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심 (로마서 15:14-21, 창세기 14:13-24)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거룩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처럼 묵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잃어버린 백성 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을 하지 못하고 방자하게, 틀이 없이 또 무례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이라고 하는 이 소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소망이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의 통로 또는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또 내가 왜 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깨달아지기 시작하면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될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자가 된 청소부가 있습니다. 그는 못 배운 사람이었고 청소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 그 부르심이 자기에게 맡겨진 지구의 한 부분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그 소명대로 사니까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방한한 교황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제가 소울을 타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할 텐데 교황이 소울을 타니까 대단한 영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절대로 교황을 폄하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비난할 의사는 없습니다. 다만 16세기에 카돌릭에서 개신교로 나오는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의 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모든 사람들이 추앙할만한 것을 만들어내어야 추앙할 만한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청소부와 같이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면 사람들은 그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없는 사람들이 또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 너무나 하찮은 것처럼 여겨지고 그것에 대해서 폄하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교황이 온 것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거룩함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권위, 진정한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내가 성공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와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거룩함이고 그것이 진정한 권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정신들을 오늘 우리 교회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리바이벌하는 종교개혁의 붐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십 몇 년 전에 교황이 왔을 때 카돌릭 신자가 50만에서 100만 정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카돌릭으로 가면 어쩌나 교회가 걱정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황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저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으로만 그 거룩함을 지켜내려고 하는 천박한 기독교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장 존귀하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귀함을 세상에 빼앗기면서 세상 보다 못한 가치를 가지고 세상 보다 못한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세상에서 요즘 최고로 여겨지는 가치는 의리입니다. 목사님들끼리도 요즘 ‘믿으리’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의리라고 이야기한다면 교회에서는 가장 최하의 가치가 의리입니다. 최하가 의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의리 보다 더 큰 신뢰가 있고 서로를 내 몸의 한 부분, 지체라고 생각해야하는데 교회에 의리조차 없습니다. 한동안 조폭영화가 유행이었는데 조폭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의리입니다. 세상의 깡패들이 더 의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더 의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함을 지켜낸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행위를 하게끔 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신,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게 하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사도바울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그의 인생에서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도바울은 텐트메이커였습니다. 가장 하찮은 직업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가 단순히 천막을 만드는 장인에지나지 않았지만 우주를 운행하시는 창조주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명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내적인 체험을 통한 부르심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우리가 만나는 아주 평범한 사도바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가게를 차리지도 못하고, 대단한 직업의식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주 분명한 자기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사도바울에게는 세 가지의 자기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하는 자신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라고 하는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만한 후사라고 하는 자기의 직분,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함께 몸으로 체휼하여 거룩하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맡은 자기의 직분이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방인을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게 하는 헌신과 희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이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데 사도바울이 텐트를 너무 잘 만들어서 옆에서 투자자가 자신이 돈을 댈 테니까 텐트를 제대로 만들어서 팔아보자고 하는 유혹이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이 어떤 곳에서는 신이라고 할 정도로 대접을 받으니까 평생 거기에 머물러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봤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제발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그 사람들을 뿌리치고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로마로 가려고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꿈은 텐트를 만들어서 장사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제가 로마에 갔더니 사도바울과 베드로의 성당이 있는데 두 개의 성당이 너무나 규모나 외형 면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베드로성당은 정말 대단합니다. 출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잊어버리고 안 가져간 것이 있어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태리경찰들이 얼마나 빡빡한지 절대 안 된다고 막아서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순교한 수도원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로 간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초라할까 의문이 생길정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드러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초라한 사도바울의 수도원 모습이 사도바울답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직분 그리스도의 일꾼,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이방인을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행  15:18)’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이방인들이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을 순교하게 하셨는데 사도바울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가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 일꾼입니다.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 책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제물이 되게 하려고 자신의 희생과 헌신과 비전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행 15:19)’ 

사도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직분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리스도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순종의 영이 흘러넘치도록 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과 행위로 하셨습니다. 
말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그냥 쓰는 말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로 썼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아니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로 썼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데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기적이 표적으로 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능력,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권능은 다이나마이트 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은 여호와의 영,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는 관념적이고 개념적이고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실재가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신다는 것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는 것은 말의 창조성이 드러나는 것이고 생명을 살리는 비전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의 능력들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간 기도하고 예배 열심히 드렸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심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 기적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하셔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부리심의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쫓아다니면서 살면 상황에 매여서 살기시작하면 말씀의 능력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의 능력도 성령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실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전체를 끌고 가고 있는 이 생각이 내가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순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고 믿음은 희생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이 거룩함이 되겠습니까? 

아침에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교황이 꽃동네에 가서 어린 아이가 손가락을 빠는 것을 보고 교황이 자기 손가락을 빨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그런 행동을 했으면 잡혀갔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각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교황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카돌릭에 있는 사람들이 교황을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믿음의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의 전쟁을 하지 않으니까 말의 능력도 없고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성령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전쟁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전쟁은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집에서 연습하고 길리운 자 318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비본질적인 것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전쟁이라고 얘기합니다. 혈과 육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런데 영의 전쟁은 말의 전쟁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을 보면 말이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전쟁은 말의 전쟁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거룩함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그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도 사람들은 좌냐 우냐 여러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독교인들은 좌든 우든 상관없이 영의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영이, 생명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말부터가 거룩하지 않습니다. 말부터 천박하고 말부터 나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자 318명은 아브라함과 단일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을 위해서 318명을 키웠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인류최초의 고아원 원장이 아브라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인과 함께해서 단일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대가지불이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전쟁은 최초의 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다 낮에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318명을 데리고 밤에 적을 치러 갑니다. 역사적으로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밤에는 누가 적군인지 누가 아군인지 정말 알기가 힘듭니다. 그들은 그만큼 친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만큼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만큼 지체를 한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낮에 축구를 할 때도 누가 우리 편인지 모르니까 옷을 구별해서 입거나 모자를 쓰거나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전쟁은 칠흙 같은 밤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칠흙과 같은 밤에도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브라함이 전쟁의 전리품을 의의 왕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전쟁을 해야 전리품이 있습니다. 십의 일조를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는 유언비어가 있습니다. 십의 일조는 전쟁을 하는,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십의 일조는 하나님 앞에 이미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십의 일조의 개념이 없습니다. 맨날 복을 쫓아다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고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성공하면 사회에 물질을 환원합니다. 그들은 대학을 공짜로 다녔기 때문에 사회에 무엇인가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 팔고 밭 팔아서 대학에 갔기 때문에 성공하면 다시 소 사고 밭 사느라 사회에 내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복을 받고 누리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쟁하셔야 합니다. 전쟁을 해야지만 전리품이 있습니다. 싸우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쟁에 나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인 전쟁의 승리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신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실재적인 능력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심을 분명하게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함의 제물이 되는 신앙은 세 가지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부르심의 증거가 있습니까? 
비전이 있습니까?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살아야 될 목적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돈을 버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유가 진리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이유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가 목적이 되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그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훈련 받고 있습니까? 
말의 훈련, 기사의 능력, 성령의 능력의 훈련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어하고 스스로를 절제하고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 군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까? 전쟁! 하고 외치고 나갔는데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 때 다시 후퇴!를 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밤에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눈이 침침하다고 하고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하고 가지가지 이유를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잔치에 부르셨는데 장가가야 되고 장사해야 된다고 전부 타당한 이유들을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18명 끌고 가서 밤에 전쟁을 하려고 했더니 밤 체질이 아니라고 주저앉아있으면 할 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전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자신의 것을 내어주겠다는 각오가 있습니까?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인인 것처럼 이방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그런 힘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시는 역사가 있기를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부르심에 따라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우리들의 심령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부르심에 준비되어 있는지 
훈련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지 

오늘 사도바울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시는 것이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거룩함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교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속에 있는 
진정한 존귀와 부요함과 거룩함이 살아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서 거룩함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에서 
거룩함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이 이 공동체 가운데 
이 민족과 이 열방 가운데 
부르심을 기억하시면서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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