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1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17장 전체가 기도문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1절)’ 

우리는 다 눈을 감고 기도하지만 유대인들은 눈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 평범한 기도입니다. 가끔 우리도 눈 뜨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예배드리면 눈 안 감고 기도한다고 혼이 났습니다.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집중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눈을 뜨고 기도한다는 것은 현실을 보고, 직면하고 기도를 해야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골방에서 하는 기도도 있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도 있고 세상에서 내 삶으로 보여주는 기도도 있는 것인데 눈을 감고하는 기도와 눈을 뜨고 하는 기도가 사실은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17장에서의 기도는 왜 대제사장의 기도냐 하면 사명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하나님이 예수님이라고 밝혔다면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내어주는 사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승화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도 사랑하는 존재이고 우리도 서로 간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써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는 생명을 통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정말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7장에서 말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기도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사람과 말씀과 일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말씀은 언약이고 그 언약을 하나님은 생명이 있는 사람과 했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셋 중에 하나만 강조하면 안 되고 다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의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 세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똑같이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이룬 사람은 죽을 때가 된 것이고 내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는 이유가 사명이고 그 사명은 동시에 또 내 삶의 의미로 다가와야 되는 것이고 내가 살아야 되는 의미가 그 사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셔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사랑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요소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통해서, 생명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오늘 대 제사장의 기도의 핵심이 하나 됨입니다. 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셨고 왜 예수님이 사람에게 주셨느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도 하나 됨입니다. 하나 됨이 사랑의 속성 또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화성에서 오고 하나는 금성에서 온 별에서 온 그대들을 도대체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인데 한 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시고 아버지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들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끼리도 하나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 됨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친밀감이고 하나는 공동체라고 하는 연합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에서 이루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을 허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그 사역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의 Gall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사랑으로 이루는 친밀감과 peace maker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세 가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주님은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성숙한 신앙은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다 이룰 수 있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주신 사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다른 곳 가지 말라고 그 곳으로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죄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명만 고쳐주시고 도망가셨습니다. 몇 명만이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하는 사람과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예비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사명이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비하기 위해서 사람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고 일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잘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치적인 문제에 참여하게 되어서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도 내가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요소,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 되게 하기 위해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욕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섬겨주려고 할 때도 모든 사람들이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주신 사람, 주신 말씀, 주신 일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을 먹을 대상에게서는 욕을 잘 먹으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주신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주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입니다. 물론 긴가민가할 수는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솔직히 ‘저 사람은 제 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 빨리 데려가 주세요.’ 라고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양이 맞다고 하셔서 그렇게 대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에게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들은 양과 염소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늘 염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제 음성을 듣고 공동체 안에 같이 있으면 제 양이라고 대우하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무 양같이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물어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다 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나님이 권한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신 사람, 나에게 주신 말씀, 나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지 ‘다 이루었도다.’ 하고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사실 모르는 것인데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 가지를 사명으로 주시고 이루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여호와 삼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의 경계선입니다. 여호와의 분명한 경계선이 동, 서, 남, 북에 있고 각 방향마다 문이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 통치입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공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나를 동쪽의 문지기로 부르셨다면 문지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소신앙입니다. 내가 지켜야 될 공간, 내가 지켜야 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예비하는 자로 부르셨는데 뜬금없이 정치적인 얘기를 해서 잡혀 죽은 것입니다. 나중에 세례요한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혁명은 일으키지 않으시고 맨날 먹고 놀기만 하니까 도대체 그 분이 그 분 맞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외치는 자입니다. 문헌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보다 세력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이고 예수님은 조그만 교회 목사님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외치치는 않고 ‘당신 맞습니까?’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2014.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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