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와 계시(로마서 16:21-27, 출애굽기 3:1-12)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1006

오늘 말씀이 로마서의 마지막 강해말씀입니다. 2년 넘게 로마서 말씀을 함께 나누었는데 마지막 말씀은 신비의 계시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로마서 전체를 함께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신비는 모른다는 뜻이고 계시는 하나님이 드러내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모르는 것인데 하나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보고자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또 다른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 속에서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신비의 계시가 무엇일까요? 로마서 전체는 신앙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본은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통해서 내가 믿음의 동의와 인정 그리고 그 믿음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 마다 목사님들과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찬양을 잘 하시는 목사님이 찬양에 대해 공부를 하자고 하셔서 악보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테트라코드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트라코드는 코드에 따라서 음계가 달라지고 곡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배우면서 제가 중학교 때 쯤 ‘다, 라, 마, 바, 사, 가, 나’, ‘C, D, E, F, G, A, B’ 이런 식의 장조의 변화들을 공부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습니다. 그리고 악보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가르쳐 주시는 목사님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음을 내보라고 한 사람씩 시키시는데 제가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되는 사람이 이 소리를 들으면 우습겠지만 안 되는 사람은 정말 괴롭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집에 가서 매일 하는 일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음을 정확하게 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더 정확하게 소리를 내려면 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매주 토요일 마다 찬양을 가르치는 간사님한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소리 내는 것만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찬양을 하면서 드디어 악보의 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간사님한테 배우기 시작하려고 하는데 전도사님이 우리 목사님은 음치라고 간사님한테 설명을 하기에 제가 직접 얘기하는 것은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기분 나쁘다고 굳이 얘기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수십 년 음을 들어왔지만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 음을 내보니까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찬양을 부르면서 정말 기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계이름에 맞는 정확한 음을 내지도 못하면서 이제껏 노래를 부르고 살았는지 정말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는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라고 하는 신앙의 기본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그것을 우리가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음의 기본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인 것처럼 신앙의 기본이 신비한 계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음을 정확하게 듣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어떤 사람은 연습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왜 나에게 안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꾸 듣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에 들리는 것처럼 신앙도 하나님 앞에 계시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님의 신비한 세계를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정말 배워야 될 것이 많다고, 알아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아니 내 인생의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계시들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아실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쟁취했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겼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승부에 들어가셔서 기꺼이 져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긴 자라고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늘 이기는 자였습니다. 장자권을 갖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외삼촌과 살 때도 사람의 꾀를 사용해서 이익을 얻었고 늘 무엇인가 쟁취하고 살았던 삶이 야곱의 삶이었는데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인생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속이고 거짓과 욕망으로 이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긴 자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창 32:28)’

영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struggled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and men 사람들과도 struggled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nd have overcome 그리고 나면 이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승리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인생 가운데 들어가셔서 사람하고 struggled하는 그 문제 속에서도 이기는 자로 만드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가 안정감을 가져야지만 다른 사람을 환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형 에서가 와도 어떤 민족이 온다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모든 인생 속에서 홍해를 가르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에서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열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려고 노력했던 그 삶에 대해서 버러지라고 얘기합니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이니라(사 41:14)’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인생 가운데서 야곱과 싸워서 졌다고 그래서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 또 늘 승리하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먼저 앞서서 가시고 하나님이 먼저 그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적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때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하신 질문인데 도대체 병자를 낫게 하시는 예수님, 치유하시는 예수님, 기적의 예수님 전부 성경의 이야기이지 오늘 자신의 인생 가운데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기적이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인생을 한 번 뒤돌아보시라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얘기했습니다.

우리 안생 속에서 기적이 없었습니까? 주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저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10년째인데 10년 전에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같이 앉아서 한 식구로 한 지체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이것이 기적 아닌가요? 우리가 이런 기적을 늘 경험하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인이란느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기도와 누군가의 애씀 때문일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과 기질과 성품과 세계관조차도 다 다른 사람들과 한 형제라고 한 지체라고 하면서 모일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단순히 예배가 아닙니다. 가장 고도의 상징이 예배입니다. 예배에 누구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 무엇인가 열심히 하려고 했던 야곱처럼 버러지 같은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로 변화되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하나님의 신비의 계시입니다.

버러지 같은 인생은 염려와 불안한 마음으로 삽니다. 고통과 아픔을 가진 몸으로 삽니다. 또 내적 불안과 불의한 영혼으로 늘 죄를 묵상하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평안하고 평강을 가질 것이고, 치유 받고 썩지 않는 몸이 될 것이고 자유와 생명의 영원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로 대우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버러지 같고 썩고 쇠하고 없어질 수 있고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또 다른 기적과 또 다른 신비의 계시를 통해서 평강과 온전한 몸으로 썩지 않는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내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내가 평강과 치유와 자유함을 누리고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을 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로 원망과 불평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평강이 있을 찌어다.’ 아파하고 쓰러진 심령들에게 ‘믿음대로 나아질찌어다.’ 무언가에 메이고 어떤 생각에 잡혀서 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하시는 그 진리의 선포를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이곳에 예배하러 온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노래를 가지고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평강과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함이 우리 가운데 있었다고 증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비의 계시를 통해서 그 당시의 땅 끝이 스페인을 바라보고 원대한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그 안에서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과 부유함이 있을찌어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함이 있을찌어다.’ 그렇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스페인이 어디입니까? 어쩌면 우리가 가지 못하는 또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해? 라고 얘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의 세계를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늘 염려와 아픔의 고통과 메임과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생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버러지 같은 인생, 주님 안에서 야곱으로 살지 않고 이스라엘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의 정체성, 이 존재의 변화를 우리가 분명하게 보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신비, 모르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모르는 것 때문에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은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은 그 당시로 생각하면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체계적으로 조직이 잘 갖춰져 있는 그런 나라, 대국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 바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늘 말을 어눌하게 할 수밖에 없는 모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480년 동안 종살이에 아주 익숙한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늘 삶이 되어버린 그런 히브리 민족이 그들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가는 길에는 앞에는 물이 있고 뒤에는 군대가 쫓아오는 진퇴양란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바로의 강팍한 마음을 말씀으로 깨뜨리시고 엄청난 대국인 그 나라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작은 히브리 민족에게 몰살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앞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 있고 뒤에는 나를 쫓아오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 속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어쩌면 로마서는 한낱 2천 년 전의 이야기이고 한낱 사도바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막혀있는 길 앞에서 주님이 싸우실 것이고 주님이 하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12절에 있는 모세의 경험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 있는 아주 메마른 나무입니다. 거기에 불이 붙으면 한 순간에 다 타버릴 수밖에 없는 나무였고 양치기를 하면서 늘 봤던 흔한 나무였는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로 떨기나무가 태워집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을 드러내실 것이고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네 신을 벗으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신비한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그 신비 앞에 그 계시 앞에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동의하고 주님이 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 가운데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로마서를 통해서 주님 앞에 세 가지가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름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정영구를 정영팔로 바꾸라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던 인생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맡겨서 하나님 앞에 이겼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이기신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도 이기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이스라엘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이름을 바꾸라는 것이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갈 수밖에 없는 신분 자체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영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의 상처가 있고 스스로 메인 어떤 것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혈액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가 그 분의 어떤 점에 대해서 막 뭐라고 하니까 자신이 AB형이라서 그렇다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예수 피 밖에 없는데 무슨 AB형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AB형이라서 소심하다고 하셔서 듣는 예수 피가 열 받아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름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죽었다 깨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내가 가진 문제를 대면해야 합니다.
못된 짓을 해서 죽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형 앞에 가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해서 아주 기꺼이 형을 만나러 갑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어느 나라에 가서 구출해야 한다면 제 논리로는 일단 그 나라에 침투해서 두 세 사람을 골라서 공부를 시키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포섭해서 사람을 모은 다음에 날짜를 정해서 애굽을 무너뜨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에게 갑니다. 바로가 미안하다고 해방시켜주겠다고 얘기할 것 같아서 직접 만나러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갑니다. 모세는 회피하지 않고 문제를 직면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자신은 로마에 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은 스페인에 있습니다. 그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을 얘기하고 있고 로마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베드로가 로마로 부터 도망치다가 로마를 향해 가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 때 베드로의 질문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주님은 로마로 간다고,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죽음의 자리 속에서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합니다. 성공에서 십자가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셔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지 않으면 죽음의 자리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아멘.’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될지어다.’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그 말씀을 나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지어다.’ 라고 말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상황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런 믿음의 고백, 믿음의 선포, 아멘의 신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세 가지의 선포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그 몸이 믿음대로 나아질지어다.’
‘어떤 생각으로 인해 내가 괴로워하고 슬퍼한다면
잘못된 영적 실체에 내가 사로잡혀 있다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시리라.‘

이 세 가지의 선포가 분명하게 우리 가운데 있어서
그렇게 선포하고 살겠노라고
그렇게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9. 28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