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신앙 3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74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있는 두 가지 구조입니다. 보내심과 내어주심입니다. 보내심과 내어주심 안에서 똑같이 믿는 자는 다시 믿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보내셔서 이것이 소위 부르심에 대한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믿는 자들을 향해서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준다는 뜻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어주는데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말씀과 사람과 일을 하나님이 주님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내어주심을 통해서 생명이 생명을 얻고 다시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데 어디까지 내어주느냐 하면 요한복음에 새 계명이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할 때에 원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기준은 다 ‘나’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기준이 바뀝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기준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기준이 신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수준이 어디냐 하면 구약은 내 수준만큼 하라는 것인데 신약은 내 수준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까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신학자가 T.V에 나와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하신 사랑까지는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굉장히 인간적인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어 선생님이 중국인이었습니다. 그 선생님한테 예수를 전하는데 그 분이 눈동자가 달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분이 있느냐고,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예수’라고 하는 말 자체가 그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한테 ‘예수’를 말하면 다들 교회 다녀봤다고 말합니다. 별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됐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육신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내 힘으로 안 된다고 성령의 힘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성품을 주시는 것도 있지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늘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내 마음을 내어주는데 마음이 전쟁터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습관이 너무 많습니다. 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눈을 감은 장님이 예수를 알아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이 감겨지는 경험 귀가 먹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망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갈 곳 없는 은혜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사람들이 꼭 망한 뒤에 옵니다. 그런데 망하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성령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의 세 가지 신앙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신앙입니다.
말씀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육신의, 고깃덩어리의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허탄한 말과 망상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늘 하고 들으니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저는 가끔 하루 동안에 무슨 말을 하는지 녹음을 해서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회에 모이면 아줌마들이 평등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평등이 평수와 등수라고 합니다. 관심이 땅입니다. 늑대의 탈을 쓴 양들입니다. 미운 오리새끼의 습관들을 가지고 있는 착한 백조입니다. 맨날 세상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가 되어야 하는데 맨날 실재를 통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하면 ’아이고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거야.‘ 라고 하는데 신명기 8장으로 가 보면 너희에게 매일 먹였던 만나가 있지 않느냐고 그 만나를 먹인 것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돼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말씀부터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으니까 만나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나를 쫓아다닙니다.

요한복음의 신앙은 철저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이 말씀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신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흙으로 지으셔서 흙에다가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이 생기가 말씀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생기가 도는 이유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연예인 프로를 봤는데 볼리비아라는 나라에 가서 촬영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나라에 신기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햇볕을 받고 자라다가 다른 나무가 햇볕을 가리면 자리를 옮겨갑니다. 4미터에서 5미터 까지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 야자나무입니다. 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말씀 좋았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한테 주일예배에 살기 위해서 오라고 말합니다. 기어서라도 오라고 합니다. 사람이 기어서라도 가는 곳이 병원입니다. 기어서라도 생기가 있는 곳에 와야 합니다. 그곳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허탄한 말을 하고 망상 가운데 사는데 망상에 사는 이유가 가짜인데 진짜처럼 사는 것입니다. 제가 운동권이었는데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천 명이 잡혀서 200명이 구속됐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다 독방에 못 넣고 혼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5명이 한 방에서 자는데 데모하다 잡혀왔다고 했더니 독립군이 오셨다고 하면서 넘버 2로 인정해줬습니다. 넘버 1, 넘버 2는 잠자리가 좋은 순서입니다. 문가에서 자면 바람이 들어오기 때문에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넘버 1이 자는 자리이고 그 옆 자리가 제 자리였습니다. 그 안에서 재미로 바깥 세상에 대한 내기를 합니다. 그 때가 1987년이었는데 대구에 지하철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내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노태우대통령의 공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대구에는 지하철이 없다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이기면 사식을 공짜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말 때문에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구에서 지하철을 타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졌습니다. 이것이 망상입니다. 부산에서 타봤는지 몰라도 ’이기고 말리라.‘ 하다보니까 대구에서 지하철을 타 본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놓고 실제로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계속 자기암시를 합니다. 그래서 망상에 사로잡혀 삽니다. 망상이 깨지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내가 믿는 사람 같아?‘ 라고 물어보면 됩니다.’믿는 사람 아닌 줄 알았어.‘ 라고 답하면 망상인 것입니다. 말씀이 실제, 육신입니다. 이 육신의 실제가 없으면 말씀신앙이 거짓이 되고 망상이 됩니다.

두 번째 성령의 사역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인데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아와 고아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아버지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하나님 아버지, 천부께서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더 하시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아버지가 없는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이십니까? 제 딸이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서너 살 쯤 됐을 때 밤에 자는데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더니 ‘아빠 나가.’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자리가 좁다고 저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내 침대고 내 방이고 내 집인데 저 뻔뻔함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촌아버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라면 같이 잘 수도 없을 것입니다. 감히 자다 일어나서 좁다고 나가라고 소리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떠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늘 고아입니다. 고아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오늘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오늘 입을 수가 없고 오늘 살 수가 없습니다. 제 딸에게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주는데 안 주면 달라고 졸졸졸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직업을 못 찾거든 돈 받으러 다니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맡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당당하게 보채는 것이 진짜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삼촌 아버지 친척 아버지 남의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사니까 맨날 고아입니다.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증언하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임하셔서 나를 깨우쳐 주시고 나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인도하셔 주시옵소서.’ 성령에 대해서 정말 모르니까 도 닦으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도를 닦으면 안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일하실 수 있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대 자존감입니다. 절대 자존감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태생부터 하나님의 DNA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감입니다.

옛날에 전도사 사역을 할 때 아이들이 쳐져있으면 ‘잘생긴 전도사님을 봐라.’ 고 말했는데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를 제가 왕자병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발이 가장 센 아이를 불러서 나는 원래 왕자라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왕자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주와 공주병도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 공주는 다른 공주를 인정하는데 공주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만 공주여야 합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나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자존감은 다른 사람도 인격적으로 똑같다고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DNA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와 DNA가 똑같다고 해서 아들이 내 아들이 아닙니다. 호적에 들어가야 합니다. 법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생명의 법에 하나님을 쫓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법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물론 늑대의 탈을 쓴 양도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양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생명을 생명다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In Christ와 In Church가 있습니다. In Christ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분입니다. In Church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교회에 다녀야 되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다니는 것은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내기 위해서 뼈와 뼈끼리 상합하고 연락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제가 농구하다가 새끼손가락을 삐어서 Z자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보는 순간 확 뽑았는데 나중에는 퉁퉁 부었습니다. 지체들이 상합하고 연락한다는 것이 뼈와 뼈끼리 맞추는 과정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In Church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