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 1

요한복음 16장에서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영어로는 ‘know’ 이고 히브리어로는 ‘야다’ 라고 합니다. ‘야다’는 ‘아담이 하와를 알아서 가인을 낳았다’고 킹제임스버전(KJV)에서 얘기한 ‘안다’입니다. 

직역 영어성경은 크게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NASB 라고 하는 성경과 KJV 이라고 하는 성경 이 있습니다. NASB 버전은 알렉산드리아학파라고 하는 이집트 쪽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를 찾아서 엮은 사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고 분명하지만 소수의 문헌입니다. 

그런데 KJV은 대중적인 사본을 따라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 최초로 번역된 것이 KJV 인데 King James 가 모아서 영어성경으로 만든 것입니다. 

옛날에는 히브리어나 라틴어나 히랍어로 되어있어서 성경을 아무나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이냐고 물으면 성경에 써있다고 믿으라고 말했는데 평민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중에 영국에서는 영어로 번역된 KJV 이 나온 것이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알아서’ 히브리어원어로 ‘야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다는 말은 지식의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체험되어지는 앎이고 실제로 관계라고 있는 앎입니다. 

귀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앎은 지식의 앎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예수님한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합니다. ‘상관’은 relationship입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은 압니다. 귀신같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앎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알기는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귀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적 사고가 있고 헬라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사건, 말씀이 있으면 당연히 사건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적인 사고에서는 하나입니다. 히브리적사고는 통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대교육이 왜 문제냐 하면 현대교육은 과목별로 다 분리해서 교육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국어를 잘해야 수학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를 잘 하면 국어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수학은 원래 철학에서부터 시작한 학문입니다. 논리적 사고가 안 되는 사람이 수학을 못 하는 것이고 하나를 못 하면 계속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것을 다 쪼개서 가르치니까 과목들이 다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분리되어버렸습니다. 

히브리적사고는 그것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적사고로는 사실 성경을 그냥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읽으면 그것이 그냥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은 사실 옛날식 사고방식이고 현대로 넘어오면서 헬라적 사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헬라적 사고는 말씀의 지식이 사건으로 나타나는 적용점이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석적 사고가 계몽주의 이후에 과학의 발달이나 사람들의 사고의 발달을 높여주었습니다. 동양은 통전적 사고를 했다면 서양은 분석적 사고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서양식 사고가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다 직관적이고 통전적인 방식의 공부를 하지 않고 분석적인 서양식 공부를 합니다. 공부 안 하고 선문답을 통해서 깨달아지면 그것으로 사는 것이 통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통전적사고는 순간의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양식 서양식 사고의 방식 두 가지가 다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저와 함께 하는 성경공부는 거의 분석적 사고방식의 성경공부입니다. 그런데 카돌릭에서 하는 성경공부 중에 본문을 읽고 30분 정도 묵상하다가 떠오르는 한 단어가 있으면 그 단어를 다시 새김질하고 그 단어를 가지고 사는 그런 공부방식이 있습니다. 본문과 내가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용이 많아도 나에게 다가온 단어 하나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을 사건으로 통으로 받아서 사는 것도 있지만 그 본문의 말씀이 도대체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분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안다’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지식의 앎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 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친밀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얼마나 친밀해질 수 있을까요? 

16장의 Key Word는 ‘안다’ 이고 주어는 ‘성령’입니다. 성령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33절이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내가 성령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담대합니다. 평안함과 담대함이 내가 성령과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주고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적인 평안이고 세상을 향해서, 악을 향해서 담대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것이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또 진리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는 중요한 주제가 ‘안다, 야다의 신앙’입니다.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집을 나갈 때 마다 아이를 하나씩 낳아서 들어옵니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셋이나 됩니다. 아이들 이름도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이고 또 하나는 ‘긍휼이 없다.’ 그리고 세 번째는 ‘너는 저주받은 사람이다.’입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끝까지 고멜을 버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기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이들의 이름을 통해서 이름처럼 살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백성도 아니고 긍휼도 없고 저주라고 얘기하는데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고멜은 이혼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변하지 않는 절대사랑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사랑을 모릅니다. 호세아는 매일 기도하는 거룩한 남편입니다. 재미가 없으니까 고멜이 밖에 나가서 재미있는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갔다가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옵니다. 밖에서 만난 남자들과 나눈 사랑은 쾌락으로 즐기는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 아이가 나오는 것인데 사랑은 했는데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생명입니다. 사랑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책임이 없다는 말은 즐기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만난 남자들은 다 책임지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자꾸 집을 나가는 고멜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책임감 있는 남편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호세아인 줄 압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고멜 같은 여자랑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호세아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고멜입니다. 매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쾌락만 원하지 책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기를 원하시고 사랑은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혜신심리학박사가 아침마당에서 얘기하는데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흔 아홉 마리를 설득하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야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무료로 상담해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엄마이고 그 엄마들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서로가 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할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은 목자에게도 또 다른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엄마이신 하나님조차도 우리의 사랑을 또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서로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관계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쾌락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오시고 굴뚝으로만 오신다, 대문으로 정정당당하게 오시는 내 아버지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 산타클로스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평상시에 나와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사랑은 철저하게 책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책임만 따져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자원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자원함에서 책임으로 가야 합니다. 중매결혼을 한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나서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책임을 가지고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교회의 병폐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으니까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책임감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사랑함을 통해서, 자원함을 통해서 책임을 지고 나니까 또 다른 생명이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십자가, 우리에게 주신 책임은 사명,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입니다. 쫓아갈 때 마다 생명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 생명이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우리와 관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로봇은 생각이 없어서 자원하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름을 넣거나 전기를 공급하면 움직이는 것이 로봇이고 기계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서, 내가 기뻐서 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람한테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자유로운, 아주 창조적인 사람을 만드셔서 거부하는 것  조차도 스스로 제어하는 사랑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책임 속에 나타나는 요소가 절제입니다. 

2014. 3. 28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