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신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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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신앙이 있는데 그 신앙이 사랑과 생명입니다. 사랑과 결혼 중에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결혼이라는 것을 하는 것일까?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나는 누구든지 다 사랑할 수 있어.’ 라고 한다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좋을 수 있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결혼이 틀, 구조입니다. 사람들은 구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얘기를 하고 그래서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내용만 있어도 안 되고 구조만 있어도 안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이라고 하는 구조 안에 들어가야지 생명이 나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실 생명을 낳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생명이 됩니다. 결혼을 하고 책임 아래 있어야지 생명을 낳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기 위해서 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서 점프를 해서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큰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가장 찌질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속에서 진정한 생명을 낳는 과정이 요한복음의 신앙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할 때의 태초라고 하는 시간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와는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가 시작하는 시간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요한계시록으로 얘기하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태초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 태초의 시간 속에 말씀이계셨습니다.

말씀이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육신의 원어를 찾아보면 ‘고깃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이 썩고 쇠하고 없어질 수 있는 이 육신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처음과 마지막 시간의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살고 계시는 하나님, 말씀이 오늘 우리 가운데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시간 속으로 썩고 쇠하고 없어질 몸으로 부서지고 깨지고 흐트러질 수 있는 흙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작가 최인호가 예수님은 우리와 동시대 분이라고 얘기했습니다. 2천 년 전에 계신 주님이 영원이라는 시간으로 따져보면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 계셨습니다. 2천년 이라고 하는 시간도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1초 전에 계셨던 그 분과 우리가 동시대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천년 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천년을 너무나 쉽게 사시는 그 분이 인생이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인생 33년, 십자가 위에서의 6시간을 보내셨습니다.

33년이든, 6시간이든 사람의 연수가 120년이든 그 모든 시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는 0.000000001초도 안 되는 시간인데 그 시간들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시간과 같이 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요한 1,2,3서 또 요한계시록까지 요한이 계속 바라보고 있던 관점이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 마다 진짜 영이고 그것을 부인 하는 것 마다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여기에 앉아있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마더테레사하고 히틀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600만 명을 죽인 사람과 600만 명을 살린 사람이 하나님이 보기에는 똑같은 죄인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예수그리스도, 썩고 쇠하고 없어질 수 있는 우리들의 몸으로 오셔서 그 몸이 하나님 앞에 부활체로 영원히 썩지 않는 몸으로 회복되어질 것이고 거듭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하나님의 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썩고 쇠하고 없어질 수 있는 이 몸을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랬더니 말씀을 통해서 증인이 나타납니다. 그 증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사람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딸이 중2인데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자기가 세 살 이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혹시 자기를 입양해온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삼성가의 딸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성격도 똑같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겠지만 내가 아버지라고 얘기했습니다. 요한복음도 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믿고 싶어도 내 DNA가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됩니다.

제가 출판하고 싶은 책 제목이 있는데 ‘멋대로 살아라.’입니다. 그 ‘멋’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래 복, 원복입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죄만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죄를 얘기하시는데 1장 2장은 원복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충만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원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DNA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고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이고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 나라가 생명이고 예수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이시고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5절까지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이 증인이 된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위해서입니다. 증인은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늑대의 탈을 쓴 양이 있고 양의 탈을 쓴 늑대도 있습니다. 그 놈이 그 놈 아닙니다. 늑대의 탈을 쓴 양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양이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벗고 자기 멋대로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모양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3천 배를 해야 되고 벽을 보고서 수도를 해야 되는데 자기 기준을 죽이고 자기 습관을 죽이고 다 죽여야 됩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질대로 습관대로 원래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늑대의 탈을 쓰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늑대의 탈을 쓰지 않고 제대로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이제는 양이 양대로 살아서 우리 가운데 진정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자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는 원래 백조입니다. 오리가 난리를 해도 백조가 될 수 없습니다. 종에서 종으로는 진화할 수가 없습니다. 백조가 백조로 살지 못한 이유는 오리들 틈에서 태어났고 보이는 것이 다 오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오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뚱뒤뚱 오리처럼 걷는 것을 연습합니다.

원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되어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의 세상에 살다보니까 로마서로 얘기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인데 그 거룩하고 선한 것이 어느 순간 율법주의가 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내 마음에 탐심이 생기고 마음으로 오해하고 나니까 율법이 율법주의가 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꼴이 되고 그것이 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가 죄를 짓게 되는 하나의 틈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오리로 살면 안 되는 것인데 오리들이 너무 많으니까 자기가 연습하는 것입니다. 뒤뚱뒤뚱 걷는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백조는 덩치가 크니까 오리처럼 작아지려고 다이어트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기가 오리인줄 알고 삽니다. 그러다가 백조가 자기가 오리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하늘을 나는 백조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백조네.’하고 날아가는 원형을 보는 것은 성경의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구원 준다고 교회 갔더니 십 원 내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들을 하셨습니다. 구원이든 십 원이든 그 자리에 가서 내가 앉아있다는 것이 사실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신비를 경험해야 합니다.

백조가 자기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정체성을 찾고 나서는 백조로 살아야 되는데 내 몸에 익숙함이 있습니다. 오리로 살았던 인생이 너무나 깁니다. 그래서 내 몸이 죄를 기억합니다. 똑바로 걸으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뚱뒤뚱 걷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리의 탈을 쓴 백조라고 합니다. 백조의 몸은 원래 백조입니다. 백조의 몸으로 살려면 몸이 원하는 습관대로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원형,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원형을 쫓아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이 생명이고 주님이 우리가 살아야 될 원형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sign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표적은 기적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있는데 주님은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것을 일곱 가지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 가지 표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이 예수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사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결론적으로 이것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생명다워지는 것 자체가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예수로 사는 것, 백조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된 짓을 생각으로는 할 수 있지만 못 된 짓을 못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우리나라가 IMF가 터져서 친척집에 가서 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제 등록금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드렸더니 떼어먹으셨습니다. 새벽기도를 할 때 마다 그 분 얼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제가 계속 신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원수를 무찔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주님이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바꿨습니다. 하나님께 저를 사랑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수 때문에 잠 안 오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 뭐 있어 하나님이 하셔야지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타고난 기질, 타고난 천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열심히 노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음을 수련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이 ‘여호와 이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간증은 내가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려고 계획을 다 짰는데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간증입니다. 진짜 간증인지 가짜 간증인지는 간증 속에 자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1서에 보면 영을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을 분별하는 것이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 마다 진짜이고 인정하지 않는 것 마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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