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신앙 1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72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승리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영어로 얘기하면 overcome입니다. 견디고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데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관점이 성공이 아니라 승리입니다. 성공은 내가 얼마만큼 축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는 하나님이 이미 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제가 농구를 좋아해서 미국에 있을 때 레이커스팀의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시간하고 경기시간이 같아서 경기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 12시에 재방송을 봤습니다. 농구선수가 공을 잡아서 골대에 넣는데 0.3초밖에 안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초만 남아도 3점 슛을 넣을 수 있기 때문에 2점 차이로 이길 수 있습니다. 12시 재방송은 이미 끝난 경기를 녹화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경기결과가 궁금해서 점수를 봤더니 1:99로 레이커스가 이겼습니다. 그리고서 재방송을 보고 있는데 99:98로 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미 끝난 경기이기 때문에 이길 것을 알고 있습니다. 1초 밖에 안 남은 시간이지만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 가슴은 두근거리거나 마음이 긴장되지 않습니다. ‘1초 만에 넣었구나.’ 하고 마음 편하게 앉아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오셨고 이미 오신 하나님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말세신앙이 있고 종말론적 신앙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인 것 같지만 조금 다릅니다. 말세신앙은 세상의 끝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기 가운데 1세기, 2세기, 3세기, 세기가 끝날 때 쯤 해서 늘 말세신앙이 이야기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몇일 주님이 오신다고 사람들이 다미선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도 또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다 세상의 끝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세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짐 싸가지고 다 교회공동체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 오셨습니다. 왜 안 오시나 기다리면서 일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오셨고 아직 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말세신앙은 세상의 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을 얘기하니까 맨날 세상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말세신앙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도 하나님 끝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처음과 끝이 있는데 처음과 끝을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시다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든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있는 이 시간이 첫 시간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쓰라는 말은 시간에 할례를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이 영원한 시간으로 바뀌는 것인데 지금 이 첫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쓰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의 시간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밥을 두 그릇 먹는 것도 차원이 다릅니다. 한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옛날에 못 먹었기 때문에 더 먹어야 된다고 하면서 두 그릇을 먹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다 더 먹어야 된다고 하면서 두 그릇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두 그릇 먹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하나님 안에서 내 생명을 가지고 열심히 살기 위해서 먹겠다고 두 그릇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두 그릇을 먹는데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T.V를 보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마지막은 하나님이 account, 계산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시간으로 썼는지 안 썼는지를 하나님이 계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정죄의 나무인데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에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나무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나무는 옳고 그름을 다 뒤집어 쓰셨습니다. 생명이 생명다워지게 하는 십자가나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신천지, 새 하늘과 새 땅에 갔더니 그 안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 생명나무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죄하고 사는 삶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 안에서 이미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셨고 오심을 통해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고 그것을 증언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새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사를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이야기를 경험하는 새 노래입니다. 주님을 노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나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경험해야하는 것입니다. 태생이 있고 인생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태생, 어머니 뱃속에서 10달 있었고, 인생, 70~80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영생으로 사는데 영생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영적인 비전을 주면서 그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질문입니다. fact라고 하는 사실 자체는 이미 사실만을 기술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오늘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비결을 가르치기 위해서 또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어떻게 누리고 이루고 살 수 있는지를 경험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의 가치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를 온전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진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읽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직분이 있는 것이고 듣는 직분도 있습니다. 듣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 사명을 가지고 들어야 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지키고 살아가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좋은 말씀, 나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가 사실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유대인들은 말씀을 그냥 읽기만 했습니다. 읽고 듣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헬라적인 사고가 있기 때문에 이성의 세계를 통해서 들어야지만 ‘아, 그런 거구나.’ 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위 말씀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말씀 자체가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신앙이 있는데 그 신앙이 사랑과 생명입니다. 사랑과 결혼 중에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결혼이라는 것을 하는 것일까?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나는 누구든지 다 사랑할 수 있어.’ 라고 한다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좋을 수 있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결혼이 틀, 구조입니다. 사람들은 구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얘기를 하고 그래서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내용만 있어도 안 되고 구조만 있어도 안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이라고 하는 구조 안에 들어가야지 생명이 나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실 생명을 낳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생명이 됩니다. 결혼을 하고 책임 아래 있어야지 생명을 낳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기 위해서 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서 점프를 해서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큰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가장 찌질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속에서 진정한 생명을 낳는 과정이 요한복음의 신앙입니다.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