같이 세상 사람들처럼 분열시키고 갈등을 만들면서 무엇인가 자신의 한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양 쪽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인간이하의 수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기독교인이 책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했다고 하는 그 봉사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사랑의 신앙은 감사와 감격과 감동의 기도를 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회개의 기도가 어떤 때는 감사와 감격과 감동의 기도가 되고 어떤 때는 내가 그냥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그것이 감사와 감격과 감동의 기도가 되고 내가 내 형제를 위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말 자체도 어쩌면 주님 안에서 그것이 사랑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교회에 이 새로운 기도의 운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그 기도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과 분열 가운데서도
평화를 만드시는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수준의 차이를 넘어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전혀 모르지만
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의 꿈을 가지고
그 시대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변화를 만드는 공동체를 세우는
감사할 수 있는 기도자가 되겠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내 육신이 주인 되지 않고
성령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셔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삶으로 기도의 삶으로 살겠습니다.
2014.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