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 2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정혜신박사가 이혼을 하고 똑같이 이혼의 경험이 있는 남편을 만나 재혼해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도 이름이 잘 알려진 분인데 한겨레신문에 쓴 시론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부남, 유부녀가 만난다면 그것은 분명 불륜입니다. 하지만 원래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을 함으로 책임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 책임에는 절제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스스로 제어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6장을 생명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5장을 관계의 장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그 기능을 온전케 하는 것이 친밀감입니다. 16장에서는 그것을 ‘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아는 것이 친밀감입니다. 그런데 그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성령이 하시는 일, 성령이 우리를 향해서 주고 있는 책임성이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이 세 가지가 성령의 기능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 살리신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났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맺어지는 열매가 이 세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진리’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13절)’ 

성령의 속성이 진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 때에 진리가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내 안에 계신 것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이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Helper 보혜사,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선생이 되고 스승이 되고 가이드가 되어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깨닫게 하고 어떤 것을 우리가 알게 하고 어떤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실까요? 그 내용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죄는 불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어떻게 아는 것이냐 하면, 성령께서 나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그 믿음이 있으면 ‘의’ 이고 믿지 않으면 ‘죄’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진리지식을 아는 것이고 그 진리지식을 내가 동의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내가 신뢰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라서 위임하고 위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의는 ‘하나님이 예수님이야.’ 라고 했을 때 ‘그걸 어떻게 믿어 난 동의 못해.’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동의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것에 대해서 신뢰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신비입니다. 터툴리안이 말하기를 기독교는 가장 불합리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딱딱 떨어지면 신앙이 아닌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신뢰하게 하시기 때문에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영화 <노아>를 봤는데 노아가 어른들을 위한 기독교판타지 만화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나님이 늘 침묵하시고 인간은 이성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영화 속에서 똑똑한 사람은 다 여자입니다. 여자들이 하나님도 잘 압니다. 

만약에 제가 노아라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마도 조금 다르게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 ‘비밀문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써 주신 약속의 문서라고 생각하고 노아가 간직하고 있는 내용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그 문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또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모르면 신이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한 모든 사람들은 100%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다쟁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것을 믿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신뢰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저한테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얘기하셨는데 진짜 하나님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사단의 소리일까요? 어떻게 분별해야 하나요?’ 라고 묻습니다. 실제로 분별하는 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아볼로는 말씀을 꿰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아주 상세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니까 오죽하면 아볼로파라는 성경공부파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아볼로는 성령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아볼로에게 성령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은 기막히게 꿰고 있는데 성령을 모르니까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가끔씩 교인들을 30년 40년 가르쳤는데 똑같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아볼로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변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다 성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온순해지고 갑자기 충성스러워지고 갑자기 절제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한테 내 기질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질로 살 수밖에 없는 내가 있다고 얘기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기질로 살 수밖에 없다고 애기하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는’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아홉 가지의 의미는 성령의 열매가 어떤 때는 사랑으로 어떤 때는 희락으로 또 어떤 때는 충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충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에 가야 되는데 거꾸로 북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방향으로 너무 열심히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그리고 파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고 아무리 날갯짓을 열심히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차에 타야만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있어야지만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늘 우리가 죄를 보게끔 합니다. 

201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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