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마음(마태복음 18:1-4)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때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또 어떤 때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얘기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을 미워하라고 얘기하시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는 세상과 사랑하는 세상이 다른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되지 말라는 말과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는 말씀은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천국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이고 또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으로 통치되는 나라이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주인이 되시는 나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공간으로 얘기하면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법으로 얘기하면 사랑의 법으로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생명과 생명의 근원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통치하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본문에 보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하는데 어린아이 같이 된다는 것은 4절에 보면 ‘자기를 낮추는 사람’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린아이는 선과 악이 뚜렷합니다. 
만화나 동화나 아동영화를 보면 나쁜 사람이 너무나 뚜렷합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은 늘 좋습니다. 제가 동화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중에 하나가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왜 놀부가 그렇게 나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흥부가 게으르고 책임도 못 지면서 아이만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왜 제비는 흥부한테는 복을 주고 놀부에게는 벌을 주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른들이 놀부를 다시 해석해서 놀부보쌈을 만들었습니다. 놀부보쌈 집은 놀부의 인생을 풍성한 인생으로 다시 해석해서 이름을 지은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 속에서는 흥부는 늘 착하고 놀부는 못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보면 100% 악한 사람도 없고 100%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양쪽 다 보면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니까 흥부 같은 흥부도 안보이고 놀부 같은 놀부도 안보입니다. 흥부와 놀부가 다 섞여 있습니다. 

어떤 때는 흥부가 된 것 같고 어떤 때는 놀부가 된 것 같아 보이는데 왜 이야기 속에서는 좋은 사람은 늘 좋은 사람으로 나쁜 사람은 늘 나쁜 사람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선악을 구별시키는 것도 있고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보다 아주 단순명료하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내 주는 것이 어린아이에게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앙에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을 한 마디 할 때 마다 하는 말의 효과와 파급정도 등 여러 가지를 다 생각해서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말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이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는 ‘아니오’가 없고 ‘예’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태도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라고 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생각,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 가서 항복하라고 얘기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입장에서는 너무나 환영할만한 친바벨론 사람이고 이스라엘 쪽에서 보면 매국노입니다. 자신은 매국노가 되기 싫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한 어떤 사람과 다른 점은 예레미야는 그 일을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기득권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민족과 같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함께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에게는 하나님께서 ‘너희 민족이 노예로 팔려갈 것인데 팔려갈 것을 미리 보여주라.’고 하시면서 바지를 벗고 3년 동안 돌아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분을 벗고 그렇게 살라고 하니까 이사야가 그렇게 살아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낮추고 단순하게 반응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이 단순함이 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는 옛날에 기도의 능력을 받으려면 산에 가서 소나무 한 그루쯤은 뽑아야 된다고 해서 단순하게 정말 소나무를 뽑으러 기도원에 갔습니다. 물론 한 번도 뽑은 적은 없습니다. 아는 목사님은 그 때 제일 약한 소나무를 잡았어야 하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주 큰 나무를 붙들고서 뽑으려고 하니까 안 됐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바위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라고 하면 진짜 그렇게 했습니다. 며칠 금식 하라면 또 금식도 했습니다. 방언을 받아야 된다고 하면 또 기도해서 방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때에 그 믿음의 선진들은 제가 볼 때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했던 역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욕을 먹는 기독교가 됐지만 그렇게 성장했던 그 밑바탕에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기도와 눈물이 있었던 것인데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게 반응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도하라고 해도 기도도 안 하고 말씀공부 하라고 해도 말씀공부도 안 합니다. 장가도 가야 되고 시집도 가야 되고 장사도 해야 되고 할 게 너무 많습니다.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고 교회는 말씀 보는 곳이고 천 년 이천 년이 지나도 기도와 말씀이 있는 예배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에 교회가 복지관이 되고 교회가 상담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순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각’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낮춘다는 것은 단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만 있고 ‘아니오’가 없다는 하는 단순함을 회복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어린아이는 언제 어디서 놀든지 자기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를 늘 확인합니다. 
그래서 껌이라고 합니다. 잠 잘 때도 그냥 자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엄마 아빠한테 한 번씩 대보고 잡니다. 엄마 아빠가 있으면 안심하고 계속 자는 것입니다. 게다가 살을 대보고는 아빠인지 엄마인지도 압니다. 아이들은 늘 어디에 있든지 부모를 기억하고 확인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늘 부모를 기억하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그 속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주인으로 살고 계시고 아버지처럼 내가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 친목단체가 되는 것이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있지 않으면 세상에서 욕하고 있는 또 다른 이단 ‘팔원파나 십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만 욕할 수 없습니다. 구원파 안에 늘 유병언씨가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누가 있는지를 늘 정확하게 보고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것이 늘 우리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단순한 삶으로 회복하고 근본성을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린아이 같은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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