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 3

제가 교인들에게 악하다고 얘기하면 목사님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용하는 그런 단어들이 전문용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지 않는다고 하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성령이 일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없으면 죄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고 믿음의 삶으로 내가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절)’ 

‘의’가 관계인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그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존재하는데 믿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데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부재함으로 살고 부재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삽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임재하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예수님이 안 계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임재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의’를 영어로 얘기하면 WWJD (What would jesus do.) 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늘 묻고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이지 않지만 내가 계신 것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악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의’를 선이라고 한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 착하다는 말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의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게끔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성으로 가도록 해 준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복음 교단에서는 방언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체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령의 체험이라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기도했을 때도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체험은 그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를 가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 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T.V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나서 내가 하나님과 늘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령체험의 증거는 자기부인입니다. 성령체험의 간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자기를 부인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재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증을 할 때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대우해 주신다는 것을 또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증도 진짜 간증이 있고 가짜 간증이 있습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희어머니께서 제사를 지내시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진짜 오셔서 식사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간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믿음의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증명이 안 되는 믿음의 간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의인으로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시고 그리고 계속 나를 깨끗하게 하셔서 온전하고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살게끔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절대로 정성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정성은 내가 해야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자기수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정말 날라리종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일하십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는 것, ‘야다’입니다. ‘야다’를 모르는 체 계속 뭔가 하려고하는 것 자체가 정성의 종교이고 노력의 종교입니다. 

파리가 K부산행 TX를 타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부산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핵심입니다. 핵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또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열심히 뭔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붙들고 있으면,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지키고 있으면 성령이 일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1절)’ 

더 이상 이 세상의 임금이 나를 좌지우지할 수 없고 나를 주도할 수 없고 내가 속박당할 수 없고 내가 컨트롤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한테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네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너의 모든 것은 은혜다.’ 라고 하십니다. 버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대에 서지 않습니다. 심판대에 서지 않고 계산대에 섭니다. 얼마나 잘 지켰는지를 계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자원함으로 또는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임재를 어떻게 유지하고 성령에 이끄심에 따라서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안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성령에 내 안에 계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그것에 대해 내 몸을 위탁하고 일을 위임했을 때 나에게 평안함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담성이 있고 사람의 부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담성은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그 믿음의 삶으로 살게끔 하실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한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해 주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담성입니다. 그리고 나의 부담성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믿음을 인정하고 성화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자원함으로 가야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부담성입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누려’ 코너가 있습니다. 부자이긴 한데 졸부라서 식당에 가서도 실제로 누리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다스리지 못하고 그 안에서 속박되고 억압되어서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담성과 나의 부담성이 만나야지 진정한 온전과 완전이 내 안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가 제일 쉽습니다. 불교는 일 천배 해야 하고 백 팔 배해야 하고 겨울동거해서 침묵수양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메시야신드롬이 있습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초인과 같은 사람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수도와 불교의 수도는 정말 다릅니다. 

201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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